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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빛낸 장군들 - (1) 파비우스 막시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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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한니발에 대항하면서 위험을 자초할 모험은 피하고 이탈리아를 방어하는데만 주력했다. 이런 전술로 인해 지연자(쿤크타토르, cunctator)라는 별명과 위대한 장군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 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 『전술론』 - 



  BC 218년 11월,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였다. 이것이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11)이다. 로마 당국은 이 급작스럽고 과감한 공격에 굉장히 당황했는데,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241)에서 카르타고가 보여준 신중한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시 중 하나였던 히스파니아(지금의 이베리아 반도)의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때문에, 로마 원로원은 당연히 전쟁이 히스파니아에서 전개될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하여 BC 218년 그 해의 집정관이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를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칠리아로 보냈다. 전자는 히스파니아에서 한니발을 저지하기 위해서였고 후자는 시칠리아에서 북아프리카 공격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1.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1) 파비우스 막시무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군툼. 현재는 스페인 발렌시아 주의 사군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의 결과는 명백해졌다. 로마는 한니발에게 크게 허를 찔리고 만것이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군대를 거느리고 마실리아(현재의 프랑스 마르세유)에 이르자 이미 한니발은 자신의 동쪽으로 지나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는 서둘러 이탈리아 북부의 포강(Po River)으로 돌아와 그곳에서 갈리아족과 한창 전투중이던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BC 218년 11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휘하의 로마군은 티키누스 강 근처에서 한니발의 군대와 맞이하였으나 참패하고 말았다(티키누스 강 전투). 다음 달인 12월에도 시칠리아에서 복귀한 또 다른 집정관인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트레비아에서 한니발을 맞상대하였으나 패배하였고(트레비아 전투) 이듬해인 BC 217년 6월,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의 부대도 한니발의 매복 공격을 받아 1만 5천명의 병사를 잃고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하였다(트라시메누스 호 전투).


  초기 전투들에서의 참담한 패전으로 로마의 사기는 크게 꺾였으며 특히 이탈리아 지역에서 당한 패배였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이 시기의 한니발은 마치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전부다 박살내버리는 절대적인 자연의 힘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한니발의 군대는 카르타고인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부족들로 이루어진 군대들의 혼합체였다. 즉, 북아프리카의 누미디아인, 히스파니아의 이베라아인, 켈트 이베리아인, 루시타니아인, 알프스 산맥의 갈리아인, 리구리아인, 이탈리아인 등 다양한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군대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니발 가문이 주도한 히스파니아에서의 수많은 전투로 단련되어 훈련과 실전 경험이 풍부했다. 그러나 로마군은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우세한 전술보다는 개개인의 용맹과 사기에 의존하는 편이었다. 


  한니발의 강력한 군대에 의해 로마는 점점 위기에 빠졌다. 심지어 유명한 칸나이 전투에서는 무려 86,4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약 6만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잃는 대패를 당했다. 그러나 다른 국가들 같으면 곧바로 멸망하거나 적에게 항복했을 법한 상황에서도 견뎌내고 결국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가 본격적으로 지중해 세계로 뛰어들어 드넓은 지역을 자신들의 발 아래에 두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이러한 것들은 마침 이 시기에 로마인들이 산문체의 글을 쓸 수 있게 됨으로써 우리는 그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인인 폴리비오스는 '역사'라는 저작을 통해 제2차 포에니 전쟁을 다루었으며 파비우스 픽토르는 그리스어로나마 로마인 최초로 역사 기록을 남겼다. 그리고 대(大) 카토가 마침내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라틴어로 작성된 역사(기원론)를 남길 수 있게 되었다. 파비우스 픽토르와 대 카토 모두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군복무를 한 경험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비록 이들의 기록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로마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2.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1) 파비우스 막시무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의 한니발의 이동 경로와 초기 격전지




