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감정의 쓰레기통
벼뮤버브모서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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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6 03:23
자전적인 감정의 쓰레기통
#1. 따릉이를 타다 속도를 내는 와중 기어가 빠져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져, 다리와 팔에 꽤나 큰 찰과상을 입었다. 고작 찰과상에도 나는 꽤나 따끔함을 느끼며, 부끄러움을 무마하려 아무것도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 했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의 다른 감정들을 더 표현하기에 바빴을 뿐.
#2. 아픔은 꽤나 복합적인 감정이자 느낌인가 보다. 자그마한 상처에 그 순간을 휘감아 오는 감정들이 있고, 별 것 아닌 상처가 그 순간의 나를 감싸 괜시리 우울해지게 할 때가 있다. 그런것과는 별개로 신기하게도 오히려 크나큰 상처들이 다가오지 않은 먼 세계의 일인것 마냥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순간들 또한 있다. 비단 아픔은 고통의 크기를 수치화 한 것은 아닐 것이다.
#2-(2). 어쩌면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일까? 듣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니까, 귀를 통해 들어온 공기의 파동과 그것을 인지하고 마음을 울리는 일은 다른 일일 테니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들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흘린다면, 나는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현실이 나와는 다른, 마치 처음부터 없던 일 인 마냥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이를 인지해 수용하는 그 과정이 아픔인걸까? 작은 생채기는 나의 몸에 드러난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에 그토록 아플 수 있고, 암덩어리 같은 세포는 보이지 않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어서 아프지 않게 느낄 수 있는걸까?
#3. 드라마나 서적에서나 보던, 하나의 웃음거리로 쓰인 '암세포도 하나의 생명이라던' 그것들이 이모의 몸에 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멍했다. 비통하고, 가슴이 아팠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모는 쾌활히 자신이 괜찮다고 말했다. 이기적인 내가 그 순간 걱정하는건 오히려 나의 어머니였다. 평생을 당신과 나의 가족을 위해 헌신해오신 어머니가 받은/받을 충격이 나의 제일 걱정거리였다. 어머니는 주변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그저 말벗으로 어머니의 울적한 마음을 나누어 듣는 것 뿐이었다. 한 가족의 아픔을 목전에서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혐오스럽고 죄스러웠다. 나는 그 정도의 인간이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이 따위 변명 뿐이다. 신이시여, 불쌍한 저를 구원하소서.
#4. 불과 한 두해전,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을 만나러 가시는지, 혹은 인간 본연의 나약함을 기대러 가는지, 누군가의 떠나감을 목격하고 위로받으러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착하디 착한 이모가 이러한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우리는 비슷한 질문을 종종 신께 던진다. 왜 그토록 착한/가엾은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지/혹은 데려가는지. 정답은 아니지만 일부는 신께서 그를 필요로 하시어 부르신 것이라 말한다. 원래 무신론에 종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신이 있다면 정말로 이 말을 신께 하고싶었다. 아버지, 제발 좆까라고.
#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제발 저희를 구하소서.
#1. 따릉이를 타다 속도를 내는 와중 기어가 빠져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져, 다리와 팔에 꽤나 큰 찰과상을 입었다. 고작 찰과상에도 나는 꽤나 따끔함을 느끼며, 부끄러움을 무마하려 아무것도 아니라, 아무렇지도 않아, 괜찮다 했다.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의 다른 감정들을 더 표현하기에 바빴을 뿐.
#2. 아픔은 꽤나 복합적인 감정이자 느낌인가 보다. 자그마한 상처에 그 순간을 휘감아 오는 감정들이 있고, 별 것 아닌 상처가 그 순간의 나를 감싸 괜시리 우울해지게 할 때가 있다. 그런것과는 별개로 신기하게도 오히려 크나큰 상처들이 다가오지 않은 먼 세계의 일인것 마냥 무덤덤하게 다가오는 순간들 또한 있다. 비단 아픔은 고통의 크기를 수치화 한 것은 아닐 것이다.
#2-(2). 어쩌면 이것은 받아들임의 문제일까? 듣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니까, 귀를 통해 들어온 공기의 파동과 그것을 인지하고 마음을 울리는 일은 다른 일일 테니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들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흘린다면, 나는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 현실이 나와는 다른, 마치 처음부터 없던 일 인 마냥 아프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혹은 이를 인지해 수용하는 그 과정이 아픔인걸까? 작은 생채기는 나의 몸에 드러난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기에 그토록 아플 수 있고, 암덩어리 같은 세포는 보이지 않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어서 아프지 않게 느낄 수 있는걸까?
#3. 드라마나 서적에서나 보던, 하나의 웃음거리로 쓰인 '암세포도 하나의 생명이라던' 그것들이 이모의 몸에 퍼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멍했다. 비통하고, 가슴이 아팠다. 불행 중 다행인지 이모는 쾌활히 자신이 괜찮다고 말했다. 이기적인 내가 그 순간 걱정하는건 오히려 나의 어머니였다. 평생을 당신과 나의 가족을 위해 헌신해오신 어머니가 받은/받을 충격이 나의 제일 걱정거리였다. 어머니는 주변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고통스러워 하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거라곤 그저 말벗으로 어머니의 울적한 마음을 나누어 듣는 것 뿐이었다. 한 가족의 아픔을 목전에서 보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혐오스럽고 죄스러웠다. 나는 그 정도의 인간이다. 내가 할 수 있는건 이 따위 변명 뿐이다. 신이시여, 불쌍한 저를 구원하소서.
#4. 불과 한 두해전,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다. 어떤 심경의 변화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을 만나러 가시는지, 혹은 인간 본연의 나약함을 기대러 가는지, 누군가의 떠나감을 목격하고 위로받으러 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왜 그렇게 착하디 착한 이모가 이러한 아픔을 겪어야 하는지. 우리는 비슷한 질문을 종종 신께 던진다. 왜 그토록 착한/가엾은 사람을 데려가려 하는지/혹은 데려가는지. 정답은 아니지만 일부는 신께서 그를 필요로 하시어 부르신 것이라 말한다. 원래 무신론에 종교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만큼은 신이 있다면 정말로 이 말을 신께 하고싶었다. 아버지, 제발 좆까라고.
#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제발 저희를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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