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당시 교도소 수감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안지영
15
3519
2019.01.26 10:54
당시 미군의 기록들 요약
한국전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첫째주에 대한민국 정부 최상층이 적군에게 동조할 것으로 보이는 수감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부 교도소는 '경범죄자는 석방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명령에 따라 전국의 수형자들이 분류되어 국군과 경찰로 구성된 특무대에 넘겨졌으며 처형장으로 이송되어 총살이나 생매장을 당했다.
학살당한 사람은 대부분 좌익사범들이었으며 도시별로 1000~3000명 정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황이 바뀌어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공산당지도부에서는 교도소를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만 군인, 경찰, 반동분자, 우익사범, 친제국주의자, 성직자와 같은 명목으로 수감된 정치범 2만명 중 8천명이 북한으로 이송되었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되었다.
북한으로 이송된 정치범들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기차로 이송된 7천명을 제외하고는 손이 묶인 채 도보로 끌려갔으며 도중 걸을 수 없게 된 이들은 사살되었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은 전원 도보로 끌려갔으며 9월 22일에서 26일까지 의정부 도로에서만 매일 50명 이상이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발견된 시신은 경기 의정부 도로에서 해군 장교들이 발견한 것만 200구 가량이며 실제로 이 도로에서만 1천명 이상이 걸을 수 없어 총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경기 의정부 양평의 강둑에서는 800명이 총살되고 시신이 강에 버려졌으며 약 60명씩 2개조로 나뉘어 생매장 당한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한국전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첫째주에 대한민국 정부 최상층이 적군에게 동조할 것으로 보이는 수감자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부 교도소는 '경범죄자는 석방하라'는 법원의 명령을 받았다고 한다. 명령에 따라 전국의 수형자들이 분류되어 국군과 경찰로 구성된 특무대에 넘겨졌으며 처형장으로 이송되어 총살이나 생매장을 당했다.
학살당한 사람은 대부분 좌익사범들이었으며 도시별로 1000~3000명 정도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황이 바뀌어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자 공산당지도부에서는 교도소를 정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서울에서만 군인, 경찰, 반동분자, 우익사범, 친제국주의자, 성직자와 같은 명목으로 수감된 정치범 2만명 중 8천명이 북한으로 이송되었고 나머지는 행방불명 되었다.
북한으로 이송된 정치범들도 서대문 형무소에서 기차로 이송된 7천명을 제외하고는 손이 묶인 채 도보로 끌려갔으며 도중 걸을 수 없게 된 이들은 사살되었다.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들은 전원 도보로 끌려갔으며 9월 22일에서 26일까지 의정부 도로에서만 매일 50명 이상이 총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발견된 시신은 경기 의정부 도로에서 해군 장교들이 발견한 것만 200구 가량이며 실제로 이 도로에서만 1천명 이상이 걸을 수 없어 총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경기 의정부 양평의 강둑에서는 800명이 총살되고 시신이 강에 버려졌으며 약 60명씩 2개조로 나뉘어 생매장 당한 무덤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는 어린 아이들의 시체도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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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 ㅅ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