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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레딧-주방에서 처음보는 메모를 발견했어. 근데 내 글씨체야.

석대치겠다 0 1122 2 0

이 모든 일의 시초는 볼에 묻은 말라붙은 핏자국이었어. 피가 어디서 난거지? 내 피는 아니야.욕실에서 온 몸을 살펴봤지만 긁힌 자국 하나 발견하지 못했어. 머리 속이 텅빈듯했어. 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시작은 오늘 아침부터였어. 눈꺼풀에 와 닿는 햇살을 느끼며 끙끙대다가 고개를 돌려 알람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어.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실 안을 몇 발자국 걷다가 거울에 비친 핏자국을 본 순간 깨달았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그 단어가 뭐더라? 암네시아. 기억상실증. 머리속에서 답이 들려왔지. 침실 안에 서서 정돈되지 않은 침대를 바라보다가, 기억상실이란 단어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 


해리성..해리성 기억상실. 


어찌된 일인지 그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걸 알게 되었지. 내 창백한 피부위에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그 생각도 뇌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어. 그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거든. 내 마음은 자물쇠로 잠긴 상자와 같았고, 나는 아직 맞는 열쇠를 찾지 못했어. 침실에는 가구가 많지 않아.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었고, 침대에서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 것처럼 보이는 책상이 놓여있었어. 그 위에 노트북이 하나 있어. 화면은 죽은 상태였지만 전원버튼이 희미하게 빛나는게 보였어. 


슬립모드. 


침실에서 나왔어.흰 벽과 회색 카펫이 깔려있는 복도 풍경이 너무나도 친숙했어. 


내 집. 


집 안을 헤메이다가 닫힌 문 하나를 발견했어. 손잡이를 돌리려고 손을 뻗는데, 갑작스레 단어 하나가 떠올랐지. 


손님방. 


문을 열어보.지는 않았어.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찾는 것은 다른 곳에 있을것만 같았거든. 복도는 카펫이 깔린 계단참까지 이어져있어. 계단 끝에는 유리가 끼워진 커다란 나무 문이 있었어. 분명 저게 현관문이겠지. 알 수 없는 반사작용에 이끌려 현관이 아닌 부엌과 거실이 있는 쪽으로 향했어. 부엌 앞에 2인용 소파와 안락의자가 하나씩 있었고, 그 뒤로 유리문이 언뜻 보였지. 


거실. 뒷마당. 


부엌 역시 친숙한 모습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잔뜩 어질러져 있었어. 설거지감은 싱크대를 채우고도 모자라 조리대까지 점령했고, 찬장문은 

열린채인데다, 설탕봉지와 채소 통조림이 입을 벌린 채 바닥에 흩어져 있었지. 문이 열린 냉장고에서는 상한 우유 냄새가 진동했어. 코를 쥐고 냉장고 문을 닫은 후, 주방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돌렸어. 온통 엉망진창인 가운데 테이블만이 새 것같이 깨끗했지. 그 위에 글씨가 빽빽한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어. 


내 리스트. 


본능적으로 그 종이안에 적힌 무언가가 내게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었어. 종이를 집어들면서, 글씨체가 낯익은 걸 넘어서서 내 글씨체임이 

분명하다는 걸 알아챘어. 첫 글자인 Y부터 마지막 N까지 내 글씨체임이 확실했어. 내가 이 모든 걸 적었는데도, 그 기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어. 리스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10개의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었어. 첫 부분에 해당되는 문장들은- 5번째 항목까지- 글씨체가 아주 정갈했어( 아마 납세신고서를 작성할 때 이런 글씨체였겠지) 이 항목들은 모두 검정색 볼펜으로 쓰여있었고, 6번째 항목도 글씨체가 깔끔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파란 볼펜으로 쓴 걸 봐서 작성시간대가 다른 것 같았어. 빨간 볼펜으로 적힌 7번째 항목은 손을 질질 끌면서 쓴 듯 너저분했어. 분명히 내 글씨였지만, 나중에 봐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있게끔 신경써서 쓴 것 같진 않았어. 마지막 세 항목은 굵은 초록색 형광펜으로 쓰여있었어. 뒤죽박죽 제멋대로인 커다른 글씨들이 종이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지. 처음에는 마치 외국어를 읽는 것 처럼 무슨 말인지 당최 알 수가 없었어. 각 단어의 뜻은 분명히 알고 있는데도 그것들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그러다가,리스트에 적힌 항목들이 차츰 머리속에 숨어있던 기억들을 불러내기 시작했어. 그때에서야 그것들을 적었던 게 기억났지. 


넘버 원 : 네 이름은 트래비스 호기. 너는 길리먼 카운티의 카멜롯 레인 756번지에 네 와이프 레베카와 함께 살고있다. 


