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버지한테 지갑 물려받았어
아버지는 64년생이시고 나는 94년생
아버지랑 딱 30년 차이가 나는데
초등학생 때까지는 엄청 친했어 씨름도 하고 레슬링도 하고 등산도 가고 스타도 같이했어 ㅋㅋ
그러다가...내가 초 5때 아버지가 친구한테 보증을 서주셨는데 일이 잘 안 풀려서 집이 힘들어졌었어
그래서 어머니랑 나는 외할머니댁(서울)으로 가고, 아버지는 원래 살던 곳에서 일해서 돈을 달마다 보내주셨어
그때 내 나이가 13살인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셨어
그러면 당일치기로 하루같이 시간을 보냈었는데 그 하루가 끝날 때는 항상 울었던 것 같아.
하루가 그지없이 짧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
근데 그 허탈함을 나는 좋게 표현하지 못하기 시작했고, 내가 이렇게 외롭게 된 이유는 다 아버지가 실수해서 그런 거로 생각하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며 살았던 것 같아.
중2 때 집이 경제적으로 다시 안정되면서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오셨고, 우리는 다시 같이 살기 시작했어.
부모님 두 분다 맞벌이셨고,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날은 같이 살고 있지만서도 그렇게 많지 않았어.
분명 아버지랑 나는 어릴 때 많이 친했고, 떨어져 살게 된 이후로 난 아버지를 많이 그리워했는데...
이상하게 같이 살게 되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많이 불편한 존재가 돼 있었어.
참 많이 대들었고 참 많이 혼났어.
아 근데 아버지가 어릴 때 핸드볼,씨름을 하셨어서... 대들긴 했지만 주로 결말은 내가 뒤지게 혼나는 거였어.
그렇게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성인이 되고 군대에 갈 때 즈음
전혀 특별할 게 없던 날 아버지가 술을 먹자 권하셨고, 덤덤한 하루였기에 생각 없이 나는 그러겠다 했었던 것 같아.
작은 술집에 아버지랑 마주 보고 앉은 후, 어색한 침묵을 안주 삼아 아버지 술잔을 채워드리고
술을 하지 못했던 나는 친했던 시절의 향수가 느껴지는 사이다를 물잔에 채워서 먹기 시작했어.
그렇게 조용히 먹기만 하다가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너의 10대를 힘들게 보내게 해서 미안하다고..
순간 사이다의 목따가움 때문인지 지난 시절의 울컥함 때문인지 다 커버린 눈에 어릴 때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더라고
그러면서 아버지가 본인은 어릴 때 할아버지랑 살가운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어서 나중에 아들이 생기면 꼭 친구처럼 지내리라
생각을 하셨었는데, 내가 성인이 되는 걸 보고 지난날을 떠올리니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서 미안하다고 하시더라고
다행히도 그 술집엔 사람이 많았고 소음도 많아서 내가 질질 짜도 묻히더라고 마음 편히 울었고
아버지는 나를 기다려주셨어.
나는 그날 아버지 같은 어른이 되자고 결심을 했고 그 결심은 아직까지도 여전해
내 인생이 축복받았다고 생각되는데 그 이유는 아버지 때문이야, 멀리 안 봐도 닮고 싶은 사람이 가까이 있어서 항상 감사해.
그리고 오늘 어머니가 아무 날도 아닌데 아버지한테 명품 지갑을 선물하셨어
전에 쓰던 게 많이 낡아서 신경쓰이셨나 봐, 아버지는 정말 기뻐하셨고 나는 이상하게 아버지의 그 낡은 지갑이 갖고 싶었어.
감동의 현장에서 나는 뜬금없이 "아버지 그 지갑 저 주세요."라고 했고 아버지는 다 낡은 건데 왜 가지려 하냐며 말렸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 그냥 갖고 싶다고 달라고 땡깡아닌 땡깡을 막 부렸어 ㅋㅋ...
결국 내가 갖게 됐고 ...
나도 내 아이한테 별거 아닌 아버지의 물건을 갖고 싶게 만드는 아버지였으면 좋겠어.
왠지 이 지갑을 갖고 있으면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진짜 멋있게 낡았다, 이 지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