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흙활자를 처음 발명한 것은 송(宋)나라의 필승(畢昇)으로 11세기였다. 그러나 이활자는 잘 부서지고 먹을 빨아들이는 성질 때문에 널리 쓰이지 못하고 없어지고 말았다. 1313년경에는 주석으로 활자를 만들고 옆쪽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꿰어서 책을 찍는일이 있었다고 왕정(王幀)이 기록하였는데, 이로 미루어 고려의 금속활자 부어 만들기가원(元)나라로 전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 주석활자 인쇄도 별로이어지지 않았다. 세종은 명(明)나라에서의 활자인쇄를 조사시켰으나, 없었던 것으로보고되어 있다. 그 뒤에 명의 홍치(弘治) ·정덕(正德) 연간인 1488∼1521년에활자인쇄가 이루어진 것이 있으나, 그 뒤로 다시 끊어졌다.
중국에서의 인쇄는 글자의아름다움이 훨씬 잘 보존되고, 책마다 많은 부수가 필요하였므로 몇 번이고 다시 찍어낼수 있는 목판을 더 좋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1773년대에 한국 사람의 후손인김간(金簡)이 청나라 무영전(武英殿))의 편집책임자가 되자, 목활자로 《사고전서(四庫全書)》를 찍어내고, 이 판을 취진판(聚珍版)이라고 부르기까지하였다. 유럽의 금속활자는 고려 ·중국 ·아라비아의 길을 거쳐 들어간 방법에 따라서당시 아비뇽 ·부르게스(Burges) ·볼로냐(Bologna) 등지에서 연구가진행되어, 작은 수의 로마 표음문자(알파벳)를 대상으로 구리쇠에 글자마다 거푸집을새겨서 만드는 방법을 창안하였다. 그와 더불어 합금술의 연구로 납에 주석을 섞은활자쇠를 만들어냈다. 1452∼56년 사이에 구텐베르크가 찍어낸 42줄의 성서는 그인쇄술이 짧은 시간에 꼭같은 책을 많이 찍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서구사회에서는획기적인 일이었고, 싼 값으로 일반인에게 지식을 전파하는 속도를 가속화하였다.
이당시 유럽에는 시민사회가 이룩되어 있었으므로 더욱 시기를 잘 맞추었을 뿐만 아니라, 기업화를 통하여 상업성이 있었던 점이 한국에서의 금속활자 발명 및 인쇄술 발달과다른 점이었다. 나아가서 한글을 풀어 쓰는 한글활자 인쇄술로 우리 금속활자가쓰여졌다면 놀랄 만한 발전을 이루었을 것이고 지식의 전파도 앞섰을 가능성이많았겠으나, 활자인쇄가 중국의 고전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활자를 일찍발명했으면서도 일반대중의 이용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야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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