레베카. 


머리 속 안개가 조금이나마 걷히는 느낌이었어. 레베카- 내 와이프.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말도 안되게 창백한 피부가 떠올랐어. 아니야.. 그게 아니라 원래 금발이었는데 최근 머리카락 색깔을 어둡게 하기 시작했어. 그런 걸 좋아했거든. 결혼한 지 얼마나 됐더라? 그리 오래 되진 않았어. 아마 몇 년 안되었겠지. 아직 많은 것을 떠올리긴 힘들어. 나는 레베카를 알고있고, 머리속에 그 모습을 떠올릴 수도 있었지만, 우리가 함께한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아. 내가 떠올릴 수 있는건 절대 끝나지 않는 암흑속에 홀로 서있는 레베카의 모습뿐이야. 그녀는 붉은 장미꽃이 아로 새겨진 흰색 드레스를 입은 채 웃고있어.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덮고있었지. 난 다음 항목을 읽기 시작했어. 


넘버 투 : 네 머리속에는 강철판이 들어있다. 노상강도의 피해로 극심한 뇌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밀치기라도 한 것처럼 휘청거렸어. 다리로 버틴 끝에 겨우 서 있을 수 있었지. 갑자기 불쾌한 이미지들과 폭력적인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두개골 왼쪽을 두드려 보니 금속성의 소리가 나더군. 강도. 1월이었어. 눈이 왔고, 나는 레베카와 있었지.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어. 아니야.. 연극이었지. " 그건 못가져가." 미안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아. 연극은 별로였어. 내 기대만큼 재미있지 않았거든. 레베카는 완전 반해버렸지. 특히 지하실에서 폭죽을 터트렸던 그 노인네에게. 극장 근처에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몇 블록 떨어진 곳에 주차를 했어. 골목으로 가면 지름길이니 그 쪽으로 가자고 했지. " 여긴 덴버야." 그녀에게 말했던 기억이 나. "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해." 레베카는 망설였어. 그 근방에 아직 신원도 밝혀지지 않은 연쇄살인마가 돌아다니는 거 모르냐고 물었지. 나는 그녀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골목길로 이끌었어. 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어. 연쇄살인마는 아니고, 그냥 강도 말이야. 총을 쥔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어. 아마 강도도 긴장했던 모양이지. 지가 왜 긴장하냔 말이야? 지가 우리를 터는거면서. 

" 지갑 내놔!" 

나는 반항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어. 

" 가방도 내놔." 

금발머리에 감싸인 레베카의 얼굴이 창백해졌어. 

" 알았어요, 열쇠만 좀 꺼낼께요." 

" 안돼! 당장 내놔!" 

" 제발요!" 

레베카가 가방으로 손을 뻗자 강도가 총을 겨눴어. 나중에 그녀와 이야기해보니 진짜 열쇠만 꺼낼 생각이었다는데, 강도는 아마 레베카가 가방에서 총을 꺼낼 줄 알았나봐. 난 그녀쪽으로 몸을 던졌어. 그리곤 귀청을 찢는듯한 총성이 울렸고, 그 뒤론 온통 암흑이었지.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병원이야. 총알이 내 두개골 일부를 산산조각 내긴 했지만 날 죽이진 못했지. 대신 두개골 조각이 대뇌피질에 박혀버렸어. 리스트를 내려놓자 기억도 멈춰버렸지. 마음속에서 그만 읽으라는, 더 기억해내지 말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어. 본능적으로, 리스트의 남은 

항목들이 날 분노케 하리라는 걸 알 수 있었어. 하지만 멈출 수 없었어. 


넘버 쓰리 : 너는 뇌손상으로 해리성 기억장애를 앓게되었다. 닥터 필립의 지시로 중요한 사실들을 리스트로 만들게 되었다. 기억이 잊혀졌을때 보고 참고할 수 있도록. 거짓 기억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 기록물에 촛점을 맞춰야 한다. 


닥터 필립은 내 치료사야. 나이가 많고, 인내심이 지긋한 양반이지. 레베카가 치료사를 찾아주었어. 근방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니 그 정도면 괜찮지 않겠냐며. 

" 한동안 건망증에 시달리게 될 겁니다. 어쩌면 평생일수도 있구요. 하지만 시각적으로 기억을 상기 시켜주면 대뇌피질의 해마를 자극해 묻혀버린 기억을 되살릴수도 있어요." 

그가 한 말이야. 그 때문에 이 리스트를 만들게 된거지. 그게 언제적 일이지? 며칠? 몇주? 몇달? 이제 소소한 기억들이 돌아오기 시작했어.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머리속에서 장면 몇 개가 빠진 단편영화가 상영되는 것과 비슷하달까. 


