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청교체기] 칠대한-1 누르하치의 성장
칠대한
1. 명나라에서 조부 기오창가와 타크시를 아무 이유없이 죽인 것
2. 명나라가 건주부는 차별하고 예허부와 하다부의 편의만 보아준 것
3. 명나라가 누르하치와 맺은 영토협상을 파기하고 여진을 침공하여 인민을 살해한 것
4. 명나라가 예허부에 원병을 보내 건주여진을 막으려고 한 것
5. 예허부가 같은 여진인으로서 명나라와 내통하여 그 앞잡이가 되었으며 누르하치의 약혼녀를 강제로 몽골인과 혼인시킨 것
6.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영토인 차이허, 산차와 푸안을 강탈한 것
7. 명의 요동총독인 소백지(蕭伯芝)가 권한을 남용하여 건주여진을 비롯한 여진백성들을 마구 괴롭힌 것
“장군. 기오창가와 타크시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아군이 적병으로 오해하고 살해한 것 같습니다.”
보고하는 명나라 병사 뒤로 두 구의 낯익은 시신이 보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제 부족을 책임져야할 젊은 ‘족장’의 두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지고 있다.
“이거 미안하게 됬구만. 내 조정에 보고해 섭섭지 않게 보답하지.”
말과는 달리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장군은 젊은 족장 누르하치의 어깨를 툭 치고는 돌아선다.
영원백 이성량.
그는 명나라의 동북면의 총 책임자로 만주에서 여진과 몽골을 견제했다.
막대한 양의 뇌물로 명 조정의 중신들을 구어삶아 그의 승전보는 부풀려지고 패전은 지워졌다.
만주의 최고실력자로 떠오른 그는 명나라의 전통적인 이민족 제어방법인 ‘이이제이’를 통해 여진족들을 끊임없이 분열시켰다.
이번에도 이성량은 명에 반기를 든 여진인 왕고를 공격하였는데 이 왕고는 누르하치의 외조부. 그의 아들 아타이가
고륵채성에서 저항하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기오창가 부자가 설득하러 성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들은 설득에 실패했고 미쳐 빠져 나오기도전에 이성량의 명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이성량의 손쉬운 ‘전공’은 곧 누르하치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명에 대한 선전포고문 ‘칠대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힘을 길러야만 했던 누르하치에게 조부와 부친의 죽음은
막대한 군자금으로 되돌아왔고, 그것은 만주를 통합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583년 5월. 조부와 부친의 피로 일어난 누르하치는 파죽지세로 승천했고,
1589년 마침내 건주여진의 모든 부족을 통일한다.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을 아우르는 교역료를 확보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다.
해서여진과의 대결
*누르하치가 영토할양을 요구한 예허부에 보낸 서한
'나는 만주이며, 너는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해도, 내가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넓다 하여도, 니가 어찌 취할 수 있겠는가?'
명의 지배아래 있던 여진족은 크게 건주여진, 해서여진, 야인여진으로 구분되어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한세력은 해서여진이였는데, 해서여진은 다시 예허부, 하다부, 호이파부, 울라부 네 개의 부족으로 나뉘어졌다.
그 중 예허부가 가장 강했다. 그런데 건주여진이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되고 교역로를 확보하여 세력이 커지자
예허부를 비롯한 다른 여진부족들이 이를 크게 우려한 것이었다.
1593년 6월.
예허부의 부자이와 나림불르는 누르하치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다.
부자이는 하다부의 맹게불루, 울라부의 만타이, 호이파부의 바인다리에 몽골의 코르친 부족등 무려 9개의 부족,
3만에 가까운 병력을 구성한다. 최대의 위기를 맞은 누르하치.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운명의 한판승부를 위해 구러산으로 향한다.
구러산 전투.
험준한 지형위에 세워진 요새 자카. 이 곳에 진을 치고있는 누르차하치의 건주군을 상대로 부자이의 연합군은
도무지 숫적우세라는 이점을 살리지 못한다. 험난한 지형과 건주군의 맹렬한 저항앞에 각 부족들의 수장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고 연합군은 분열되어 갔다. 참참못한 부자이의 돌격은 4000여명의 전사자와
그 자신의 이승탈출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완벽한 대승이었다. 맹렬하게 치솟기 시작한 누르하치의 기세는 꺽일 줄 몰랐다.
이 전투의 결과로 누르하치의 영역은 더욱 넓어졌고 몽골의 코르친과 칼카부 등이 복종해왔다.
만주에서 ‘패자’의 등장은 명나라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였고, 지난 수세기동안 견제와 개입으로 ‘패자’를 굴복시켰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명나라는 두 가지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였는데, 동북면을 책임질 이성량이
1591년 장학명에 의해 해임되었던 것. 호랑이를 길들여왔던 ‘조련사’가 퇴장한 것이다.
또 한가지는 바로 임진왜란. 일본의 이 무모한 침략전쟁은 만주에 고정되어있던 명나라의 시선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멈출줄 모르는 기세와 천운까지 겹친 누르하치는 명나라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여진족 통합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여진족 통합의 길
고삐 풀린 망아지. 누르하치는 거칠 것이 없었고 해서여진의 4부족을 지속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한다.
기세에 질린 예허, 올라, 후다, 호이파부는 결국 1597년 누르하치에게 화약을 제의한다.
용납할 수 없었던 명나라의 만주에 대한 개입시도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또 다시 조선을 침공한 정유재란으로 인해 실패한다.
요동으로 물러나있던 명군이 다시금 조선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 틈바구니 속을 잘 이용한 누르하치는
1598년 몽골의 안출라쿠를 공격, 흡수하는등 지속적으로 확장해나간다.
1598년 누르하치에게 한 통의 승전보가 전해온다. 승전보의 주인공은 명나라와 조선.
7년간의 전쟁이 끝이 난 것이었다. 그것은 곧 명나라가 세계의 질서를 다시금 조정하려 한다는 것이고,
누르하치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명이 정신을 차리자 예허와 하다는 다시금 누르하치에게
적의를 보이기 시작하고 만주는 또다시 격변의 장으로 떠오르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