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인 아즈텍제국의 시기
사람을 삶아서 나눠 먹었는데, 주로 손,발,넓적다리가 맛있어서 이 부위는 고위층,귀족들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함.
흑요석으로 만든 칼로 사람의 몸을 찢음.
특별한날 이 의식을 치루는게 아니라, 왕의 생일이나 휴일인 월요일 같은 일부 특별한날만 이 의식을 중단했고 특별하지 않은날은 무조건 사람을 찢어서 심장을 꺼냄.
1년에 5만 명을 희생시켰다.(이것은 일주일에 천 명, 하루에 백오십 명, 한 시간에 여섯 명, 10분에 한 명을 죽인 셈이다.)
테노치티틀란에 신전을 처음 지은 것을 기념하는 의식에서는 한번에 2만 명을 희생해야 했다.
제물을 다뤄야 하는 사제에게는 별도의 경호 부대가 딸려 있었다. 훗날 이 사제들과 경호 부대원들은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몰살당했다.
아즈텍인이 제사를 치를 때에는 다섯 가지 방법이 있었다. 각각 잔혹함의 정도가 다르다.
산 제물을 돌 제단 위에 반듯하게 눕힌다. 칼로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낸다. 둥근 돌그릇에 심장을 담아 신에게 바친다.
목을 자른다. 이 방법은 주로 여자를 제물로 바칠 때 사용하는데, 희생된 여자는 나중에 부족을 지키는 신이 된다고 믿었다.
제물을 큰 돌에 묶고 방어용으로 검을 준 다음, 아즈텍 전사와 겨루게 한다. 이 때, 전사는 톱날이 달린 칼을 쓴다.
제물의 양팔을 묶고, 온몸에 화살을 잔뜩 쏘아 죽인다. 심장 부위는 하얀 점으로 표시하는데, 처음 수십 발은 하얀 점을 피해서 쏜다. 왜냐하면 아즈텍인은 제물이 흘린 피가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곡식을 잘 자라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제물을 불 속에 던진다. 그러다가 다시 꺼낸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해 제물이 바싹 구워지면 심장을 꺼낸다.
인신공양을 위한 스케쥴표라고 해도 무방했던 태양의 돌 (달력)
아즈텍의 사제들은 사람의 피부를 정교하게 벗겨내서 옷처럼 입고 의식을 치뤘다고 함.
그 특유의 잔인함과 더불어 막장성 그리고 발견된 유물들의 상태로 보아서는 마치 이집트 문명 언저리 혹은 그 전후 어디쯤의 고대 문명이 아닐까 싶지만,
놀랍게도...
아즈텍 문명 : 1248년 ~ 1521년
조선 건국 : 1392년
아즈텍 문명은 정확히 고려말 무신정권 시기 ~ 조선 중종 시기 까지 겹침.
신라 건국 1,300년 후가 아즈텍 문명임.
그때까지 이 미친짓을 하고있었던거
왜 주변민족들이 스페인에 적극 협력했는지 잘 알수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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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양이 많아지는 시기=추수기였음. 즉 영양분이 부족하기는 커녕 오히려 영양분 섭취가 가장 쉬울 시기에 인육이 가장 많이 소비되었다는 이야기. 보통 그 때가 축제였거든.
그리고 단백질 부족 가설도 반박되는게, 가금류나 개를 길렀고, 아즈텍 제국 자체가 호수 위에 지어짐. 어류 포획량도 어마어마했고, 딱히 시기에 따라 고기가 안 잡힐 일도 없었음. 대형 포유류가 없었던 건 맞는데, 애초애 전근대에 대형 포유류는 돼지 정도를 제외하면 다 농업에 사용하는 재산 취급이지 식량 취급이 아니었음. 딱히 동시대 타 문명 대비 단백질 섭취가 그렇게 힘든 건 아니었다는 이야기임.
주변 문명에 대한 압제와 공포 조성을 통한 제국 유지가 진짜 원인이었다는 설이 이젠 주류임
요즘은 정치적인 목적설도 밀려나는 분위기네요 멕시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대두되었다고 요즘은 복합적인 문제로 보는것 같습니다. 제가 알고 있던데로의 영양공급원이었다는 주장은 말씀데로 거의 부정되고 있고 복합적인 의미에 주목하는 것 같습니다.
아스텍 이전의 중남부 아메리카에서는 기원전부터 인신 공양이 행해지고 있었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으며 종교적인 목적에서 태양신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왜 태양만이 피가 필요한지에 대한 설명이 없고 다른 신화에서는 대지가 피를 원한다는 이야기나 다른 신들의 이야기도 있기 때문에 태양신에 바친다는 설도 힘을 잃었습니다. 요즘에는 신에게는 가장 좋은걸 바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 어린아이나 부녀자 범죄자도 공양이 되었다는 점으로 볼 때 정화의식이라고 보는설이 힘을 얻고 있는것 같습니다. 부정한것을 정화하기위한 의식으로써 부정한 자들을 이용했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공포를 위한 인신 공양이었다면 포로만을 대상으로 해야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꽃의 전쟁이라는 형식이 초기에는 포로를 잡아오지 않았지만 이후 포로를 잡아와서 공양드리는 것으로 보아 반란에 대한 징벌이자 반란에 대한 죄의 정화라고 보면서 이 두가지에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의견이 있네요
덕분에 잘못 알고 있던걸 다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