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로 보는 삼국지 - 제갈량의 1차 북벌
우리가 삼국지를 읽거나,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접했을 때
유관장 삼형제가 죽었을 때 책을 덮어버리던지 아니면 만화 자체가 끝이 나버리더라구.
개인적으로 진짜 삼국지의 백미는 제갈량과 사마의의 낙곡대전과 제갈량 사후 강유의 분투라고 생각하는데 말야.
최근 역사에 관한 글들에 펨창들 반응이 좋아서 이번엔 삼국지를 가져왔어.
중국사를 심도있게 알지는 못하니까, 지적할 부분이나 허구있는 부분들은 댓글로 잘 설명해줬으면 좋겠어!
당시 삼국의 상황을 살펴보자
위나라는 조조의 사후에 조비가 황제로 등극하고, 낙양으로 천도한 후에 유가를 부흥시켜서 체제를 안정시키려고 했고,
구품관인법을 채택해서 인재선발도 능하게 하고 있었지만, 조비 자신 스스로는 유가의 예를 잘 따르진 않았고
오나라를 섣불리 공격하고선 뚜드려 맞다가 즉위 7년만에 죽어버리고 말아.
오나라는 유비의 이릉 공격 및 위나라의 공세에도 막아내는 저력을 보임과 동시에
226년에 오나라에 항복하고 종속됐던 사섭이 90세의 나이로 사망해.
손권은 이 교주를 이제 자신의 손에 완전히 넣을 기회가 생긴거지.
즉시 여대를 교주자사로 임명하고 파견해버림과 동시에 사섭의 아들 사휘는 안원장군이라는 높은 직위에 봉하지만
사실상 교주의 통치권을 완전히 자기것으로 만들어.
이에 사휘는 형 사지와 연합해서 손권에 대항해 반란군을 일으키게 돼.
여대는 평소에 친분이 있었던 사씨일족 사일의 아들 사광을 보내서 목숨을 보장할테니 항복하라는 권고를 했고,
사지, 사휘와 그 동생들은 항복하였지만 여대는 사씨일족을 모두 죽여버리거나 귀양을 보내고 정리해버려.
(참고 : 사섭은 베트남 교과서에도 나오며 사왕(士王)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민족독립적 시각으로는 압제자로 폄하하기도.)
촉한은 익주의 옹개가 사섭이 죽기 전에 손권의 명으로 반란 유도를 받아서 월수 태수 초황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라 칭해버리는데,
손권은 당시 여개가 태수였던 영창태수에 옹개를 임명해버리는 촉한에 대한 엄청난 적대적 외교첩보행위를 하지.
이에 이엄이 옹개를 회유하기 위해 서한을 보냈지만, 옹개는 다음과 같은 말로 무시해버렸다고 해.
"듣기에 하늘에는 두 해가 없으며, 선비에게는 두 임금이 없다는데, 천하가 정립하여 정월이 셋이니, 먼 곳에 있는 사람으로써는 두렵고 당혹하여 어디로 돌아갈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실제 영창태수 여개에게 강한 저항을 받아 영창태수로 부임할 수는 없었고, 이듬해 주포까지 장가에서 모반을 일으켰으며
옹개일당은 익주사람 맹획을 꼬드겨 남쪽의 이민족을 설득하게 해.
맹획은 남만인들에게
"촉한이 남만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공물을 부과하려 한다." 라는 사기를 쳐서 같은 편으로 들어오게 해.
아무튼 제갈량은 이들을 가만두지않았고, 등지를 오나라에 파견해서 화친을 맺고 옹개를 외교적으로 고립시켜버려.
손권이 사실상 옹개의 모반을 조종했지만 바로 버려버린거지.
제갈량은 마충을 장가로 파견해 주포를 토벌하게 했고 자신은 이회와 함께 옹개의 모반을 진압하기 위해 출정하고 나서
옹개,주포의 무리들이 모이기만을 기다린 제갈량은 밖에서부터 하나하나 모반의 무리들을 처단하며 토벌해.
와 배경만 쓰는데 엄청 오래걸렸네.
아무튼 삼국은 정립 후 이런 사건사고들을 해결하며 내실을 다지면서 국력을 비축하고 있었어.
