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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처음보는 메모를 발견했어. 근데 내 글씨체야. END

석대치겠다 11 5208 10 0

주변 바닥에는 말라붙은 진흙이 묻어있었지.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어. 머리가 무거워지면서 누워서 쉬고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어. 머리 속에서는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내 비명소리가 들려왔어. 

안돼. 자러 가지 마. 

하지만 너무 피곤해. 

스트레스야. 스트레스를 받으면 또 의식을 잃게 돼. 숨을 깊게 쉬고 안정을 취해야 해. 

가슴이 들썩거렸어. 내 숨소리는 날카롭고 불안정했지. 

과호흡.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어. 어둡던 시야가 밝아지기 시작했어. 폐 속에 산소가 공급되면서 심장박동도 보다 안정적인 리듬을 찾아갔지.몇 분후에는 다시 괜찮아졌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테이블로 돌아갔어. 리스트를 읽고 이해해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넘버 세븐 : 레베카가 아직 날 사랑하기나 할까? 


눈물이 흘러넘쳤어. 우리 관계에는 문제가 많았거든. 서로에게 고함을 치는 광경이 머리속을 꽉 채웠어. 

" 미안해! 그냥 정신을 차리리가 힘들어서 그래.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 

" 이게 니 최선이야 트레비스? 너한테 내가 누군지 설명하는 일에 지쳐버렸어. 니가 도로 한켠에서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경찰에서 전화가 오는데도 지쳤고!" 

" 일부러 그런게 아니잖아. 너 먹여 살리려고 애쓰고 있다고." 

" 먹여살려? 우릴 먹여 살리는 사람이 있다면 스콧이겠지." 

" 스콧은 엿이나 먹으라고 해." 

우리는 부엌에 서서 서로를 향해 고함을 질렀어. 이런 기억들이 수없이 많아. 내 기억상실증 때문이었지. 가끔은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싸웠어. 갈등의 원인은 보통 스콧이었지만 매번 그렇게 이유가 명확한 건 아니었지. 난 계속 리스트를 읽어나갔어. 다음 항목은 초록색 형광펜으로 갈겨쓴 첫번째 항목이었어. 초록색 형광펜이 마치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종이 위로 흘러내린 모습이 기이하고도 섬뜩했어. 


넘버 에잇 : 레베카와 스콧이 아주 친해졌다. 내가 일 나간 동안 둘이 붙어먹었겠지. 난 내 자신이 싫어. 내 자신이 싫어. 다 죽여버릴꺼야. 


오 세상에. 

편집증. 우울증. 이 두가지가 내 최근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주된 단어가 된거야. 레베카는 내게 차갑게 굴곤했지. 날 무시하거나 병.신 대하듯 하는 레베카의 모습이 끝 없이 눈앞에 떠올랐어. 슈퍼마켓에서 일하는 와중에도 레베카와 스콧 단 둘이 있을 걸 상상하면서 불안함에 떨었던 게 기억나. 그 고통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어. 순간 내가 울고있다는 걸 깨달았지. 모든 처참한 기억들이 단번에 수면위로 떠올랐으니. 

다 죽여버릴꺼야. 

내가 쓴 글이야. 내가 내 와이프와 사촌을 죽인걸까? 기억이 안나. 그 둘한테 미친듯이 화가 났던것만 기억 나. 하지만 여전히 레베카를 너무나 사랑하는데. 내가 죽였을리가 없어. 

갑자기, 머리 속에 뒤엉킨 온갖 생각들을 뚫고 낯선 단어 하나가 떠올랐어. 


손님방. 


나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어.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 내 두눈으로 확인하고 싶었어. 손님방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지. 

문 옆의 장식없는 벽과 티없이 깨끗한 바닥까지 온통 하얀색이었어. 하지만 문을 벌컥 열자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어. 침대도, 벽도, 심지어 빌어먹을 천장까지 붉게 얼룩져 있었어. 방 전체가 피범벅이었어. 오래된, 말라붙은 피 말이야. 구역질나는 쇠 냄새가 코 속을 가득 채웠지. 심장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어. 쇠망치가 질척질척하고 부드러운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떠올랐어. 비명소리도 떠올랐어. 여자의 비명소리. 


레베카. 


