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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주성치 10 2453 25 0
2차 침공으로 다시 고려땅에 들어온 몽골군. 


강화도는 포기하고,

몽골군은 용인의 처인성(지금의 처인구)을 공격한다.


처인성전투는 한국사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전투로 남아있다.


김윤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이때에는 승려출신의 장군 김윤후가 처인성 전투를 지휘한다.

김윤후 장군이 몽골군의 최고사령관 살리타를 

이 전투에서 사살해버린다.



김윤후 장군이 직접 쏴 죽였다는 얘기도 있고, 
난전 중에 살리타가 화살에 맞았다는 얘기도 있다.


최고사령관이 없어지면 
전투를 안하는 특징을 가졌던 몽골군은
살리타가 죽자 그냥 


후퇴해버린다.


그리고 이 살리타의 사망은, 우리나라 전쟁사에서
가장 최고위직의 적 장군을 죽인 사례이다.


이렇게 고려는 몽골의 2차 침공을
깔끔하게 막는다.


김윤후 장군 한명이 전쟁을 종식시킨 것이다.
그러니 특이한 전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김윤후2.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그렇다면 이 특이한 전투의 지휘관인 김윤후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김윤후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정말 미스터리 투성이이다.

이분의 이름만 알고 , 신분이 뭔지, 고향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

(미갤답죵?)



출가하여 승려가 되고,
백현원에 있었다.


이것이 그에 대한 기록의 전부이다.

조선시대 부터 백현원이 어딘지에 대하여
열심히 찾았으나 결국 어딘지 찾지 못하였다.


다만 짐작가능한것은,

고려시대의 '원'이라는 것인데,

원은 고갯길이나 교통요지에 위치하여 
숙박기능치안유지 기능을 담당했다.

고려는 조선처럼 중앙집권이 발달하지 않았고,
원에는 승려가 많았다.
이 승려들이 원에 머물며 동네치안유지 또한 담당했던 것.

그러니 소림사처럼 무승이 지내고 있었다.

이런 원은, 강도나 도둑이 많은 
치안이 안좋은 지역에 주로 세워졌다.


김윤후 장군 또한 무승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분이 왜 처인성에 왔는지는 또 미스터리이다.

처인성 지역이 그 백현원이 있었던 지역일수도 있고, 
전쟁이 나 떠돌다가 들어갔을 수도 있다.
고향이었을 수도있고.


두번째 미스터리는 이 처인성이라는 곳인데,

처인성은 군,현 보다 낮은 지역단위인 부곡이다.

처인성터.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이곳은 막힌 땅인데, 외진곳이고 도로상에서도 조금 벗어난 곳이다.

그러니 교통이 불편하고 좁은 지역인 이곳은 
아마 피난처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살던 사람은 자연스럽게 
싸움을 잘하거나,사냥꾼들이 살 법한 동네인것.




브금보급하러왔음



김윤후3.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여기서 이런사람들을 이끌고 싸운 김윤후 장군에게 

살리타를 죽인공로로 포상을 하려고 하니

'내가 쏜게 아니다. 나는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고 말을 한다



미스터리 투성이인 상황.

몽골 최고사령관이 왜 군,현이 아닌 부곡에 있는 작은성을 공격했으며,
안전하게 본진에 있어야 할 사령관이 왜 화살에 맞았는가?

게다가
이 처인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성이 아니라.

대군이 아닌 도적떼를 막는 흙으로 만든 진지 같은 곳이었다.



보통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도망가는게 일반적인데,
왜 이곳에서 백성들이 버티며 싸웠는지

사실은 몽골군이
쳐들어온게 아니라 사냥하러 나왔다 발견한 곳인지,
정찰하러 나왔다 발견한 곳인지
(최고사령관이 정찰했다는 것도 미스터리)


김윤후 장군에 관련된 사건은 너무나도 미스터리가 많다.



아무튼 고려 조정에 본인이 살리타를 죽인게 아니라며

'정3품의 상장군'의 재상급의 높은 벼슬을 거절한다.

그리고는

'종6품 섭랑장' 의 중견장교직을 받는다.