그리고 대망의 228년 제갈량은 출사표를 유선에게 던져.
촉한의 처음이자 마지막 제일 중요한 기회였던 1차북벌에 대해서 드디어 알아보자!
제갈량은 북벌 시작 당시에 기산을 통해 농서를 정복하여 후방의 안정과 군량비축을 도모하고 장안을 공격하려는 안정적인
정공루트를 짰어.
여기서 위연이 자신에게 군대를 주면 자오곡을 지나 장안을 바로 치겠다는 말을 했지만 거절당했지.
제갈량은 한중토벌전 당시 장비와 마초가 무도를 치는 위장, 유비의 본대가 직접 한중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처럼
"조운을 기곡으로 파견해서 야곡도를 따라 장안을 공격할 것이다"라는 소문을 일부러 일파만파 퍼뜨려.
위나라 대장군(大將軍)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조진이 이 소문을 듣고 화들짝 놀래서 농서의 주력군을 모두 야곡로로 파견하게 돼.
한편 제갈량은 기산 쪽으로 크게 우회하면서 천수 방면으로 진출해, (지도의 천수는 당시 상규현이었어.)
이때 천수군, 안정군, 남안군(지도의 천수 왼쪽 위 서량방면) 3군이 제갈량의 진군에 한꺼번에 호응하는데
이는 제갈량이 출병 전에 미리 밑작업을 해둔 결과였겠지.
아무튼 위 농서군의 주력이 조운에게 야곡에서 꽁꽁 묶여있을 때, 제갈량은 탄탄대로를 거쳐 진군했고, 군대랍시고 있는 부대는 옹주자사 곽회의 부대와 양주자사 서막의 소규모 군대 뿐이었어.
(연의에서 엄청 많이 나오는 기산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높은 산이 아니야. 넓은 평지에 그냥 살짝 솟은 언덕 같은 느낌.)
이때 이끌었던 촉한의 군대가 20만이라고 나오지만, 촉한의 국력 상 그정도 수준은 아니었을거 같고 그냥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병력이 나왔을거다 라는 추측을 해 볼수 있겠지.
숫자로만 보면 위나라가 촉나라를 압도하고도 남는 국력차이지만 지금 이 전황 자체로는 농서 일대에서 촉한이 위에 비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야.
이 전략구도에서 농서를 지원하기위해 파견되는 병력만 지연하거나 차단할 수 있다면, 그런 우위를 더욱 더 오래 유지하고
농서지방을 촉한의 손에 넣어 평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
지도에 보면 등산로를 따라(ㅋㅋ) 가정이 있어.
해발 2000미터 정도 되는 산맥이 남북으로 이어진 중간에 위치한 유일한 길목이자 요충이었어.
여기를 틀어막아버리면 구원군이 아무리 많더라도 농서를 지원해줄 방도가 나오지 않았지.
분명 이 전략은 가능성이 매우 높아보였어. 가정에 마속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제갈량의 부하들은 가정의 중요성 또한 같이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숙장인 위연이나 오의를 천거하지만
의외로 39살의 젊은 참군 마속을 파견하게 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냥 길목만 막으면 되는데 좀 괜찮은 놈 보내고 위연이나 오의같은 우수한 장수들로 신속하게 농서를 평정하자
라는 생각이었을거 같아. 제갈량처럼 치밀한 사람이 가정의 중요성을 알면서 아무나 보내지는 않았을 거야.
가정을 지키는 임무 자체가 고난이도는 아니었을거라는 얘기지.
제갈량(諸 葛亮)이 기산(祁山)으로 출병하자(228년의 일) 장합에 특진(特進)의 지위를 더하고 제군을 이끌게 해 파견했고, 제갈량의 장수인 마속(馬謖)과 가정(街亭)에서 맞붙었다. 마속은 험한 남산에 의지했고, 내려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은 그 급도(汲道-용수로)를 끊고 들이쳐 마속을 대파했다. 남안(南安), 천수(天水), 안정군(安定郡)이 모반해 제갈량에 호응했었는데, 장합이 이를 모두 깨뜨리고 평정했다. (장합전)
제갈량은 마속(馬謖)에게 선두에서 제군(諸軍)을 이끌게 해 가정(街亭)에서 장합과 싸우게 했다. 마속은 제갈량의 절도(節度-명령, 지휘통제)를 어기고 거동(擧動)이 실의(失宜-부적절함)하여 장합에게 대파 당했다. (제갈량전)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 은 제갈양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 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공략할 수는 없었다. (곽회전)
하지만 우리 등산애호가 마속은 제갈량의 명을 어기고 길목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의 길목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산행을 택하게 되지.
