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국시대 조국에서 죽지 못한 비운의 명장 염파.
중국 전국시대의 조나라의 명장.
흔히 노익장의 대명사로 알려졌으나
워낙 늙어서도 출중했기 때문에 그럴 뿐 실제로는 젊은 시기부터 손에 꼽는 명장이었다.
전국시대에 가장 뛰어난 명장중 한 명으로 꼽힐 정도로
탁월한 장수인 동시에 정치가로서도 안목을 갖춘 문무겸비한 인물,
염파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염파의 조국 조나라에 대해 알아보자면,
조나라(趙-,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8년)는
진나라에서 분리되어 나온 나라로서 전국시대의 전국칠웅 중 하나이다.
위나라, 한나라와 더불어 삼진(三晉)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춘추와 전국시대의 차이점은
춘추 전국시대 때는 가장 강한 국가의 제후를 패자라 하여
남들 위에 군림하기만을 바랬으나
전국시대때는 다른 나라를 지도상에서 궤멸시키는 방향으로 바뀐다.
전국시대는 철기의 사용이 본격화 됐으며
군대도 귀족 중심의 전투에서 평민 중심의 징병제로 차츰 바뀌어
전투가 대형화되는 시점이다.
사기에 따른 행적을 보면,
"기원전 283년, 염파는 장군으로서 진나라를 쳐서 석양(昔陽)을 차지하였다."
"기원전 282년에는 제나라를 쳐서 양진(지금의 산동성)을 함락시킨 공으로
상경(上卿)에 임명되었다."
그의 용기는 당시 제후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 전국시대는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진나라는 전국 칠웅 중 최강으로 나머지 6국의 힘을 합쳐서 상대가 안될 정도의 강국이었다.
실제로도 여러나라를 압박하고 괴롭히고 있었으며
공갈,협박을 서슴치 않을정도의 깡패 국가.
그러던 진나라는 백기를 보내 약소국인 한나라부터 공격하고자 했고
한나라의 상당 태수가 조나라에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닭 쫓던 개 꼴이 되는 바람에 조나라와 대 결전이 시작이 되었다.
이 전투가 바로 너무나도 유명한
장 평 대 전.
장평 대전(長平大戰) 또는 장평 전투는
기원전 262년에서 기원전 260년에 걸쳐
중국 진나라와 조나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회전(=전면전) 이다.
중국의 전국 시대의 판도를 변하게 만든 대표적인 전투의 하나이자
장평의 승리는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패전국인 조나라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투였다.
중국의 고전에도 이 전투는 상당히 중요한 전투라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진나라는 다발적인 전투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결정타는 전혀 입히지 못했고
군대의 사기는 날로 하락하고, 남은 5국의 침략에 매우 불안하였다고 한다.
당시 군을 이끌던 장군은 진에서도 알아주는 명장 왕흘이었는데,
염파의 지구전에 말려들어 불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의 재상인 범수가 한 가지 계책을 짜기에 이르렀고..
그 계책이라는게 ,
"진나라에겐 염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조나라의 명장이였던 조사의 아들 조괄은 정말 무서워한다."
라는 소문을 내었고,
뇌물로 조나라 대신 곽개를 매수해 조나라 왕에게 총사령관의 지위를 조괄에게 넘기라고 청하라 하였다.
조괄은 조나라의 명장 조사의 아들이고, 총명하여 병법에 밝았으나,
이론에만 밝았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 마저도 이놈에게 군권을 맡기지 마라, 유언할 정도였다.
2년동안의 지구전으로 인내심이 바닥난 조나라의 효성왕은
총대장을 염파에서 조괄로 교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진나라에서도 왕흘 대신 백기를 총사령관에 앉힌다.
이후의 결과는..
기원전 260년, 총대장 조괄이 죽음으로써
장평대전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
하지만 조나라 군대의 수는 제법 건재했으며
백기는 그 군대를 포위한 채 보급을 끊어버려 말려 죽이기로 결정한다.
조나라 포로들을 곱게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로로 잡아 먹여살릴 만큼 진의 생산력이 좋지도 않다고 판단하여 40만명을 생매장시켰다.
실제로 장평대전은 전국시대 인구를 감안하면
허구적으로 많은 숫자가 죽었다고 평가 되었으나
2008년 중국에서 장평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굴한 결과,
실제로 40여만에 달하는 인골이 발견되었고
이 결과로 사서의 기록이 정확한 기록이었음이 밝혀졌다.
이후 조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는데
염파는 늙은 몸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장평 전투 이후 조의 쇠퇴를 지켜본 연나라 왕인 희는 그 틈을 노려 조군을 침공하지만,
염파는 지금의 하북 성 백향현 북부에서 연군을 크게 쳐부수고,
연군을 추격해 연의 도읍이었던 계(薊)를 포위한 채 연으로부터 다섯 성을 할양받고 화친을 맺었다.
진에서도 염파가 있는 조에는 더 손을 뻗지 못하는 가운데 조의 효성왕은
염파의 오랜 공적을 기려 위문(尉文)이라는 읍의 땅을 내리고 신평군에 봉했으며,
기원전 251년에 평원군이 사망하면서 공석이던 상국 대행에 임명되었다.
기원전 245년, 염파는 위를 쳐서 번양의 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그 직후 조에서는 효성왕이 죽고 도양왕이 즉위하였는데,
태자 시절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염파를 장군직에서 파면 시켰다.
이에 한을 품은 염파는 후임 장군이 된 악승을 공격했고,
이 일로 더 이상 조에 머무르지 못한 채
위나라로 망명하게 된다.
염파는 위에서도 별다른 신임을 얻지 못하고
대군을 통솔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염파가 사라진 조나라는
진의 왕으로 등극한 정에게 좋은 표적이 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꼈는지
조에서는 염파에게 사자를 보내 귀국을 허락했고,
염파는 80이 넘는 고령의 몸으로도 한 끼에 밥 한 말, 고기 열 근을 먹었으며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는 건강한 모습을 보이며
자신이 아직 쓸모 있음을 사자에게 보이고
귀국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염파가 조에 있을 때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간신 곽개의 모략에 넘어간 사자는
조왕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염파 장군은 비록 연로했으나 식사도 많이 하고 근력도 좋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앉아 있는 동안 한 식경 동안에 화장실을 세 번이나 다녀왔습니다."
사신을 만나는 도중에 세 번이나 오줌을 쌌는데 그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라고 고하였고,
결국 효성왕은 염파를 너무 나이가 들어 쓸 수 없겠다고 생각해 포기해버렸다.
염파는 훗날 다시 초나라로 망명했지만,
장군으로 임명되지도 공을 세우지도 못한 채 세월만 흘러보냈다.
그리고 염파가 말한 마지막 한마디,
"나는 그저 조나라 군사들을 지휘하고 싶을 뿐이다."
이후 수춘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