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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항복의 진짜 원인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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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복한날이자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날이다.


일본 항복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논란이있다 

소련참전이 더큰원인이냐

미국의 원폭투하가 더 큰원인 이냐가 그 논란이다 


그리고 또 일부의 사람들은 원폭은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였고 유일한 협상카드였던 소련이 참전함으로써 

일본항복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좀 장문이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밑에 5줄정도로 짧게 결론 정리 해놨습니다. 긴글이 불편하신분들은 결론을 봐주세요!


그렇다면 일본항복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일단 일본의 항복 구조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


image.png 일본 항복의 진짜 원인을 알아보자 

당시 일본 수뇌부에서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사실상 7명 밖에 없었다 


일단 최고전쟁지도회의 6명:


총리대신 스즈키 칸타로 (鈴木貫太郎)

외무대신 토고 시게노리 (東郷 茂徳)

육군대신 아나미 코레치카 (阿南 惟幾)

해군대신 요나이 미츠마사 (米内 光政)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 美治郎)

해군군령부(참모)총장 토요다 소에무 (豊田 副武)

쇼와 천황 히로히토 


이렇게 7명이 일본의 항복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된다.


일단 일본이 1945년 7월 쯤엔 어떻게 항복하는게 문제지 항복 자체 여부는 이미 결정되었다.


근데 이때 최고전쟁지도회의 뿐만 아니라 당시 스즈키 내각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소련이 뭔가 중재를 잘 해주면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 항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임


포츠담 선언이 7월 26일에 발표되었을때도 27일에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렸는데, 이때 다들 포츠담 선언에 찬성을 한게 아니라 안건이 "아직 소련이랑 조건 항복 협상을 진행중이니 포츠담 선언을 무시하자 (=지금 당장은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나중에 소련 중재하에 유리한 해석을 확보하면 수락하자)" vs "포츠담 선언을 지금 당장 명시적으로 거부하자" 였다.


당시 7월 27일 회의 파벌이 어떻게 나눴나면:

총리대신 스즈키 - 무시

외무대신 토고 - 무시

육군대신 아나미 - 거부

해군대신 요나이 - 무시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 거부

해군참모총장 토요다 - 거부


이렇게 3:3으로 스즈키-토고-요나이의 온건파/평화파랑 아나미-우메즈-토요다의 강경파/계전파로 파벌이 나눴는데, 27일 회의에선 결국 온건파가 나머지 3명을 설득해서 당시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소련 협상 결과를 기다리기"로 일본 방침을 정했었음


참고로 이 시점에서 히로히토 본인은 명시적으로 무시/거부 쪽 하나를 택하라 의사 표시를 안했기에 일단은 중립으로 보는게 맞다


이후 시간이 지나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번째 원폭이 떨어짐


8월 7일에 트루먼이 히로시마에 원폭을 떨어뜨렸다 선언을 하면서 미국이 원폭을 가졌다는게 확실해지자, 이제서야 외무대신 토고가 "포츠담 선언을 지금 당장 받아들이자" 라는 안건을 내각 회의에서 제시 하는데, 이때는 아직 이게 공식적인 안건 사항으론 등록이 안되서 진지하게 논의 되지 않았다


즉 히로시마 원폭 직후 일본은 아직 포츠담 선언을 그냥 받아들이는 항복 결정을 못하였다.


진짜 ㅈ됨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외무대신 토고는 다음날 8일 바로 히로히토랑 알현을 해서 원폭 때문에 "본토 결전->소련이 중재자가 되어 유리한 조건 항복하기" 계획에 큰 차질이 생겼다고 열변을 토함. 이를 듣고 히로히토는 "더 이상 유리한 조건 항복 같은거에 너무 목매달지 말고, 외교를 통한 조건 항복의 가능성은 열어두되 일단 최대한 빨리 종전을 하는데 중점을 두어라" 라고 아직은 애매모호하게 중립적이지만 조금 더 온건파에 기우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이를 사유로 토고는 다음날 8월 9일 아침에 "포츠담 선언 수락"이란 안건으로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여는걸 추진함


그리고 8월 9일 새벽 4시에 소련이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 (일본 외교부 에게 선전포고 전달은 8일에 되었는데 이게 본토에 전달이 안되서 일본 수뇌부는 9일에 공개 선전포고로 이걸 알게됨)


