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한국군이 노빠꾸였던 시절.jpg
불량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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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1 11:32
왜 저랬는지 궁금할텐데 저 때 북한에서 울진, 삼척에 120명에 달하는 무장공비를 남파시킴. 우리나라 군경은 이들을 잡는 과정에서 군경 38명, 민간인 23명이 전사함
특히, 우리나라 국민들 머리속에 각인된 큰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승복 어린이가 무장공비에 의해서 피살된 사건임.
1968년 말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과 함께 북한 간첩에 의해 살해되었다. 살해된 사실까지는 대법원에서도 사실관계가 규명되어 최종 인정된 내용이다.
1.21 사태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던 1968 10월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12월 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의 초가집에 침입했다. 후술할 조선일보 기사 링크에 따르면 가족들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 했는데, 느닷없이 무장간첩들이 쳐들어와 어머니 주대하의 이마에 기관단총을 들이대며 밥을 지어달라고 협박했다. 이에 주씨는 "쌀이 없다"고 하자 이들이 "강냉이(옥수수)나 삶으라우"라고 하여 간첩 2명의 감시 하에 옥수수를 삶아서 줘야 했고, 이승복 등 3남매는 간첩 3명에게 둘러싸여 감금됐다.
당시 정부는 주민들을 공비의 만행으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독가촌이라는 집을 지어서 이주시켰는데, 이승복의 집은 다음날 이사할 차례였다고 한다.
무장간첩들은 삶은 옥수수를 먹고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채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며 북한 체제선전을 하자, 그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간첩 중 1명이 이승복을 끌고 온 뒤 나머지 가족들도 같이 끌고 갔다.
이들은 먼저 모친 주씨의 머리를 벽돌만한 돌덩이로 쳐서 죽였고, 뒤이어 이승복 본인도 공비들의 양 손가락에 입을 찢기고 돌까지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동생 승수와 승자도 같이 살해되어 퇴비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1.21 사태 청와대 습격사건이 있던 1968 10월 3차에 걸쳐 울진/삼척지구 해상으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 중 잔당 5명이 추격을 피해 북으로 도주하다 12월 9일 밤 11시, 강원도 평창군 노동리 계방산 중턱 이승복의 초가집에 침입했다. 후술할 조선일보 기사 링크에 따르면 가족들은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려 했는데, 느닷없이 무장간첩들이 쳐들어와 어머니 주대하의 이마에 기관단총을 들이대며 밥을 지어달라고 협박했다. 이에 주씨는 "쌀이 없다"고 하자 이들이 "강냉이(옥수수)나 삶으라우"라고 하여 간첩 2명의 감시 하에 옥수수를 삶아서 줘야 했고, 이승복 등 3남매는 간첩 3명에게 둘러싸여 감금됐다.
당시 정부는 주민들을 공비의 만행으로부터 피신시키기 위해 독가촌이라는 집을 지어서 이주시켰는데, 이승복의 집은 다음날 이사할 차례였다고 한다.
무장간첩들은 삶은 옥수수를 먹고 가족 5명을 안방에 몰아넣은 채 "남조선(남한)이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좋으냐"고 질문하며 북한 체제선전을 하자, 그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고, 격분한 간첩 중 1명이 이승복을 끌고 온 뒤 나머지 가족들도 같이 끌고 갔다.
이들은 먼저 모친 주씨의 머리를 벽돌만한 돌덩이로 쳐서 죽였고, 뒤이어 이승복 본인도 공비들의 양 손가락에 입을 찢기고 돌까지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동생 승수와 승자도 같이 살해되어 퇴비더미에 묻히고 말았다.
3줄요약:
무장공비가 군경, 민간인 살해함
공산당 싫다고한 어린이 무참히 살해함
국군이 개빡칠만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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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Comment
당시에는 야만적인게 절대 아님
잘 생각해봐
저 당시 현역군인들은 장교 부사관 병사 모두 6.25 참전했거나 어린시절에 참상을 지켜본 사람들임
시체에 손발이 달려있는것 조차 존나 봐준거라고 보면 된다
말 그대로 멸공이던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