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00명 vs 71000명 벽제관 전투
1593년 음력 1월 27일
벽제관 전투
음력 1월9일, 치열합 접전 끝에 조명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자
황해도와 경기도 각지의 왜군부대는 그 기세가 꺾여
조금씩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왜6군장 고바야카와 다카카케가 개성에서 방어선을 펼 것을 주장하였으나
왜8군장 우키타 히데이에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대다수 왜군 장수들의 의견에 따라
왜군은 한양에 집결하였다
그수가 약 7만이 넘었다
한편 평양성에서 대승을 거둔 명군 제독 이여송은 기세가 등등했다
평양성에서 명군 4만3천을 이끌고 남하한 이여송은
음력 1월 10일 무리없이 개성을 점령했다
음력1월25일
명군 부총병 사대수의 정찰대가
왜병 60명을 베는 승리를 거두자 점점 왜군을 깔보게 되었다
그는 단번에 한양을 탈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이여송을 부대를 이끌고
음력 1월26일
순식간에 파주까지 남하하였다
음력 1월26일
명군은 선봉대로 기병대 3천을 차출하여 진격로를 탐색하였다
왜군은 수색대를 이용하여 명군의 진격로를 파악하여
명군이 진출하는 곳마다 막아섰다
이날 명군과 왜군은 서로 밀렸다 밀었다가 하며
별 소득이 없는 전투를 벌였다
음력 1월 27일
이여송의 본대가 벽제관에 도착하였다
이여송은 명군에 차고 넘치는 포병대와 보병을 이용하지 않고
호위기병 1천만 대동하여 한양으로 향했다
도중 왜군의 기습으로 대다수의 호위대가 전멸하고
그의 부관인 이유승이 이여송을 대신하여 사망하는 등
명군의 피해가 속출하였다
이여송은 계속해서 밀려오는 왜군의 수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후퇴하였고
이를 추격하려는 왜군을 명군 장수 양원이 나서서 막아낼 수 있었다
이 전투의 기록은 조선, 명, 왜 3국이 달랐다
명나라는 이 전투를 대대적인 승리로 기록하였고,
전투에 직접적인 기여가 없었던 조선은 명나라의 통보만 받고 마찬가지로 승전으로 기록하였다
하지만 왜의 기록에서는 왜군이 타격은 있었지만,
명군을 무사히 패퇴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군 중 누가 승리하였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여러가지 정황상 명군이 대패하였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기세등등하던 명군은 이 전투로 사기가 저하하여 후퇴한 이후
왜와의 협상에 주력하게 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남하하는 대규모의 명군과 협력하여 한양을 공격하기 위해
행주에 주둔 중이던 조선군 4천에게 이러한 결과는
결코 바라지 않던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