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길빵 사건
정조임금이 다스리던 1790년에 있던 일이다.
채제공 초상화
정조의 손꼽는 충신이자 명재상으로 좌의정을 역임했다.
좌의정은 조선시대 관료 18품계 중 정1품 최고위직일 뿐 아니라 영의정과 우의정을 포함한 삼정승 중에서도 실권이 으뜸이었다.
이 좌의정 재체공이 1790년 길을 가던 중 돈의문 근처에서 담배를 꼬나문 두 명의 성균관 유생을 마주쳤다.
"식후불연초하면 삼분내즉사라~"
당대 조선에는 웃사람 앞에서 담배를 피거나 안경을 쓰는 것은 예에 어긋난 일이었고
심지어 당시 이 유생들은 옷도 대충 걸쳐입고 있는 상태였다.
보다 못한 채제공의 권두(오늘날 비서/경호직)가 담배끄라고 호통치자 담배피던 유생이 한 말이 가관이다.
"아저씨 요즘 애들은~ 한 성질 하거든요? 예?!"
더 정확한 표현은 "내가 무엇 때문에 저 자를 보고 담뱃대를 빼겠는가."
일개 유생이 일흔 살 먹은 좌의정 앞에서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빡이 오른 권두는 이 두 유생, 곧 김병성과 김관순을 잡아다 가둔다.
어찌되었든 크게 처벌할 일은 아닌지라 채제공은 이 둘을 적당히 벌주는 셈 치고 다음날 풀어주려 했는데
그날 밤에 일이 터진다.
성균관 유생이란 작자들이 야밤에 우르르 몰려가 관리에게 잡힌 동료 유생들을 풀어주라고 협박한 것이다.
관리가 거부하자 유생들은 옥을 부수고 꺼내가겠다거나 관리를 때려죽이겠다고 패악질을 부렸다.
아 선비님들 잠시만요.jpg
생명의 위협을 느낀 관리가 호다닥 채제공에게 보고하자 놀란 채제공은 잡혀있던 유생 둘을 형조로 넘겼다가 얼마 뒤 풀어주었다.
좌의정 앞에서 양아치짓을 한 이 두 유생이 높으신 분 자제분들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김병성은 종9품 돈령부참봉 김세근의 아들이고 김관순은 종8품 동부봉사 김이의의 아들이었는데
둘 다 미관말직이었다.
결국 김병성은 아버지한테 끌려가 집안하인들 다 보는데서 빠따질을 당했고
김관순은 그 할아버지가 채제공의 지인에게 "우리집안에 병신새끼가 있다."고 돌려 사죄했다.
애초에 오늘날로 치면 외무부 말단 공무원 아들이 지나가던 국무총리한테 담배피며 개긴 꼴이니
조선시대에 그 아비가 빠따질을 안했다면 그게 용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정신 못차린 유생들이 사발통문을 돌려가며 채제공을 공공연히 욕하고
나중가면 유생은 "죽일지언정 욕을 보일 수는 없다."고 상소를 올려대며 채제공을 공격한 것이다.
명재상으로 이름 높던 채제공의 인내심도 여기서 그만 폭발해버리고 만다.
채제공은 정조에게 나아가
"욕보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선비가 공론을 말할 때나 할 소리인데
대낮 길가에서 양아치 새끼마냥 담배 꼬나물고 좌의정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놈을 혼내지 못한다면
이건 그냥 일하지 말라는 소리 아닙니까?"
라고 상소하고 사직서를 낸다.
당연히 정조가 이를 받아줄리 없었고 예의범절에 엄격했던 정조가 이를 묵과할 리도 없었다.
왜냐면 정조야 말로 당대 최고의 꼰대 중 하나였기 때문...
그 결과 길빵하며 좌의정에게 개긴 두 명은 어찌되었든 그 가장에게서 빠따질로 처벌을 받았으니 그걸로 넘어갔지만
야밤에 통금령 어기고 우르르 몰려가 관리를 때려 죽이겠다는 둥 패악질을 부린 유생들 중
주동자 이위호는 종신과거금지 처분을 받아 벼슬길이 막혔고
추종자들인 조학원, 윤선양, 원재형, 원재행 네 명은 10년과거금지 처분을 받게 된다.
결국 이렇게 1790년의 길빵사건은 정신 못차린 유생들이 꺵판치다 자기 뚝배기 깨는 걸로 끝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