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판도가 뒤바뀔 뻔한 문경전투
한국전쟁당시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특수부대를 조직하게 된다.
정확한 조직명은 'Special Activities Group:특수공격부대'
이들은 안동,영주,충주로 보내졌다.
대부대가 움직이기전 수색부대가 수색을 나선다.
수색에서 가장 중요한 지리파악,현지인과 정보공유등의 이점으로
군단 최전방에 한국부대를 내세웠고 그로인해 수색부대들이 생겨난다.
기초적이고 전문적인 군사훈련은 일본에 있는 미군비밀캠프였다.
이곳에서 무기 다루는법부터 공수훈련까지 강도높은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신불산에서 빨치산과 첫교전을 펼쳤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중대장마저 교전중 전사하였고 그로인한 피해는 컸다.
첫전투에서 성과를 내지못한 이들은 곧바로 문경으로 보내지게 된다.
문경은 서울과 영남을 이어주는 관문이다.
이곳이 뚫리면 대구와 부산도 무사할수없기에 이곳의
방어를 위해 여러부대가 모였다.
당시 문경은 한국전쟁전부터 빨치산과의 크고작은 교전이 끊이질않고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민병대까지 조직해 빨치산 소탕에 힘을 쏟던중이였다.
전쟁당시 8만명에 이른 남쪽포로중 4만8천명이 빨치산이였다.
마을사람들은 성벽과 함께 호도 구축해두었고, 각 부대들 또한 진지구축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불과 300~400m 떨어진곳에 이미 인민군들이 잠복해있었다.
규모는 약 3000명 가량이였는데 이 대부대 정체는 무엇이였을까?
그럼 과연 이곳까지 어떻게 오게된것일까?
그들의 임무는?
북한의 2군단이 그곳에 남은 이유는 치밀한 계획이였다.
김일성은 2군단에게 게릴라식 전투로 전진하던 국군의 세력을 흔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미리 잠복해있던 북한의 대규모 부대는
우리 국군의 모든 이동경로 및 규모와 진지파악이 끝난상태.
그리고 얼마뒤..
북한군은 선제공격을 해왔고 그렇게 3000명과 300명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후속부대는 커녕 후퇴도 쉽지않아 맞서싸우는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사실 전투라고 하기보단 살기위해, 지키기위해 이 악물고 버텼다라는게 가깝다.
하지만 떨어지는 탄약과 애시당초 3000명과 300명의 싸움.
그것도 기습을 당한 우리 국군은 사실 최후의 선택까지 염두해둔 상황이였다.
그러던찰나 우여곡절끝에 대구와 무전이 닿았고,
공군의 합류로 북한군은 문경을 포기하고 안동으로 퇴각했다.
하지만 미 10군단과 미 해병사단에 포위됐다.
기적같은 승리였다.
1200명을 사살하고 80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문경전투는 비록 2~3일간에 짧은 전투였지만,
한국전쟁의 판도가 뒤바뀔만한 의미있고 중요한 전투였다.
비록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모든 국군장병분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