그는 본인이 상장군이 되는것보다 
같이 싸웠던 처인성의 사람들 모두가 포상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도 모른다.



그는 부하에게 공을 돌릴줄아는 리더의 자질을 갖춘

 욕심이 없는 승려장군이었다.
(사실 본인이 화살로 살리타를 죽이고 공을 아랫사람에게 돌린것일수도 있다.)



적은 피해로 2차 침공을 막아낸 처인성 사람들

이들에 대한 공로로 처인의 부곡은 현으로 승격된다.


윤후짱.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리더의 자질을 갖춘 덕에 김윤후 장군을 따르는 부하들도 많았다고 한다.


이 것은 아주 나중의 일(몽골의 5차 침입)인데, 

신분제 사회였던 고려는 포상을 해도 치사하게 줬다고 한다.

직급을 높게줘도
하는일은 크지않은
한직을 주어서

지방에서 세를 키우지 못하게 했다.


당시 몽골군이 고려에 쳐들어 올때마다

꼭 털러 들어가는 고을이 있었는데

바로 충주였다.

충주.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과거에는 교통의 요지였던 충주. 


그 충주에서 몽골군과 격전이 벌어지는데

그 충주성에는 과거사건이 하나 있었다.



몽골의 1차 침공때, 힘있는 별초들이 다 도망을 가고

노비들이 싸워서 충주를 지켜냈는데,

도망간 별초들은 큰일났다 싶어.

기물을 훔쳤다는 누명을 씌웠고,

노비들은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별초들은

충주를 싸워 지킨 노비들을 싸그리 몰살해버린다.


고향을 못 떠났던 옛날.
그때 죽은 노비들의 아들,조카등 혈족과 지인들이

성인이 되어 
5차 침공당시 충주에 살고있었다.


다시 충주에 쳐들어온 몽골군.

고려조정은 이 고려별초와 장군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땅에
누구를 보낼지 고심하는데,


윤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그때, 선택한 사람이 김윤후 장군이다.

그리하여 충주성에서 중요한 전투가 벌어지는데

충주성.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충주성으로 오는동안 성3개를 함락시키고 

학살극을 벌인후

쳐들어오는 몽골군


격전을 벌이다가 김윤후 장군은 
파격적으로 노비문서를 다 태우도록 지시한다.

"온 힘을 다해 지키면 , 신분상관없이 모두에게 벼슬을 주겠다."
라고 확언한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싸운다.

그러자 이들은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70여일을 싸워서 지켜낸다.


더 놀라운 점은 

충주성을 함락 못 시키자
몽골의 지휘관이 해임된다.


지휘관이 해임되자,

몽골은 다시 철수해버린다.



김윤후장군은

적 지휘관을

한번은 죽여서 없애고,
한번은 해임시켜 없애버렸다.



총 9번에 걸친 몽골군의 침공

그중에서 2번을

이 김윤후 장군이 철수시킨다.

갓윤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갓윤후..



우리 역사에 이런일이 별로 없는데..


이례적으로 김윤후가 했던 노비해방벼슬 약속을 고려조정이 지켜준다.
 
그리고 김윤후는 상장군의 벼슬을 결국 받게되지만,
한직을 받는다.

감문위상장군(은퇴한 병사들 관리, 재향군인회 사단장 같은느낌)



계속되는 몽골의 침공에 못살겠다며
지역단위로 항복이 시작되고, 

그때 떨어져 나간곳이 동북면(함경도) 지역이다.


▣ 이성계의 집안도 이때 항복한다.

이 위태로운 지역사정을 들은 고려조정은 
여기에 또 김윤후를 보낸다.

김윤후가 도착하기전 이미 동북면은
몽골에 떨어져 가지 못하고 

그 뒤 김윤후장군이 오래 살다 은퇴한 후에
고려 조정은 그에게 대장군 직책을 준다


그 정도 공로였으면 사실 이미 대장군급 재상직을 받았어야 하는 상황

하지만 높은벼슬을 넙죽받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벼슬은 항상 몇번의 거절후에 받아야 후환이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벼슬은 보통 여러번 권하는데, 김윤후 장군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헬고려)


몽고군이 고려군에게 깜짝 놀란 전투가 하나 더 있었는데 

1236년 죽주산성(안성) 전투이다.