나는 손으로 입을 막고 손님방에서 빠져나왔어. 평정을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써야했어. 다시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진정하려고 애썼지. 내가 레베카를 죽인게 맞다면, 끝까지 제대로 확인해야 했어. 손님방에는 시체가 없었으니까. 어디다 숨겼는지 기억나지도 않고. 주방으로 돌아오기까지 거진 15분이 걸렸어. 몇 발자국 걷다가도, 정신을 놓지 않기위해 계속 멈춰서야 했거든. 레베카가 죽던 그 순간이 머리속에서 반복재생 되고 있었지만 결국 돌아오고야 말았지. 나머지를 다 읽기 위해 종이를 집어 들었어. 


넘버 나인 : 레베카는 정원에 있다. 


뒷문에 묻어있던 진흙. 레베카는 우리 집 정원에 묻혀있어. 정원을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내 사고가 있기 전에는 매 주말마다 몇 시간씩 함께 

정원에 나가 꽃을 심고 물을 주곤했지. 너무나 평온했어. 그녀는 매년 정원에 무언가를 심었어- 토마토, 딸기, 루바브. 진정 사랑했던 장소에 매장되다니 이 얼마나 그럴듯한 일이야. 마음속에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어. 빨간 장미가 수놓여진 흰색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그녀 입 주변의 근육이 풀어지더니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기 시작했지. 머리카락에는 말라붙은 흙이 붙어있어. 삽에 잔뜩 담긴 흙이 차례차례 그녀의 몸을 덮었지. 정원으로 가서 그녀의 시체를 찾아볼수도 있었지만 그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분명 레베카는 정원에 있어. 리스트 전체를 이해하는데 거진 2시간이 걸렸어. 한 페이지도 안되는데 마치 책 한권 처럼 느껴졌어. 이제 마지막 항목만이 남았어. 내가 레베카를 죽인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 어쩌면 스콧도. 

경찰에 전화해 자수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일단은 리스트를 끝까지 읽기로 했어. 


넘버 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컴퓨터를 확인할 것.


이게 무슨 소리야? 침실에 컴퓨터가 있다는 건 기억하지만 그게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거지? 어쨌든 이 항목의 의미를 파악해야만 했어. 다시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은 험난했어. 손님방의 열린 문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나갈뻔 했지만 무사히 침실로 들어올 수 있었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그 방, 얼굴에 묻은 피를 처음 발견한 그 방으로 말이야. 컴퓨터는 처음 발견했을때처럼 여전히 슬립모드를 유지한 채 커져있었어. 비밀번호도 걸려있지 않았어.전원 버튼을 누르니 바로 화면이 살아났지. 바탕화면에는 구글 크롬 아이콘 하나만 깔려있었어. 그걸 클릭하니 구글 검색 화면이 떴어. 2개의 신문기사가 즐겨찾기 되어 있었지. 하나를 열어봤어. 화면에 화려한 헤드라인이 나타났어. 


" 길리먼 카운티의 살인마가 아직 체포되지 않고있다 " 


지역 연쇄살인마에 대한 자세한 기사였어. 여자가 사는 집에 침입해 묶고 고문한 다음 살인하는 걸로 유명한 놈이었지. 경찰은 완전 당황한 상태였어. 희생자의 집을 피로 적셔놓고도 몇달째 실마리조차 잡히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의 살인방법은 쇠망치로 희생자의 두개골을 으깨놓는거였어. 


쇠망치. 


거실에 쇠망치가 있었지. 나는 몸을 떨었어. 내가 연쇄살인마인가? 그런 짓을 한 기억은 전혀 없는데. 지금까지는 내게 뭔가 의미가 있는 기록을 읽고나면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왔어. 하지만 누굴 죽인 기억은 없어. 다른 즐겨찾기를 클릭해봤어. 

15년전의 사망사건에 대한 기사였어. 