(산이 있으니까.)
당시 위나라 최고의 명장 장합의 5만 지원군이 도착해서 산을 포위해버려. 장합 입장에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뚫어야 하는 가정인데 이미 열려있는걸 보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 산을 포위하고 물길을 끊어버리자 마속의 군대는 알아서 무너지고, 마속의 등산을 반대했던 왕평만 질서정연하게 퇴각해서 이 사실을 제갈량에게 보고해.
장합(張郃)과 가정(街亭)에서 싸웠으나, 장합에게 격파되고 병사들은 흩어졌다. 제갈량은 진군하려 해도 거점이 될 곳이 없어 군대를 퇴각시켜 한중으로 돌아왔다. (마속전)
제갈량은 여기서 북벌 실패를 느꼈겠지. 천수의 곽회도 만만치 않은 장수였고, 위나라 본대와 대치하던 조운도 얼마나 더 버텨낼지 모르는 상황에서 속전속결로 농서를 병합하고 거점을 마련해 장안진군을 꿈꾸던 전략이 모두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으니까.
이에 제갈량은 모든 북벌계획을 취소하고 전부 퇴각시켜, 혹시나 위군이 여세를 몰아 촉한의 본토까지 들어올 걸 염려해서
음평에 왕평을, 양평관에 위연을 배치하고선 말야.
기곡으로 들어갔던 조운도 조진의 본대의 추격을 몸소 막아 겨우겨우 퇴각하게 돼.
겁이 나서 도망치던 마속은 붙잡혀서 군영에 끌려오게 되고
군령에 따라 처형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읍참마속')
마속의 부하 장수인 장휴와 이성 또한 처벌을 면치 못했고, 마속을 말리려고 했으며 패잔병을 잘 수습한 왕평으로 하여금 마속의 뒤를 잇게 하였어. 그리곤 유선에게 상소를 올려 자신의 계급을 세 단계 낮추어 사람을 잘못 쓴 죄에 대한 벌을 청하지.
사실상 강등되더라도 승상의 업무는 맡았다고 하니 실권을 잃었다기 보다는 정치적 액션이 아니었을까 해.
그럼 마속이 과연 병법에 무지한 놈이었을까?
먼저 제갈량전에 나온 언급들을 보자
재주와 기량이 남들보다 뛰어나고,군사 계책을 논하기를 좋아하니,승상 제갈량이 더욱 그의 기량을 빼어나게 여겼다. (제갈량전)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고, 매양 불러서 얘기하기를 밤낮으로 했다. (제갈량전)
마속은 결과론적으로 ㅈ밥이었지만, 승상이었던 제갈량의 신임을 얻을 정도로 병법에 대한 지식 자체는 좋았던 것 같아.
손자병법을 보자.
손자병법 8편 구변편 (9가지의 피해야 할 것들)
孫子曰
凡用兵之法 高陵勿向
손자가 말하되, 무릇 용병하는 법은, 고릉으로 향하지 말라.
이 말은 고지의 적을 향햐지 말라 라는 뜻으로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공격함이 어려움을 뜻하는 것이지.
손자병법 9편 행군편
戰隆無登 此處山之軍也
(적이 높은 곳에 있을 때는) 올라가서 대적하지 마라, 이것이 산악전의 원칙이다.
어찌됐든 손자는 고지대의 적과 대응하기가 어려우니 하지마! 라는 결론을 내린거야.
여기서 마속은 이것을 반대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인생은 실전이다 ㅈ만아'
반응이 좋으면 다음 사마의와 제갈량 이야기나 다른 이야기도 올려볼게!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