이 죽주산성은 중부지방 최고의 교통요지이자 군사거점이었다.
이곳의 지휘관은 귀주성 전투를 경험했던 



송문주장군상.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송문주 장군이다.
 


그렇기에 그는 몽골의 
공성술 순서를 꿰뚫고 있었다.

죽주산성 전투가 시작되자
송문주 장군은 투석기를 배치해놓고
몽골군이 투석기를 배치할때까지 기다린 후 

설치가 끝나자마자 산성안의 투석기로 

몽골군의 투석기를 부숴버린다.


깜짝 놀란 몽골군, 이 죽주산성에서 15일을 넘게 버티자

몽고군이 물러난다.



안성맞춤.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이 안성에 3도의 물자가 모이는 대중적 공산품 생산지라 해서 생긴말이라는 풍문이..)
 




세계적으로 유명한 몽골의 공성전이 
고려에 와서 무참히 깨지는 사례가 계속 발생한다.

(우리나라의 뛰어났던 수성능력은 연구가 덜 되어 세계 전쟁사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여몽전쟁의 말기.

몽골은 고려에 대한 태도를 바꿔
협상,강화 없이

대량 학살을 하며 강화도를 제외한 고려 전역을 쓸고 내려간다.


덜컥.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이 과정에서 경주의 수많은 문화 유적과 유물들이 파손된다.
(황룡사 9층 목탑, 신라 최대의 종 황룡사 종 등등)


상황이 이렇게 되자

무능했던 중앙정부에 실망한
민심이 정부에서 몽고군으로 이반되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강화도2.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몽골군은 강화도에서 너희들이 안나오면
고려를 털고 가면 그만이라며 협박하기 시작한다.

국가.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이럴때 국가의 역할이 무엇일까?

딜레마에 빠진 고려

항복하고 나가면, 백성들이 나중에 더 괴로워 질수도 있는 상황.

어찌됬는 국가라는 것은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것
지배층,피지배층 할 것없이 인정하는 부분인데,

백성입장에서는 버티면서 확실하게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무엇인가 타개책이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그 타개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백성입장에서는 강화도에서 조정이 호의호식하며 지내는것 같으니
민심이 이반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현대전의 스탈린의 전략에 대해서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2500만명을 죽이면서 저항한 것이 뭐가 저항이냐? 라고 하는 사람과
그때 항복했으면 뭐가 달라지냐? 라고 하는 사람이 갈리는 것이다.

고려의 상황도 이와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 것.


당시 강화도는 좁은 땅이어서 농토가 없고 척박한 땅이었다.

그래서 정부도 무언가 조치를 하긴 하는데,


조정에서는

곡식이 많이 들어가는 술. 
전국에 금주령을 내린다.

그리고

농부들에게는 쌀밥을 먹지말고 세금으로 바치라고 한다.


이규보는 강화도에서 그 세태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이규보.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고려조정은 
가끔 지방에 아주 적은 수의 군대를 보내 몽골에 저항도 몇번 하긴 했다. 


하지만 큰 틀에서보면 딜레마를 
당시 고려사람들도 해결을 못했던 모양이다.


팔만대장경.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이 몽골의 침략시기에 만들어 진게 ' 팔만 대장경'인데,

이 힘든 상황에 엄청난 돈을 들여 팔만 대장경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으로 예전 고등학교 다닐때
'종교의 힘을 빌어 몽골을 물리치기 위해서' 라며 간단하게 배웠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랬을까?


옛날 사람들이 종교에 의지했던 이유는
지금보다 신앙심이 깊어서가 아니고

유럽도 마찬가지인데,
의학이 발달하지 않아 

사람한테 투자할 여건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가 불가능한 시기였던 것이다.


전염병이 한번 돌면, 의사를 포함해 주민의 반 이상이 사망하는 시기인데
의사 육성에 투자해봐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인것.

그래서 시 재정의 절반이상을 성당 건축에 사용하는데,
그것조차 안하면 폭동이 일어났다.