2. 독재자, 파비우스 막시무스


  다시 BC 217년으로 넘어가보자. BC 217년 6월, 트라시메누스 호수의 전투에서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이끄는 3만명의 병사들 중 1만 5천명이나 전사하는 참패를 당하고 지휘관인 본인도 전사했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뒤,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를 구원하기 위해 가이우스 켄테니우스의 4천명의 기병대가 도착했으나 그들도 패배하고 항복하였다. 도시 법무관(프라이토르 우르바누스) 마루크스 폼포니우스는 이 사실을 로마인들에게 발표했고 로마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당장 로마로 진군하는 길이 뻥 뚤리게 되자 원로원은 단독으로 국가의 모든 행정과 군대를 지휘하는 임시 직책인 독재관(딕타토르, Dictator)을 임명하기로 결의했다. 본디 독재관이라는 직책은 한 사람이 권력을 독점하는 절대 권력자를 혐오하는 로마 공화정의 기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지난 30년간 선출된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라가 워낙에 위급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유능한 인물에게 모든 권한을 몰아주기로 하였다. 원래는 두명의 집정관 중 한사람을 독재관으로 선출해야 하지만 그 해(BC 217년)의 집정관 중 하나인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위에 언급한것처럼 이미 전사했고 또 다른 집정관인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는 한니발과 대치하느라 수도 로마로 돌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켄투리아회에서 투표를 실시한 결과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독재관으로 선출되었다.


  당시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나이는 58세로 유력한 로마 귀족 가문출신이었다. 그는 이미 BC 233년과 228년에 집정관 직을 지냈고 BC 230년에는 감찰관을 지냈다. 그의 막시무스라는 이름은 그의 증조부인 퀸투스 파비우스 룰리아누스가 삼니움족과의 전쟁에서 쌓은 군사적 명성으로 인해 얻은 것이다. 이후 그의 가문은 막시무스라는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로마인들이 조상들의 업적을 대외적으로 알리기를 좋아하기도 하고 자신이 출세하는 배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어린 시절 입술에 난 큰 사마귀때문에 베루코수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알프스 산맥의 리구리아족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다. 리구리아족은 산악 민족으로서 그들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와 그들의 동맹국들을 약탈하자 파비우스는 반격을 가했다. 이로 인해 리구리아족은 격퇴되었고 파비우스는 개선식을 거행하는 영광을 얻었다. 리구리아족은 험난한 산지를 이용한 매복과 기습 작전에 능했는데, 이들과의 전투 경험을 통해 파비우스는 스스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시간이나 장소, 방식에서만 전투를 치르는것이 중요하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것은 한니발과의 전쟁에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파비우스는 독재관으로서 휘하에 4개 군단의 병력을 확보하고 동맹국들의 4개 군단도 거느려 8개의 군단을 확보했다. 8개 군단의 규모는 약 3만명에서 4만명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규모에 비해 질적으로는 의심스러웠다. 부대원 중에 상당수는 트레비아 전투와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패배한 뒤였고 기병대의 전력도 온전치 못했다. 나머지 새로 모집된 병사들도 훈련이 부족하고 지휘관과의 결속력도 부족한 상태였다. 따라서 한니발의 정예 병사들과 상대하기에는 부족했으며 특히 기병전력에서 더욱 그러했다.


  독재관은 본디 기병대장(마기스테르 에퀴툼, Magister Equitum)을 부관으로 거느렸다. 기병대장이라는 직책은 로마 역사 초기부터 있었던것으로 추정된다. 기병대장이 기병대를 이끌고 독재관이 중장보병들을 거느렸는데, 심지어 독재관은 전쟁 기간 중에 말을 타는것도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법률은 로마가 아직 작은 도시국가이던 시절에나 적합한 것으로서, 이미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대국으로 성장한 상황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었다. 독재관이 휘하에 수만명의 군대를 말을 타지 않고 직접 걸으면서 지휘한다는것은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따라서 파비우스는 이러한 법에서 자신을 예외로 면제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했고 원로원은 이를 승인하였다. 즉, 현실적인 필요가 전통의 관습을 누른것이다. 다만, 기병대장의 경우에는 독재관이 직접 선택하는것이 원칙이었지만, 파비우스 자신도 예외적으로 투표를 거쳐 선출되었기 때문에 기병대장도 투표를 통해 뽑았다. 그렇게 해서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가 기병대장으로 선택되었다. 미누키우스 루푸스는 성격 면에서 파비우스와 잘 맞았던것 같지는 않다.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처럼 과감하고 대담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3. 파비우스의 지연 및 회피 전술


