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시기 조선을 치는 데 앞장섰던 조선인
정명수 (鄭命壽)
( ? ~ ?)
조선 중기의 역관, 즉 통역가다.
노비 태생으로 여진어가 특기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1619년 광해군 집권시기
강홍립을 따라 후금정벌을 수행하게 된다.
그러나 정명수는 후금과의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가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여진어와 조선어가 능통한 통역가였고
조선 사정에도 능통했던 만큼
후금측에서도 쓸만하다고 여겼다.
정명수도 조선으로 귀환하지 않고 후금에 남는다.
여기까지만 했으면,
그냥 청으로 귀화한 평범한 역관으로 남았겠지만,
실제 노비 시절때 숱한 고난을 당한 것이 앙금으로 남았는지
정명수는 조선에 대한 적대적인 행동을 개시한다.
실제 그는 청나라에 살면서 청 황제에게 조선사정을 낱낱이 밀고했고
결국 병자호란때 용골대와 함께 조선 침략을 침략하면서
공을 세우게 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용골대는 인조와 대신들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고
딱 선을 지키면서 온건하게 대했다고 하며,
오히려 정명수가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정명수는 지속적으로 조선을 괴롭힌다.
조선에서 사신으로 왔을때 관리를 욕보이고
청나라 수도 심양에서 조선관리들과 함께 쌍으로 부패를 저지르고
조선왕실이 청나라에 보낸 세폐(일종의 공물)을 횡령하고
조선 조정에 친척, 가족들에게 벼슬을 요구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조선을 괴롭힌다
당연히 조선에서는 정명수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정명수를 취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선에서도
여러번 그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제거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정명수가
조선 관리들에게 무고죄를 뒤집어씌우며 역관광시키기도 하면서
조선을 끝까지 괴롭힌다.
그러나 결국 1653년 청나라 또한
그의 횡포를 더이상 눈감아줄 수 없어서인지
그는 뇌물수수, 월권등의 이유로 숙청당한다.
그 뒤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