흉흉한 세상


믿고 의지할게 필요했던 사람들
그 역할을 했던 것이 '종교'였던 것이다.


사학자도 하지 못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 시대사람들의 마인드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그시대를 막상 산다면 모를 일이다.


팔만대장경을 만든 이유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무신정권이 수립됬을때, 자객들이 여러번 출현하는데
그 당시 동원됬던 자객은 전부 승려들이었다.(무도승)

(당시 사찰은 유력 집안들,정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있었다.)


그러니 정권이 바뀌어 급이 내려간 사찰들의
승려들이 자객단으로 들어가는 구조가 있었다.




고려시대 사찰의 승려들은

중세유럽으로 따지면 가톨릭 기사단의 개념과 유사했다.

이들이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고려 조정이 이들을 하나로 묶을 매개체로 큰 사업을 벌여 
전국의 사찰들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관청과 수령도 제 기능을 못하던 당시 상황.
가뜩이나 행정망이 엉망인 상황에서
전 국토를 체계화 하는데에 
사찰이 큰 역할을 할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찰이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사찰이 치안유지, 흉년 구제등 일반 백성들의 삶에

밀접하게 침투해 있었기 때문이다.

즉, 관공서 역할의 50% 이상을 맡아 했던 것이다.

전시에는 이런식으로 행정망을 유지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이런식으로 몽골에 저항하며 30년간 버틴 고려.


하지만 백성들이 지쳐가고 동북면이 떨어져 나가고
각 지역에서 불만이 쇄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이 고려에게 



'고려왕이 직접 와서 조배를 들고 항복하라' 는 요구를 한다.

하지만, 고려정부는 단칼에 거절한다.
(외교감각 ㅇㄷ?)



처음엔 우리가 버티면 몽골이 물러갈거라 생각했던 고려정부.

하지만 몽골은 당최 물러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전략이라는 것은 목적에 대한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끝이 안보이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고려가 항복하니, 몽고 장군이 이런말을 한다.

' 니네도 참 지독하다. 너희들이 그렇게 대책없이 버티고, 
백성들이 그렇게 대책없이 죽어가면 지도부가 먼저 결단을 내렸어야 하지 않냐 '

몽골군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 봤던 것이다.


몽고군 입장에서는 엄청나게 오랫동안 잘 버티는 고려.

여기서 중대한 변화가 생기는데,

몽골의 전략이 바뀐다.


예전에는 너희 버티고 안나오면 고려사람들을 약탈한다 했는데,

이제는 전부 죽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자


1254년 몽골에게 포로가 된 사람의 숫자만

20만 6천명

고려인구의 5% 였다.



이는 이태까지의 포로 숫자보다 많은 숫자였고, 

사망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예전부터 고려조정 내부의 문관들에서도
강화하고 외교관계 맺자는 주장이 꾸준히 있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무신정권의 권력기반이 흔들리는 상황.

무신정권은 계속 거부하며 버틴다.

몽골은 정통성없는 무신정권 말고 왕을 세워 거래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질권력이 무신정권에서 왕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불만을 갖고있던 야별초가 반란을 일으킨다.

이로인해 최씨 무신정권이 완전 붕괴된다.

최씨 정권이 붕괴될 시기 즈음 



태자 원종이 항복하러

원나라로 향하게 되는데 




이때, 몽골황제 몽케 칸이 덜컥 사망한다.



가계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툴루이 첫째아들래미



중국까지 황제를 만나러 갔더니
황제가 죽은 어이없는 상황.

이떄 우리나라 외교사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몽케가 죽고

몽골에서


내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쿠빌라이이리크부카간의 내전의 기운이 감도는 상황


원종은 어느 편에 붙을 것이냐를 고민하다가

쿠빌라이를 만나러 간다



당시 전쟁준비하던 쿠빌라이.

그런 상황에서 고려의 태자가 


'내가 당신의 편에 서겠소' 라며 찾아온 것이다.


쿠빌라이는 굉장히 기뻐했다.