  한편, 이 시기에 한니발은 트라시메누스 호수에서 동쪽으로 이동해 아펜니노 산맥을 넘고 피케눔을 지나 아드리아 해안으로 이동중이었다. 그의 병사들은 오랜 행군 과정에서 질병과 누적된 피로로 고통 받았고 군마들도 마찬가지였다. 히스파니아에서부터 그 먼 거리를 행군하면서 몇번의 전투까지 치뤘으니 무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름이 되자 파비우스의 군대는 한니발의 주둔지와 채 10km도 떨어지지 않은 아이카이(Aecae)에 있었다. 한니발은 파비우스에게 결정적인 한번의 전투로 타격을 주기 위해 지속적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이러한 도발에 파비우스는 응하지 않았다. 로마군이 싸울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한니발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전투를 코앞에 두고도 철저히 피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의 땅을 유린하고 약탈했다. 이러한 행위는 로마인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특히 농민들은 농민 나름대로 자신들의 농지가 적에게 약탈되자 크게 실망하였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여전히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언제나 한니발의 군대와 하루나 이틀 정도의 행군거리만을 유지한채 아무런 전투도 취하지 않았다. 대신에 부대의 군기와 규율을 잡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주둔 장소는 언제나 자신들에게 유리한 고지대를 위주로 정했다. 특히 한니발의 우세한 기병이 활약하기 좋은 드넓은 평원은 철저히 피했다. 이로 인해 한니발 또한 유리한 위치에서 웅크리고 있는 로마군을 향해 공격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파비우스는 출정을 하기 전부터 막대한 식량과 물자를 이미 확보한 상태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행군 도중에 식량을 구하느라 이리저리 옮겨 다닐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보급 부대들은 필요한 경우 경보병과 기병을 통해 호위했기 때문에 안전했다. 


  이러한 전술에 한니발은 큰 난관에 봉착했다. 파비우스는 그저 자신의 군대가 이길 수 있는 방법만을 골라서 하고 있었다. 자신의 병사들의 훈련 상태와 경험이 한니발의 군대에 비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몇차례에서의 승리로 한니발의 병사들의 자신감은 최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성급히 한니발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면 아마 무조건 패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적의 입장에서는 얄밉게도 천천히 자신의 부대들의 숙련도를 높여 나갔다. 대규모 전면전은 피하는 대신에 정찰병들간의 전투 처럼 여러 차례의 작은 전투만을 고집해 전투 경험을 쌓게했다. 이런 소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자 파비우스의 병사들은 점점 사기가 올랐고 반면에 한니발의 병사들은 천천히 지쳐갔다. 거북이같은 인내심을 가지고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여러 차례의 작은 전투를 통해 파비우스는 점점 한니발과의 전투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다.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한니발은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캄파니아 지방으로 와서 팔레르노 평원을 약탈했다. 이 곳은 매우 비옥한 지역으로서 대량의 포도주가 생산되는 지역이었다. 이곳을 약탈하여 파비우스가 자신과 전투를 치룰 수 밖에 없게 하든지 아니면 로마의 동맹국들이 로마 연합에서 이탈하든지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파비우스는 미누키우스와 같은 몇명의 부하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캄파니아 평원 주변의 고지대에 진을 치고 적을 포위한채 단 한번도 전투를 치르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리비우스에 따르면 루키우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파비우스의 명령에 불복종하여 400명의 정찰대를 이끌고 적과 싸우다가 전멸하였다고 전해진다.