" 끔찍한 차 사고로 일가족 사망 " 


기사를 읽으니 수 많은 기억이 되살아났어. 우리 가족이 탄 밴이 얼음이 낀 도로위를 미끄러지던 것, 중앙분리대를 부수고 지나가 다른 차선에 있던 차를 들이받은 것.. 내 옆에 앉아있던 내 또래의 소년. 차가 그 소년쪽으로 충돌하는 바람에 소년의 몸이 으깨져버렸지. 그의 몸이 구겨지면서 핏덩이와 금속으로 뒤덮히는 광경을 바라만 보던게 기억났어. 장례식도 기억나. 내 옆에는 경찰관이 서 있었고, 나는 울고있었지. 우리 가족을 땅에 묻던 날이 떠올라. 우리 엄마, 아빠, 이모, 삼촌- 다 죽었어. 내 옆에 앉아있던 그 소년은 내 사촌, 스콧이었어. 내가 유일한 생존자였어. 신문기사가 내 기억을 증명해줬지. 사망자 명단에 스콧 호기의 이름이 보였어. 그런 그가 어떻게 우리와 함께 살 수 있었던 거지? 우리랑 같이 살던 그 사람은 누구야? 다시 리스트를 집어들어서 읽고 또 읽었어. 이 사건을 설명해 줄 단서를 찾아서. 3번째 항목이 눈에 들어왔어. 


- 거짓 기억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 기록물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거짓 기억이 만들어진다. 


번쩍 하고 뭔가 떠올랐어. 우리랑 살던 그 사람, 레베카에게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사촌이라고 설명했던 사람, 내가 걱정에 휩싸인 채 직장에 나가있는 동안 레베카와 온종일 단 둘이 시간을 보냈던 그 사람은 내 사촌이 아니었어. 그가 레베카를 침대에 묶는 모습을 봤던게 기억나. 아....스트레스가 벌써 내 시야를 어둡게 하고있어...쇠망치가 기억나. 그녀가 제발 일어나 도와달라고 애원하던게 기억나. 눈물이 내 볼을 뒤덮던 것,너무나도 무기력하기만 했던 그때의 내 모습도 기억나. 스콧이 낄낄거리며 미친듯이 그녀에게 쇠망치를 휘두르고 또 휘둘렀던 게 기억나. 레베카의 고통에 찬 신음소리와 뼈가 부서지는 그 역겨운 소리가 기억나. 그녀의 귀를 찢는듯한 새된 비명소리가 기억나. 그리고 나서 모든 것이 암흑에 잠겼지. 


이제야 무슨 일이 있었던건지 알겠어. 그 연쇄살인마- 그 놈이 스콧이라고 날 속였어. 처음 그를 만났던 그때가 갑자기 떠올랐어. 강도사건 직후 그 놈이 병원으로 날 찾아왔지. 난 혼자였어. 그가 꽃을 가져왔어. 붉은 튤립이었어. 내 부상과 우리 가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 그는 매주 날 찾아왔어. 내가 아.. 이 사람이 어릴때 보고 못봤던 스콧이구나 라고 생각할때까지. 

난 같은 방식으로 레베카를 설득했어. 성인이 되고 난 후 스콧에 관한 기억은 없지만, 뇌 손상 때문일거라 치부하며. 

레베카는 그에 대해 의문을 품기엔 너무나 지쳐있었어. 그리고 그가 레베카를 죽였어. 잠에서 깨어나 이 모든 걸 깨닫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다시 의식을 잃는 일을, 지금까지 대체 몇번이나 반복했을까? 난장판이 된 집과 손님방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니 이번이 첫번째는 아닌 게 분명해. 경찰에 전화해야 된다는 걸 알아. 근데 머리가 너무 무거워. 모든게 탁하기만 해. 내 침대가 너무나, 너무나 부드러워 보여. 너무 피곤해.일단 잠을 먼저 자고 일어나면 경찰에 전화해야 겠어..걱정 마. 꼭 기억해낼테니. 

11 Comments
둔탱 2019.08.23 15:57  
밤에볼거임
지우지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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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rrdd 2019.08.23 16:02  
이거 더 이어지는 거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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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동주민 2019.08.23 16:17  
재밌네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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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패왕 2019.08.23 17:31  
소설 레베카 아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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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키D유나 2019.08.23 17:49  
주인장 지우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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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겨찾기 2019.08.23 21:37  
재밌당.. 무한루프인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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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모두를죽여도 2019.08.25 00:10  
이해가 안가네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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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조아 2019.08.25 02:32  
크으 이런거 군대 인트라넷으로 당직때 보고있으면 시간뚝딱이었는데
이런내용 비슷한 영화 있던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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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판이군 2019.08.25 13:29  
[@웬디조아] 메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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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 2019.08.25 22:47  
메멘토 안봐서 메멘토 내용인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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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 2019.09.03 15:07  
메멘토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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