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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에 대한 일본 측의 기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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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국내에서 명량해전을 다룰 때 일본측 보고서는 언급이 되는 경우가 매우 드뭄. 현재 명량해전에 대한 일본측 보고서는 총 2개가 남아있음. 



1. 모리고동문서(毛利高棟文書)


九月十八日付船手衆注進状 (毛利高棟文書 中)  

9월18일 수군 주진장 


謹而奉致言上候、先書如申上候、於全州各致相談候て、全羅之川口江罷出候事 

삼가 받들어 말씀 위로 올립니다. 앞의 서신에서 올린 바와 같이 전라도의 해협에서 적을 내쫓은 일에 대해서 전주에서 협의하였음. 


一.風自分ニ御座候付而、此度者大船共ハ彼川口ニ残し置、小関舟斗にて去十日ニ打立、赤国浦〻嶋〻過半発向仕候事

. 바람이 심해서 이 대선들은 모두 강구(아마도 섬진강 하구?)에 남겨두고 작은 관선(세키부네)들로 10일에 출발했음.  


一.たいたんむろのむかひ水営と申城の瀬戸口ニ番舟・大船拾四艘、其外小舟数百艘かゝり居申候条、即十六日押懸申候而、卯刻より申刻迄相戦申候事 

타이탄무로(진도)의 건너편 수영과 신성 해협의 입구에 조선수군 대선14척 그 외 작은 배 수백 척이 정박해 있어 즉시 16일 쳐들어가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싸움을 했음.  


작은 배 수백척은 아마도 초탐선(23척)과 피난민들의 작은 어선을 모두 군선으로 착각한 듯.  



一.毛利民部太輔のり舟壱艘、幷藤堂佐渡守家中の舟壱艘、番舟の大船へ相付申候、然処ニ民部太輔則切乗、やゝ久相戦申、自身貳ケ所手負、其上海上ヘ被打落候、右之仕合誠無比類手からにて御座候、則民部太輔事者、藤堂佐渡右之付申候舟へ乗移、異儀無御座候、幷民部太輔のり舟も無異儀引取申候事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의 배 한척과 등당좌도수(藤堂佐渡守 - 도도 다카토라) 가문의 배 한 척이 함께 조선 수군의 큰 배에 서로 붙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모리 다카마사(毛利高政)는 올라 타 넘어 서로 전투하다 자신은 두 곳에 부상을 입고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비교할 수 없을 위대한 일이었습니다. 즉시 모리 다카마사는 등당좌도의 배로 옮겨 타 무사했습니다. 모리 다카마사의 배도 무사했음. 


모리 다카마사는 군감독관으로 명량해전에 참전, 전투 막바지 일본군 후방까지 위협한 조선 수군의 공격으로 물에 빠진 것인지 아니면 안위의 배를 공격하려다가 빠진 것인지 불명. 감독관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울 뻔 했다면서 아부하는 내용. 이때 도도 다카요시(藤堂高吉) / 다카토라의 양자)가 모리 다카마사를 구조.  



一.申刻迄相戦、則見合を以悉可討果与存候刻、大風吹出、番船依為案内者、遠嶋帆に任逃退申候、則六七里斗追懸雖申候、暮に及、其上嶋〻無案内ニ付而、番舟の小舟共数艘やきわり申候事 

오후 4시까지 싸웠고 드디어 적을 실로 토벌하려는 순간 큰 바람이 불고 조선 배가 지형을 잘 아는 것에 의지해 먼 섬으로 돛을 올리고 도망가 즉시 6, 7리를 추격했는데 날이 저물고 그 섬과 섬을 잘 몰라서 조선 수군의 작은 배 수척을 부수고 들어온 일.  


여기서부터는 패전을 승전으로 포장하는 내용. 의미없음.  



一.右戦候翌日、彼番舟の有所早舟を以方〻浦〻雖相尋申候、近辺ニ相見不申候、尚従是先手羅州の川口へおし廻し、近郡発向仕、追〻可致言上候、此等之趣、宜預御披露候、恐〻謹言.

. 이 전투 다음날 저 조선 배의 소재를 빠른 배로 포구마다 찾았으나 근처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우선 나주의 강구(영산강 하구)에 배를 돌려 가까운 군을 향했습니다. 이에 대해 추후에 보고 하겠습니다. 이런 사항을 알려주실 일을 삼가 말씀드립니다. 


九月一八日 


藤堂佐渡守 (토도 사도노카미 - 토도 다카토라 藤堂高虎) 

脇坂中務少輔 (하시바 나카츠카사노쇼 - 와키자카 야스하루 脇坂安治) 

菅平右衛門 (칸 헤이에몬 - 칸 미치나가 管達長) 

藤堂宮内少輔 (토도 미야우치쇼부 - 토도 다카요시 藤堂高吉 / 토도 다카토라 양자) 

加藤左馬助 (카토 사마노스케 - 카토 요시아키라 加藤嘉明) 

増田右衛門尉殿 (마시타 우에몬노쇼죠 - 마시타 나가모리 増田長盛) / 봉행 

石田治部少輔殿 (이시다 지부노쇼 - 이시다 미츠나리 石田三成) / 봉행 

長束太蔵太輔殿 (나가츠카 오쿠라다이후 - 나가츠카 마사이에 長束正家) / 봉행 



2. 고산공실록(高山公実録) 묵기(默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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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 다카토라>
 

고산공실록은 도도 다카토라의 문서를 모아 만든 전기인데 여기에는 명량해전에 관한 보고서도 첨부되어 있음.