고려는 몽골의 침략을 30년이나 버틴 굉장한 나라다. 
그런나라의 태자가 자신에게 동맹을 제안하다니,

그것은 고려가 쿠빌라이를 황제로 인정한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봤을때에도 수나라, 당나라, 거란, 여진 모두 고려에게 패하고 돌아갔기 때문에
고려를 만만치 않은 나라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시 몽골도 30년간 고려를 함락 못시키고 있던 상황)


' 그런 고려를 휘하에 두다니 ! '

쿠빌라이는 너무 기뻐
흥분하며
오바를 시작한다.


" 앞으로 고려를 건드리는 나라가 있으면 우리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


원종이 무신정권때문에 지금 본인에게 힘이 없다고 말하자 

고려에 조서를 내린다.


쿠빌.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2-

 
몽골과의 전쟁은 이렇게 동맹으로 끝이난다.
(갑분동)


하지만, 몽골에게 별 도움안됬던 고려.


지금은 힘이없어 지원이 힘들다.
그리고 너희와 사돈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원종아들 충렬왕 쿠빌라이 막내딸 제국대장공주가 사돈을 맺는데,

이 사돈관계가 놀라운 이유는

몽골황족은 원래 황족끼리 결혼할 수 있는 부족이 정해져 있었다.
절대 칭기즈칸의 피가 이어지는 
황금씨족의 딸은 외부와 연결시키지 않았는데,

이 황금씨족의 딸을 고려에 보낸것이다.


이 막내딸은 고려에와서 답답했던지 빨리 죽게 되는데,


몽골 사람들이 와서 그 공주의 비문에 쓰기를


'황제에게 많은 자식이 있지만, 막내딸은 특별히 더 귀여운법이다'

'이 딸을 고려왕과 결혼시켰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라고 쓴다.


그만큼 쿠빌라이는 고려의 동맹제안에 흥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맺은 동맹은 

공격을 하여 항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상하관계가 있었다고는 하나,


어느정도 수평한 관계의 동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려는 멸망대상에서 
어느새 사돈국가로 바뀌어 있었다.


30년동안 강화도에서 버틴 것
그것은 폐단도 물론 있었지만,


결과론적으로 봤을때는
무조건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일은 아니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명나라 황제가 중세한국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면,

딱 두가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당태종과 수나라를 물리친 국가
몽골에 30년간 저항한 국가

(그들도 그렇게까지 저항은 못했음)




고려를 위해 피땀흘려 가며 싸운 훌륭한 장군들과 
유명하지 않은 수많은 이름없는 장군들까지도



우리가 살아 숨쉬는


이 땅에 묻혀있다.





(확실히 우리나라가 저력있는 민족이긴 한가봐요, 전투민족 DNA가 진짜 있긴 있나봐)




- 외전 여몽전쟁 끝

(삼별초항쟁과 일본은 생략하겠습니다.)

10 Comments
쏘름 2019.01.22 13:53  
국뽕글 ㅇㄷ

럭키포인트 398 개이득

시공좋아 2019.01.22 14:02  
재밌게 잘 봤습니다 김윤후장군이 승려인건 처음 알았네요

럭키포인트 251 개이득

바부코리아 2019.01.22 15:35  
역사글 추천

럭키포인트 274 개이득

개집넷 2019.01.22 18:25  
개좋다 진짜 너모 좋아

럭키포인트 3,314 개이득

불량우유 2019.01.22 22:33  
저 결혼땜시 충선왕때쯤 오면 몽골 황위계승권 후보에까지 오르지 ㅋㅋㅋ

럭키포인트 3,989 개이득

지대독 2019.01.23 14:39  
ㄱㅇㅎ ㅇㄷ

럭키포인트 4,635 개이득

그링그리 2019.01.23 16:48  
침기즈칸인줄알고 눌렀다가 ...

럭키포인트 2,792 개이득

카카로트 2019.01.23 17:23  
이런거 재밌어 !!

럭키포인트 3,540 개이득

대머리아재 2019.02.01 15:03  
너무 재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역사가 원래 이렇게 재미있는지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하네요.

럭키포인트 1,751 개이득

낫띵이즈트루 2019.02.01 20:47  
시리즈로 너무 많이 올라와서 보기싫었는데 개졸잼이네

럭키포인트 2,750 개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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