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vilege]
33인이 종교인만이 아니라 교육자 부터 다양한 직업군을 가지고 있었음
근데 왜 종교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냐면 당시 시대상으로는 "지식인"으로 추앙받는 시절이라서 입니다.
당장 천주교만 해도 당시 조선엔 주교나 신부가 많이 없던 상황이라 청나라에 가서 외국인주교에게 세례받고
임명을 받고 오는 요즘으로 말하면 해외로 유학을 갔다오는 그런상황인데 하물며 영어만 쓸줄 알아도
그 인물됨을 엄청나게 높게 보던 시대였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이 올랐던 가장큰 이유가 미국에서 생홣하기도 했었고
미국과 직접협상이 가능한 지식인으로 추대받은게 제일 큽니다.
당시 지식인이라는 기준은 지금처럼 학벌을 가지고 있다기 보단
외국의 유학경험이나 외국과의 직접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당대에 보기엔 희소한 그런 인재를 기준으로 삼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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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족대표는 누가 인정하거나 선정했다기 보단 자발적으로 모여서 결성된겁니다.
손병희를 위시한 천도교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한규설, 윤용구, 박영효, 윤치호, 이완용(그...생각하시는 이완용 맞음)과도 접촉했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개신교, 불교, 가톨릭, 유교 등의 종교계 인물들과 접촉하여 민족대표를 꾸리게 되었다. 이 때 가톨릭과 유교는 각 단체의 이해관계로 참여하지 않았고, 불교계는 일본 불교의 침투로 혼란스러운 상황이라 두 명만이 참가했다. 반면 개신교는 개신교 내의 민족/독립운동을 탄압하는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대한 반감이 올라있던 상황이라 천도교의 제의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결국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으로 33인의 민족 대표단이 결성되었다. 원래는 천도교 15인, 개신교 15인으로 30인을 구성하려 했으나 개신교 종파인 감리회와 장로회가 숫자를 놓고 다투다가 각각 8명을 내세우고 16명으로 개신교 대표를 늘리는 대신, 불교 2인도 포함시키면서 현재의 33인으로 구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