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비 : 비극의 화가와 가수

프롤로그: 잊혀진 캔버스와 미술사의 여정

1977년, 부산의 한 항구 근처. 낡은 창고의 문이 삐걱이며 열리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수현은 40대 중반의 미술사학자로,

오래된 예술품을 복원하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발굴하는 일을 업으로 삼아왔다.

그는 부산의 한 폐업한 무역 회사 창고에서

발견되었다는 물건들을 조사하러 이곳에 왔다.

창고 안은 어두웠고,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녹슨 철제 상자들이 널려 있었다.

수현은 손에 든 손전등을 비추며 창고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다 그의 눈에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들어왔다.

상자는 물때로 얼룩져 있었고, 뚜껑은 반쯤 열려 있었다.

수현은 조심스럽게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물에 젖어 빛바랜 캔버스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캔버스를 꺼내 들자,희미하게 그려진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바이올린을 들고 있었고, 눈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다.

캔버스 가장자리에는 흐릿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나의 비 였다. 나는 그녀의 화폭이었다.”

수현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캔버스를 내려놓고 상자 안을 더 뒤졌다.

그러자 낡은 악보 한 장이 눈에 띄었다. 악보의 제목은 ‘바다 위의 비’.

악보는 물에 젖어 종이가 너덜너덜했지만, 음표들은 여전히 선명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연필로 휘갈겨 쓴 글씨가 있었다.

“1927년 9월 3일, 현해탄에서. 도윤과 유라의 마지막.”

수현은 이 캔버스와 악보가 50년 전의 비극을 담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상자 안에서 또 하나의 물건을 발견했다. 그것은 오래된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의 표지에는 ‘백건우’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수현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들을 죽였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나를 영원히 저주했다.”

수현은 일기장을 손에 들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대 속에서 예술로 사랑을 지키려 했던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을 파멸로 이끈 한 남자의 이야기를 파헤쳐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캔버스와 악보,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챙겨 창고를 나왔다.

창고 밖에서는 바닷바람이 불어왔고, 멀리 현해탄이 보였다.

수현은 바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도윤과 유라… 당신들의 이야기가 무엇인지, 내가 꼭 밝혀줄게요.”

그는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도윤과 유라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그리고 백건우라는 남자가 그들의 비극에 어떻게 얽혔는지

알아내기 위해 그는 1920년대 경성의 기록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수현은 도윤이 화가였고, 유라가 바이올리니스트였다는 단서를 찾았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 곳이 ‘달빛 카페’라는 장소라는 것도 알아냈다.

수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1927년, 경성의 어두운 골목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