3. 한니발의 탈출 작전


3.pn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1) 파비우스 막시무스


캄파니아 지방의 위치


  한니발은 팔레르노 평원에서 꼼짝없이 갖히게 되었다. 파비우스는 한니발이 탈출을 시도할 경우, 팔레르노 평원으로 올 때 이용했던 길을 그대로 지나갈것이라고 예상하여 4천명의 소부대를 보내 그 길을 선점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끄는 본대는 그 길이 잘보이는 언덕에 주둔했다. 이 위치는 로마군에게 매우 유리하여 한니발이 그 길을 지나가주기만 한다면 카르타고군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곳이었다. 한니발의 군대는 이미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남의 갈리아라는 뜻. 오늘날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갈리아인들과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카르타고 본국과도 연락이 두절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은 패배라도 당할 경우 한니발의 무적 신화는 깨질 것이며 로마 동맹에서 이탈하려던 조짐이 보이던 동맹국들은 다시 로마에게 붙을 것이다.  


  양측은 약 3km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였다. 여기서 리비우스는 한니발의 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가 격퇴당했다고 하였으나 폴리비오스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그 이후에 발생했다. 한니발은 보급 부대를 담당하는 하스드루발을 시켜 엄청난 양의 마른 장작을 모아오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장작들을 모아 튼튼한 소 2천마리의 뿔에 묶었다. 그날 밤이 되자 장작들에 불을 붙여 소들이 그 길을 지나가게 하였다. 또한 소들이 흩어지지 않게끔 경보병 부대들도 붙여주었다. 한편 길목을 지키던 로마 병사들은 횃불들을 보고 카르타고군이 공격해오는것으로 오판해 전투 태세를 갖췄으나 그것은 병사들이 아니라 소떼들이었다. 겁에 질린 소떼들이 난동을 부리며 길 한복판으로 달려들자 길목을 지키던 로마의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파비우스의 로마군 본대는 소란스러운 소음과 난잡한 횃불때문에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기가 힘들어 진지에 계속 머무르며 해가 밝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적의 함정이나 매복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니발의 군사들은 그렇게 무사히 길목을 건넜다. 


  팔레르노 평원에서의 사건은 한니발의 뛰어난 군사적 천재성과 능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지만 파비우스에게는 엄청난 굴욕이었다.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한니발은 동계 숙영지로 적합한 창소를 물색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파비우스도 독재관으로서 국가의 종교의식에 참관해야 해서 기병대장인 미누키우스에게 군단들을 맡기고 로마로 떠났다. 한니발은 루케리아 지방의 게루니움을 공격해 점령하고 겨울을 나기 위한 물자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병사들을 분산시켰다. 미누키우스는 이를 보고 한니발의 군대가 분산되어 있고 당분간 전투를 치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공격을 감행했다. 게루니움 마을의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미누키우스의 로마군이 승리하였다. 승전보를 목마르게 기다리던 로마인들은 열광하였고 미누키우스는 이 공로를 인정 받아 독재관인 파비우스와 동등한 권력을 수여받았다. 이로 인해 파비우스가 국가의 모든 행정과 군사를 장악하는 독재관 체제는 사실상 2명의 집정관이 국정을 운영하던 평상시의 체제로 돌아간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로마에서 다시 전장으로 복귀한 파비우스에게 미누키우스는 하루씩 번갈아 가며 군대 전체를 지휘하자고 제안했으나 파비우스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로 인해서 둘은 결국 전체 군단을 둘로 나누어 지휘하였다. 그러나 미누키우스의 부대는 얼마 후 한니발의 매복 작전에 걸려 위험한 상황에 쳐했다. 만약 파비우스가 제 때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미누키우스와 그의 군단들은 몰살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상당한 병력을 잃은 미누키우스는 다시 파비우스의 휘하로 들어갔고 파비우스는 이들을 사령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맞아들였다. 로마 시대의 아버지란 단순한 혈육 관계를 넘어 아버지가 아이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는 관계로서 정치적으로 아들이 아버지에게 반대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6개월의 독재관 임기를 마치고 파비우스는 로마로 돌아갔다. 그리고 휘하의 병사들도 돌아가 회복과 휴식의 기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해인 BC 216년 로마 공화정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병력이 전투에 참가하는데 그것이 바로 칸나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역사상 최대의 참패를 당하게 된다.




http://cafe.daum.net/dotax/Elgq/1411391

1 Comments
핑구 2018.03.15 18:07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마르디우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의 장군이었으며ㅑ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충복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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