三國志 ep 6. 조조네 최고 무장이자 동시에 연의의 최대피해자 조인(曹仁) Pt 4
조인은 번성공방전에서 살아남은 후 조비가 위왕에 오르면서 거기장군(車騎將軍) + 도독형양익주제군사(都督荊揚益州諸軍事-형주,양주,익주의 군무를 총괄하는 자리)에 제수되고 진후(陳侯)라는 후작위로 승진합니다. 뿐만 아니라 식읍 2천 호를 추가로 받아 기존의 1,500 호와 더해 3,500호가 되고, 사망한 부친 조치(曹熾)에게는 진목후(陳穆侯)라는 시호와 묘지기 10가구(말 그대로 묘를 관리하는 사람들로만 10 가족을 쓰게 해주는 위나라 스케일) 를 하사 받는 특혜(?)를 누립니다. 벼슬, 군권, 작위, 가문력 모두 상승하는 쾌거..
**댓가라기에는 뭣하지만 이 즈음 손권이 진군해오자 관우와 피터지게 싸운 지 얼마 되지 않아 병량이 충분치 않다고 여겨 조비가 조인에게 완(남양)으로 올라오도록 지시합니다. 하지만 사마의가 이렇게 반대합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명령에 충실한 조인은 양양과 번성을 불태우고 남양으로 물러나지만, 손권이 더 진격하지 않아 낚였음을 알고 조비가 후회했다고 합니다...
12. 221년 손권이 진소(陳邵)를 보내서 비어있던 양양을 점거하는데,
조인과 서황이 양양을 탈환하고, 남쪽의 부랑민과 화전민들을 북쪽으로 이주시킵니다.
마침내 221년 4월에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차합니다.
13. 그리고 한달 후인 221년 5월 풍익(장안 북쪽)에서 정감(鄭甘)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인이 가서 청소해버립니다.
6개월 후인 11월에는 대사마(大司馬)로 승차하고, 이후 제군을 지휘해 오강(烏江)을 점거하고 돌아와 합비(合肥)에 주둔했다.
이렇듯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살아온 조인은 아쉽게도 은퇴전의 성과는 좋지가 않았습니다.
14. 222년 9월, 위 문제 조비가 오나라를 3방면에서 공격합니다. 형주 남군으로 조진, 하후상, 장합, 서황을 보내고, 동구로는 조휴, 장료, 장패를, 그리고 조인이 단독으로 기병과 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유수로 진격합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조인은 동쪽의 선계(羨溪)로 간다고 거짓 정보를 퍼뜨립니다. 유수오를 방어하는 책임자는 유수독은 주환(朱桓)이었는데, 소문을 듣고 병력을 나눠서 선계로 보냅니다. 그러나 곧 유수에 조인군이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선계로 떠난 병력을 회군시키지만 조인이 먼저 도착해버립니다. 방어군은 달랑 5천 명뿐.
여기서 주환은 두려워하지 않고 "현재 적의 장수에게는 지혜도 없고 용감하지도 않으며, 사졸들은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며 천 리를 걸어왔으므로 병사와 말은 피곤한 상태이오. 나와 각 부대가 높은 성을 차지하고 남쪽으로는 대강에 임하고, 북쪽으로는 산과 구릉을 등지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병사들은 수비 쪽에서 공격 쪽을 제압하는 백전백승의 형세인 것이오. 조비가 직접 왔을지라도 걱정할 것이 못되거늘, 하물며 조인 등임에랴!" (오오 패기보소...) 라며 깨우칩니다.
주환은 깃발을 쓰러트리고(군기가 쓰러졌단건 군의 통솔이 개판이라는 소리입니다) 북을 울리지 않은 채(규율이 안통하는 패잔병처럼) 허약함을 보여서 조인을 유인합니다.
조인은 아들 조태로 유수성을 공격하게 하고, 장군 상조, 제갈건, 왕쌍은 유선(소기름칠한 배)를 타고 중주(부대의 가족이 거주하는 곳)를 습격하게 합니다. 조인 본인은 1만 명을 거느리고 탁고에 주둔합니다.
이 때 장제(蔣濟)가 말하길 "적병은 서쪽 해안을 점거하고 배를 상류에 나란히 진열시키고 있는데, 우리 병사들은 주중으로 들어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지옥 속으로 들어가고, 위험과 사망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인은 한 귀로 흘려듣게되고..
223년 3월, 상조가 5천 명을 이끌고 유선을 타고 유수 중앙의 사주(모래섬)을 건너게 하고, 조태는 주환을 공격합니다. 주환은 맞받아치고 엄규는 상조를 상대합니다. 주환은 적의 유선을 탈취하고, 조태의 군영을 불태워 퇴각하게 만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조를 죽이고, 왕쌍은 사로잡아 무창으로 보내며 적 1천 여명의 수급을 베거나 익사시킵니다.
이로 인해 조인은 결국 합비로 물러나는 참패를 당하고, (이 패배에 화병이라도 났는지) 3월 19일 56세로 세상을 떠납니다. 충후(忠侯)라는 시호를 추증받고요.
여기까지 위나라의 수문장이자, 조씨 중 최고의 무장으로 평가받는 조인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인물에 대해서는 댓글과 쪽지로 계속 알려주시면 선별해서 업로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