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화성 중에 유일하게 실전을 경험했던 성문
위 짤에서 보다시피 보통 정조 대에 건축된 수원 화성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실전 경험이 전혀 없다는 인식이 많이 퍼져있음.
하지만 수원 화성 4대문 중 실제 전투 경험이 있었던 성문이 존재하는데 바로 수원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이었음.
6.25 전쟁 초반에 국군들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중심으로 미 지상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시간을 벌기 위해 한강을 방어선 삼아 그야말로 처절하게 지연전을 행하고 있었음.
이 과정에서 수원 화성이 위치해 있던 수원 권역 역시 한강 방어선 전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
1. 전투의 준비
1950년 7월 3일에 결국 한강 방어선이 무너져 내리자 시흥지구전투사령부는 수원으로 피신했고 본 사령부 예하의 1사단 병력들은 수원으로 남하하는 대규모의 북한군 기갑부대 및 보병대들을 하루만이라도 저지시키기 위한 강구책을 마련해야 했음.
이에 따라 북한군의 진입로를 관통하는 구역인 장안문을 중심으로 저지선을 구축하게 됨.
다행히 당시 장안문 양쪽에는 튼튼한 성벽이 길게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 전차부대의 남하를 충분히 저지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음.
이 때 당시 공병감이었던 최창식 대령(서울에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그 최창식이 맞다.)은 장안문을 폭파(!)시켜 도로를 끊어버리고 무너진 잔해를 바리케이드로 삼아 농성을 함으로써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전진하는 걸 막고자 했음.
이에 박후준 중위 등이 장안문을 폭파시키 위해 곳곳에 폭발물을 설치하기 시작하자 마침 장안문 근처를 지나고 있던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이 즉시 중단하게 한 뒤 이렇게 말했음.
"현 시점에서 이 북문을 파괴한다고 하여 전술적으로 아군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귀중한 민족의 사적만을 인멸케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니, 후일 민족의 지탄을 어찌 받을 것이냐?"
솔직히 장안문 폭파지시는 좀 뜬끔없긴 했음. 현 모습으로도 충분히 방어시설로 활용할 수 있음에도 폭파시키라는 건 그러한 장점을 죄다 씹어먹는 것에 가까웠으니.
게다가 이 당시 작전의 전략적 목표 역시 적을 물리치거나 저지하는 것이 아닌 지연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장안문의 폭파는 더욱 더 합리적이지 못했음.
결국 장안문의 성벽과 문루에 의지해서 남하하는 북한군 전차부대와 맞서기로 결정되었음.
그 대신 당시 미군이 국군에게 공수해 준 대전차 지뢰 20여발을 장안문 주변에 매설하고 수원으로 향하는 도로들도 통나무 및 M3 반궤도 장갑차 등으로 저지선을 구축하거나 파괴함으로써 북한군의 남하를 방해하는 것도 있지 않았음.
2. 장안문에서의 전투
얼마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4일 늦은 오후에 북한군의 기갑부대가 장안문 근처에서 모습을 드러냈음.
북한군은 T-34 전차를 앞세워 포탄을 발사하면서 진격해 왔고 우리 국군들은 장안문의 성벽과 문루에 의존해 북한군과 교전하기 시작했음.
당시 소련의 군사고문단장이었던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국군은 대전차포까지 동원하여 북한군에게 저항했다고 함.
비록 최종적으로는 북한군의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장안문의 문루와 성벽에서 내려와 후퇴하였지만 무려 T-34 전차 3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음. 두 대는 장안문 주변에 매설해 둔 대전차 지뢰에, 나머지 한 대는 라주바예프의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국군의 대전차포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함.
사실 근대시기의 성곽은 근대적 무기에 대해 일정 부분 방호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북한군의 전차들이 포격을 퍼부으며 전진했음에도 장안문의 성곽이 어느 정도 방호효과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임. 그러한 두터운 방호력을 가진 장안문에 의존하여 교전하던 국군 장병들 역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철군했던 것으로 생각됨.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안문은 한쪽 문루가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으며, (해당 전투 때 파괴되었는지, 아니면 1.4 후퇴 직후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전자가 유력.)
옹성 및 성벽에는 이 당시 북한군이 발사했던 수많은 포탄 및 총탄자국들이 파였으며,
성벽 역시 일부 무너지는 피해를 입었지만 그 당시 교전상황을 고려하면 그 정도라도 남아있었다는 게 오히려 놀라울 지경임.
위 사진에서 보다시피 1951년 이후 모종의 이유로 여분의 문루와 홍예까지 심하게 파괴된 장안문은 1976년에 다시 복원되었음.
결론: 수원화성 짱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