御歸陣被成候 ​

ちとまへかとにこもかいへ御こしなされ候 

処にすいえんと申所にはん舟の大しやう分十三そうい申候 

大川のせよりはやきしはのさし引御さ候 所の內にちとしほのやハらき申候 

所に十三そうのふねい申候 ​

それを見付是ともとり可よし舟手と御相にてはいまのせとをこきくたし候 

儀はなるましきとていつれもせきふねを御かゝり被成 ​

さき手のふねともハ敵船にあひ手負あまたいてき申候 

中にも來島出雲守殿うちしににて御座候 

其外ふね手の衆めしつれられ候 ​

からうのもの共もくわはん手負討死仕候 

処に毛利民部大夫殿せき舟にて、はんふねへ御かゝり成候。 ​

はん船へ十文字のかまを御かけ候処に、 ​

はん船より弓鉄砲はけしくうち申候に付、 ​

船をはなれ海へ御はいりなされ、あやうく候 

処に、藤堂孫八郎、藤堂勘解由両人船をよせ、敵船をおいのけ、たすけ申候。 ​

朝の五しふんより酉の刻まて御合戰にて御座候 ​

みなとのやうすはん船能存候に付風を能見すまし ​

其せと口をめけほをひきかけはしらせ申について是非なくおつかけ申儀もまかいならす 

いつみ樣も手を二か所おはせられ候 


그 조금 전에 제포(薺浦-경상우수영)에 가셨습니다. 

'수영(해남에 위치했던 전라 우수영을 말하는 듯)'이라는 곳에 조선 대장선 13척이 있었습니다. 

큰 강의 여울목에서 바닷물의 간만이 빠른 해역인데, 약간 바닷물의 흐름이 약해진 구역에 13척의 배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꼭 쳐부숴야겠다고 수군(舟手)들과 상의하여 싸우게 된 것입니다. 

큰 배로는 지금의 좁은 해역을 배를 저어나갈 수 없으므로, 모두 세키부네(關船)를 마련한 후에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싸움을 시작한 수군들은 적선을 만나, 많은 사람들이 부상당했습니다. 

그 중에서 '쿠루시마 이즈모노카미 (来嶋出雲守 - 쿠루시마 미치후사 來島出雲)'님은 전사하셨습니다. 그 밖에 수군들이 잡혀갔습니다. 

가로(家老)의 과반수는 부상당하거나 전사하였으며, 

그곳에서 '모리민부타이후 (毛利民部大輔 - 모리 타카마사 毛利高政)님이 세키부네를 타고 적선을 공격했습니다. 적선으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십자 모양의 낫을 걸었습니다만, 

적선으로부터 화살과 철포를 격렬하게 퍼부었으므로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에 빠져 위험하게 처했는데, 

도도 마고하치로(藤堂孫八郎)'와 '토도 다카요시(藤堂勘解由)' 두 사람의 배가 다가와서 적선들을 밀어제친 후 구해드렸습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싸웠습니다. 

항구의 모습이나 적선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으므로, 바람의 방향도 잘 판단하여서 그 좁은 해역을 벗어나 돛을 끌어 당겨 달렸습니다. 그 때문에 적도 어쩔 수 없이 추격할 수 없었습니다. 

이츠미 님(和泉樣 - 도도 다카토라 藤堂高虎)도 팔 두 곳을 부상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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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전투 보고서는 감독관인 모리 타카마사가 작성해야 될 내용이었지만 상술했다시피 그는 전투 중 당한 부상으로 인해 보고서 작성이 불가능했음. 따라서 다음 책임자인 도도 다카토라가 작성해야 했지만 그 또한 명량해전에서 화살 2발을 맞는 등 부상을 당해, 아마도 토도 다카토라의 가신(토도를 이츠미님이라 칭한 것만 봐도...)이 작성한 것으로 보임. 


2. 모리고동문서와 전투 시간이 차이가 남.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정확한 시간이 언급되어있지 않음. 아마도 모리고동문서는 어란진에서 출발한 시간부터 서술한 듯. 전투의 종료는 큰 의미없음. 


3. 모리고동문서와 동일하게 '모리 타카마사'가 전투 중 부상, 구조한 상황이 서술. 


4. 모리고동문서에서는 언급이 안 된 쿠루시마 미치후사의 죽음이 언급되어 있음.


5. 전투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은 <"고산공실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임. 무엇보다도 <난중일기>의 내용과 상당 부분 교차검증이 되서 아이러니하게도 <난중일기>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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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이 전선 13척으로 일본군과 대적했다는 사실이 이들 보고서를 통해서도 교차검증이 됨.



출처: https://blog.naver.com/leean2001/221385303420

2 Comments
일요일오후 2021.07.03 00:32  
정말정말 픽션같은데 현실이었다는게 놀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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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사냥꾼 2021.07.03 17:56  
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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