이걸로 본토 결전->소련 중재 계획의 가능성이 0%가 되어버리자 기존 온건파 3명은 9일 회의 직전 오전 8시 40분 경 다같이 모여서, 곧 있을 회의에서 모두 최소 조건(천황 지위 보장)하 포츠담 선언의 즉각적 수락을 지지 하기로 담합함


8월 9일 오전 10시 30분 경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리는데, 안건은 포츠담 선언 수락, 대략 크게 방향이 "천황 지위만 보장된다면 포츠담 선언의 나머지 즉시 수락 (1조건안)" vs "천황 지위 보장, 일본 자체 무장해제, 일본 전범 자체 재판, 일본 영토 비점령, 이 4가지 조건을 확보 후 포츠담 선언의 나머지 수락 (4조건안)" 요 두 개로 나뉨


8월 9일 오전 11시 경 파벌은 다음과 같았음:

총리대신 스즈키 - 1조건

외무대신 토고 - 1조건

육군대신 아나미 - 4조건 (사실상 반대)

해군대신 요나이 - 1조건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 4조건 (사실상 반대)

해군참모총장 토요다 - 4조건 (사실상 반대)


이렇게 또 3:3 으로 나눠서 회의가 결론이 안남 


즉 소련의 참전 직후에도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그냥 받아들이는 항복 결정을 못함


회의가 시작한지 얼마 안 지나 오전 11시 경,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회의 도중에 보고됨


이걸 듣고 회의 참여자들은 모두 크게 동요했음. 특히 육군대신 아나미의 경우 미국이 원폭이 수백개가 있으며 이제 일본은 초토화 될것이라 하며 잠시 멘붕하는듯 하더니, 갑자기 침착해지고 "그래도 본토 결전이 가능하다" 면서 일관적이지 못한 행보를 보임


결국 나가사키로 인해 미국이 알수 없는 갯수의 원폭을 보유하고 있단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불구하고 9일 최고전쟁지도회의는 오후 1시까지 3:3으로 명확한 결론 없이 계속됨


즉 나가사키 원폭 직후에도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그냥 받아들이는 항복 결정을 못함


결국 스즈키는 최고전쟁지도회의를 종료하고 내각회의로 넘어가는데, 내각회의에서도 저녁까지 비슷한 양상이 지속됨. 1조건파랑 4조건파가 팽팽히 맞대결해서 명확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음


이때 9일 저녁, 총리대신 스즈키랑 외무대신 토고가 내각회의 도중에 나가서 히로히토한테 직접 찾아간다음 "지금 우리가 결론을 못 내리겠으니 있다가 최고전쟁지도회의를 또 열껀데, 그때까지도 결론이 안나면 여기서 폐하가 직접 결단을 내려주십쇼" 하면서 부탁을 하고, 히로히토가 이를 수락함


이를 기반으로 9일 오후 11시 30분에 히로히토 본인도 참석한 최고전쟁지도 어전회의가 또 열림


여기서도 똑같은 구도가 일단 펼쳐짐


8월 9일 오후 11시 30경 파벌:

총리대신 스즈키 - 1조건

외무대신 토고 - 1조건

육군대신 아나미 - 4조건 (사실상 반대)

해군대신 요나이 - 1조건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 4조건 (사실상 반대)

해군참모총장 토요다 - 4조건 (사실상 반대)


이렇게 똑같이 3:3으로 명확한 결론 없이 회의가 맴돌다가, 10일 오전 2시 경 스즈키가 의논을 멈추고, 히로히토한테 다가가서 "성단(聖斷)을 내려주십쇼" 요청함 


여기서 드디어 히로히토가 중립에서 명시적인 온건파로 돌아서면서, 대놓고 "나는 외무대신 토고의 1조건안에 찬성한다"라고 말함


천황이 까라면 까야겠지? 이걸 듣고 강경파도 바로 수긍하면서 1조건안에 찬성함. 이후 10일 오전 7시에 일본은 "주권 통치자로써 천황의 권한"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이해 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연합군에 통보함


8월 12월 새벽 1시에 미국이 답장을 보내는데, 여기서 미국은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항복한 그 순간부터 연합군 총사령관 권한의 대상이 될것" 이며, "일본 정부의 최종 형태는 포츠담 선언에 입각해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 수립될 것" 이라고 답함. 문제는 여기서 "관할 대상" 할 때 사용한 용어가 "subject to"인데, 이게 "대상"이라 번역이 될 수도 있고, "지배"라 번역이 될 수도 있음. 이걸 보고 일본 수뇌부는 뒤집힘