넘버 포 : 너의 기억상실은 보통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시작된다. 머리를 비우고, 안정을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이에서 눈을 들어 난장판이 된 부엌을 둘러보았어. 쏟아진 쥬스와 뭉개진 당근이 부엌바닥을 덮고 있는 광경을. 당근은 이미 갈색으로 변해있었어. 대체 얼마나 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이 난장판을 만든게 무엇이든 그게 내 기억상실증을 유발 했을 게 분명해 보였지. 


강도를 당했나? 


웃긴 건 집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됐는지 알 수 없다는 거야. 욕실에 들어가기 전 상황은 거의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잠에서 깨어났을때의 상황도 기억에 없어. 분명히 기억하는 첫번째 사건은 내 얼굴에 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는 거야. 이 항목을 읽으니 닥터 필립과 레베카가 한 말이 살짝 떠올라. 내가 예전에도 의식을 잃은 적이 있다고 했었지. 하지만 여전히, 가장 최근에 의식을 잃은 일에 대해선 기억할 수가 없어. 


넘버 파이브 : 너는 동네 수퍼마켓에서 일한다. 닥터 필립은 매일 매일 새로운 자극을 받도록 노력하는 것이 도움이 될거라고 조언했다. 레베카는 집에서 일한다. 


절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어. 직장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있었어. 잠시 직장에 전화를 해야 하나 생각해봤지만 엉망진창이 된 집구석을 보니 

이걸 정리하는게 우선일 것 같았어. 직업에 만족한적도 없어. 내 지적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직장이거든. 하지만 제대로 된 일을 하는 법을 잊어버렸을땐 슈퍼마켓에서 재훈련을 하는 편이 수월하니까. 다섯번째 항목을 보니 수 많은 기억들이 되살아났어.레베카는 의료기술사야. 의사의 음성 기록물을 타이핑해서 문서화하는 일을 하지. 그래서 재택근무도 할 수 있었던거야. 총격 사고 전에 나는 대기업 회계사였어. 수입이 좋았던터라, 이 집도 살 수 있었지. 사고 전에 우리는 아기를 가질 계획이었어. 레베카는 항상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두고 싶다고 했었지. 그녀의 조부모 이름을 따서 링컨과 클레어라고 부르고 싶다고. 스스로를 탓하지 말라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애원하는 레베카의 이미지가 마음속을 가득채웠어. 우리는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내 기억상실이 너무 큰 장애물이 되버렸으니까. 다시 리스트에 집중하기로 했어. 다음 항목은 앞선 5가지 항목과는 다른 시기에 쓰여진 것 같았어. 


넘버 식스 : 2016년 8월, 너의 사촌 스콧이 너희 집으로 들어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스콧 역시 재택근무자이다. 


스콧은 내 혈육 중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이야. 우리가 어렸을때 마지막 한명마저도 차 사고로 죽어버렸거든.스콧과는 몇년째 왕래가 없었는데 내 사고 이후로 그가 나를 찾아왔어. 그는 항상 탈진한 사람처럼 비실비실 했지만, 컴퓨터 프로그래밍 실력만은 끝내줬지. 그래서 재택근무를 할 수 있었고. 내 부상 이후 나를 돌봐 주겠다고 자처할만큼 좋은 놈이지만, 실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살 기회를 잡고자 찾아온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 그는 아직까지도 집안일을 돕거나 의사가 내게 멀리하라고 충고한 스트레스 받는 일들, 공과금 납부 같은 것들을 처리해주고 있어. 처음에는 레베카도 스콧에 대해 전혀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 했지만, 이젠 돈 버는 사람이 한명 더 늘어나서 좋다고 하더라구. 스콧과 나는 그닥 친밀하게 지낸 적이 없어. 말했듯이, 예전에는 왕래도 거의 없었고. 순간 내가 완전히 혼자라는 사실을 자각했어. 집 어디서도 인기척을 느낄 수 없었어. 숨막히는 침묵만이 가득할뿐. 레베카랑 스콧 모두 집에서 일한다면서, 왜 아무도 없는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살금살금 걸어갔어. 거실도 난장판이긴 마찬가지였지. 아까 언뜻 본 의자 2개는 상태가 좋았지만 나머지는 엉망진창이었어. 

티비가 뒤집힌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어. 거실 한구석 벽에는 긴 나무 몸체에 커다란 금속 대가리를 한 무언가가 단정히 기대어져 있었지. 


쇠망치. 


망치 윗부분은 녹슨듯한 핏빛이었어. 망치 아래 카펫 색깔도 거실 전체에 깔린 아이보리 색이 아니었어. 그곳만 말라붙은 갈색이었지. 


피. 


이 집에서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던게 틀림없어. 뒷마당으로 이어지는 유리 문을 들여다봤지. 블라인드가 내려져 바깥 풍경을 볼 수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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