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
시노자키아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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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01 23:32
동래성이 이름에서 어느정도 유추하실수 있겠지만
부산에 있는 내성입니다. 부산성이 포구 인접지역이었다면
내륙 진출로에 있는성인데, 의외로 이 동래성전투를 모르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사실 승전이 아니고 패전인데 그것도 일반 양민까지 결사항전하다가 모두 참수당해 죽었습니다. 가슴아픈일인데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해봅니다.
아래내용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제승방략에 규정된 대로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도착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 사실상 도망간 것. 양산 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공성전시 외곽에 별도의 병력을 배치해 구원군을 차단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밀려 후퇴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즉, 지나갈 테니 길 좀 열어달라는 소리.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즉,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소리.
이에 양군 사이에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으며, 초반에는 일본군이 패하고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공격했고 결국 조선군이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관복으로 갈아입고 북향 사배(임금을 향해 절)를 올린 뒤,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했다.(관복을 입은 채로 항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그 뒤 조선군 병사들은 전부 전사했으며 동래성 주민들도 저항하다가 무참히 학살돼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에 수안역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 찬성에 추증되었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이후 탄금대 전투에서 말아먹긴 하지만 조선군이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모아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이다.
부산에 있는 내성입니다. 부산성이 포구 인접지역이었다면
내륙 진출로에 있는성인데, 의외로 이 동래성전투를 모르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사실 승전이 아니고 패전인데 그것도 일반 양민까지 결사항전하다가 모두 참수당해 죽었습니다. 가슴아픈일인데 잊혀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해봅니다.
아래내용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4월 14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은 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함락시키고 하루만에 동래성에 도달했다. 제승방략에 규정된 대로 양산 군수 조영규와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도착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좌수사 박홍이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병력이 열세였던 탓에 딱히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심지어 이각은 동래성을 구한답시고 산에 진을 치겠다며 빠져 버렸다. 사실상 도망간 것. 양산 군수 조영규도 동래성을 구원하러 왔지만 공성전시 외곽에 별도의 병력을 배치해 구원군을 차단하는 일본군의 전술에 밀려 후퇴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동래성에 도착하자 전투를 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적어서 송상현에게 보여주었다.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기 싫으면 길을 비켜달라.
즉, 지나갈 테니 길 좀 열어달라는 소리.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戰死易假道難 (전사이 가도난)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
즉, 길을 빌려주느니 싸우다 죽겠다는 소리.
이에 양군 사이에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으며, 초반에는 일본군이 패하고 후퇴했으나 곧 전열을 재정비해 다시 공격했고 결국 조선군이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게 되자 부채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뒤 관복으로 갈아입고 북향 사배(임금을 향해 절)를 올린 뒤, 항전을 이어가다 전사했다.(관복을 입은 채로 항전)
고니시 유키나가는 송상현이 비록 적장이긴 하나 그의 용기에 감탄했고, 전투가 끝난 후 정중한 예를 갖추어 송상현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추모비를 세웠으며, 부하들에게 그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했다.
그 뒤 조선군 병사들은 전부 전사했으며 동래성 주민들도 저항하다가 무참히 학살돼 해자에 파묻혔고, 이는 2005년에 수안역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다. 사후에 이조 판서, 찬성에 추증되었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이후 탄금대 전투에서 말아먹긴 하지만 조선군이 그 정도 규모의 병력을 모아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시간을 벌어준 덕이다.
다음글 : 수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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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때 고려장군이 된 이용상이란분인듯
실제 베트남왕자출신이고 화산이씨의 시조랍니다
세부내용은 나무위키에서 가져왔습니다
안남국(베트남의 별명)의 왕자가 표류했다는 것을 보고 받은 조정에서는 크게 환영하며, 이용상이 고려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고종은 이용상의 처지를 가련히 여기고 극진히 대우했다. 고종은 이용상이 "망국의 왕자를 이리도 과하게 대우하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라고 고마워하자, "망국이라는 건 어느 나라도 피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 망국의 왕이 될지 누구도 모르는 일 아닌가?"라 대답했다고. 그리고 이용상에게 식읍을 하사하고 화산군(花山君)으로 봉했다.
1253년, 이용상은 몽골 침략 당시 화산에서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워 화산군(花山君)의 작위를 받았다.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아 살아가는 데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늘상 저 멀리 있는 조국을 그리워해서인지 조국 방향으로 해마다 제사를 지내 망향의 아픔을 달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와 후손들의 흔적이 여전히 북녘 옹진군에 남아 있다. 왕자가 고향을 보며 그리워하던 망국단(望國壇)과 적과 싸우기 위해 화산에 쌓은 성인 화산성, 조정이 이용상에게 수여한 수항문(受降門)과 그의 망명 및 귀화 사실을 기록한 수항문기적비가 있다. 다만 수항문기적비는 1903년에 세워진 것으로 수백년은 지나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후손들은 그를 시조를 삼아 본관은 화산으로 삼았다. 그의 맏아들 이간(李幹)은 삼중대광, 도첨의 좌정승과 예문관 대제학을 역임했고, 둘째 아들 이일청(李一淸)은 안동부사를 지내고 안동 내성면 토곡리에 정착했다.
현재 화산 이씨는 옹진을 포함한 황해도 남부에 밀집되어 있고, 경상북도 안동시와 경상남도 밀양시, 진주시에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혹시라도 주변에 화산 이씨 친구가 있다면 30대손 이후의 친구일 것이다. 화산 이씨는 리 왕조를 건국한 이공온을 1대조로, 중시조를 이용상으로 본다.
조선의 정예병력과 전투가용가능한 전 병력이 소집된 셈
그 정예병력을 말아먹고 회복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점을 감안하면 신립은 오지게 욕먹어도 할말 없어야됨
순변사 이일이 적들이 평지에서 잘싸운다는점을 상주전투에서 목격하고 생존했기 때문에 천연요새나 다름없는 문경새재에서 싸우자고 그렇게 요구했으나
북방 오랑캐만 상대해봤고 전공이 높았던 신립은 그걸 개무시 해버림
전투진 자체도 기마전술로 적들을 상대했으나
일본군은 영지전투자체가 아애 그런거에 특성화 되있다보니 조선군은 개박살나버림
결국 신립이 잔여병력을 데리고 선택한곳이 탄금대였는데
그 마저도 병X같았던게 말그대로 퇴로가 없는곳임
배수진을 치자는 생각이었던건지, 아니면 급히 도망치다보니 그런건지는 몰라도
그 남은 병력은 물론이고 본인도 전사해버림
그냥 퇴각했더라면 그 몇 안남은 정예병력이라도 보존할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도 듬
탄금대전투는 그많은 병력을 갖고도 벌판에서 싸운게 제일큰 패착
첨부짤 보면 이해가 갈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