왜냐면 만약 이게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한은 항복한 그 순간 부터 연합군 총사령관 권한에 지배를 받는다"라 번역하면, 일본 정부의 최종 형태에 대한 내용과 합쳤을 때 천황 지위 보장이라는 1조건안 마저 미국이 거부했다 볼 수 있기 때문임


당연히 바로 강경파는 "이제 미국이 1조건안 마저 거부했으니, 우리의 유일한 선택지는 본토 결전이다" 하면서 다시 전쟁을 하자 돌아섬


이후 이 안건을 두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13일에 열리는데, 안건은 "미국이 1조건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봐야 하는가?" 이고, 주 쟁점은 "미국이 1조건안을 받아들였다 보고 항복 해야 한다 vs 미국이 1조건안을 거부했다 보고 항전 해야 한다" 임


여기서도 익숙한 3:3 구도가 나타남


8월 13일 회의 파벌:

총리대신 스즈키 - 항복

외무대신 토고 - 항복

육군대신 아나미 - 항전

해군대신 요나이 - 항복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 항전

해군참모총장 토요다 - 항전


즉 천황이 한번 항복을 하라 명령한 후에도 일본 수뇌부는 포츠담 선언을 그냥 받아들이는 항복 결정을 못함


14일 아침에 미군이 일본 정부의 포츠담 선언 수락 사실을 삐라로 뿌렸는데, 외무대신 토고가 오전 8시 30분경 이 삐라를 들고 다시 히로히토한테 찾아가서 "지금 당장 공개적으로 군한테 항복하라 명령 안하면 이제 군 통제권을 상실할지도 모름" 하면서 다시 명시적으로 개입할것을 요청하고, 히로히토는 이를 승낙함. 이를 기반으로 14일 오전 10시 30분에 다시 최고전쟁지도회의가 열림


여기서 다시 강경파는 각자 왜 미국의 답변을 승낙하면 안되는지 열변을 토했지만, 이번엔 바로 히로히토가 나서서 오전 11시 경 대략 "내 생각엔 미국이 1조건안 승낙한거 맞고 천황 지위 보장될거 같으니까, 내가 항복 선언 공개 방송할 준비나 하셈" 이라는 내용의 두번째 온건파적 "성단"을 내림


이걸로 결국 강경파도 다시 한번 승낙을 하면서 그때서야 일본의 항복이 확정나였다.



결론:포츠담 선언이 이루어진뒤로  항복이 이루어질때까지 온건파와 강경파의 인식을 달라진적이 한번도 없다.


히로시마, 소련 참전, 나가사키, 전부 다 최고전쟁지도회의 구성원들의 의견을 크게 바꾸는데 실패함. 히로시마 전에 포츠담 선언에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은 계속 항복이 확정 날 때까지 포츠담 선언에 우호적이었고, 포츠담 선언에 반감을 가졌던 사람들 또한 항복이 확정될 때까지 포츠담 선언에 동의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바뀐사람은 히로히토 한명뿐이다. 


즉 일본의 항복에서 무슨 원인이 더 컸냐는건 즉 히로히토가 항복으로 마음을 기우는데 무엇이 더 컸냐로 귀결될수있다.


공개 발언으로 히로히토는 본인 결정에 원폭과 소련 참전을 둘 다 언급했고

딱히 뭐가 더 중요했다 라고 말한적은 없다. 


즉 "원폭이었냐 소련이었냐" 에 대한 해답은 "사료만으로는 모른다"가 정답이다.  



일본이 맥아더 때문에 항복했다는데 사실 이것도 틀림 - 군사 마이너 갤러리 (dcinsid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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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1 일요일오후  
아쉽다 강경파 애들이 이겨서 원폭 최소 스무 방쯤 더 쳐맞았어야되는데
2 Comments
일요일오후 08.16 13:45  
아쉽다 강경파 애들이 이겨서 원폭 최소 스무 방쯤 더 쳐맞았어야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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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가이 08.18 08:51  
[@일요일오후] 그게 이 반도땅에도 떨어졌을수도 있음 그리고 소련이 고대로 밀고와서 미국은 반도에 발도 못들이고 우리는 소련 또는 중국 위성국으로 전락했을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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