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의 주력부대였던 조선족
김일성의 요청으로 모택동이 북한 쪽에 전쟁 직전에 보내준 10개 연대 규모 조선족이 선봉에 서서 6.25 전쟁을 일으킵니다.(당시 전쟁 초기 북한군의 47%에 해당합니다.)그 조선족 군사들은 약 4~5만명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들 조선족부대는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 등의 실전 경험이 빠삭한 부대였고, 그 외에도 중국에서 수년간 많은 훈련을 받았기에 남한군은 물론 기존의 북한군 보다도 훨씬 더 높은 저력을 갖고 있던 정예군 이었습니다. 전쟁 직후 제일 먼저 서울을 장악하고 전라도 지역으로 침투해서 수많은 우익 인사들과 죄없는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유명하고, 북한에서 훈장을 두개나 탄 유명한 전쟁영웅 "방호산"의 경우, 그의 사단 전체가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중국공산당 정부가 내린 명령은 "만주의 조선족들과 함께 군대를 꾸려 중국혁명을 위해 싸우자" 였습니다. 그 명령 후에 새롭게 개편된 4만 5천명의 동북민주연군 군대가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국공내전에 참여(조선족)합니다. 그 다음 김일성이 김일,김광협을 파견해서 그 조선족 부대를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그에 따라 허난성의 정저우,장춘,선양의 부대가 집결하여 4만2천명이 모였습니다.(인민군 제 5,6사단으로 변경) 이 중 1만 4천명은 국공내전당시 중국이 노획한 미군 무기를 가지고 참전하였고 다른 인원은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공급받았습니다. 이 내용은 미국의 첩보기관과 여러 논문, 중국의 문헌에서도 등장합니다.
1949년 7월에 북한으로 간 1만 2천명의 부대는 조선의용군 제1지대, 리홍광지대, 동북야전군 제1병단 독립4사,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구성되었는데 조선인민군 제 6사단 (방호산 사단장)으로 명칭을 바꾸었으며 1948년 8월 북한으로 간 1만 2천명 조선의용군 제3지대, 무딴쟝군구 독립 14단으로 구성된 부대는 조선인민군 제 5사단(리덕산-이름을 바꿈-김창덕 사단장)으로 명칭을 바꾸었습니다. 또한 1950년 1월 연변 지역의 조선족 병사 1만7천명을 중국제 무기로 무장하고 북한에 파병되었는데 다른 조선족 보다 늦게 투입된 이유는 마지막까지 양자 강을 넘어 중국 남부지역에서 내전을 하며 국민당군과 싸웠기 때문이였습니다.
1950년 6월 10일 인민해방군 철도병단의 수천명 조선족부대가 독립단을 편성하고 북한으로 향하였고 전쟁 도중에 북한 장교들이 중국 현지에서 약 5000명의 조선족 군사들을 징집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쟁 중간중간에 소규모의 독립부대로써 입북해서 6.25전쟁을 도운 조선족 군사들(약2천5백명 규모)이 있었습니다. 종합해서 약 4~5만명 규모의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선족 부대가 북한으로 전쟁에 '앞서서' 향했습니다.
요약하면 4~5만명 규모의 조선족 부대가 크게 4차례에 걸쳐서 북한으로 파견되었으며, 중국은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는 다르게 '불가피'하다고 여겨진 미국과의 충돌을 좀 더 나은 전장인 한반도라는 지역에서 이루기 위해 중화사상에 젖은 조선족들을 이용한 것입니다.
한국전쟁 참전 조선족 강홍도 할아버지는 "1946년 4월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인민해방군에 자원 입대했다. 1949년 7월 북한인민군 6사단 3연대에 편입됐고 1950년 9월 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거제도에 수용됐다. 1956년 9월 중국으로 귀국했으나 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이유로 모든 혜택을 받지 못하고 멸시와 홀대를 받으며 외롭고 고통스러운 젊은 날을 보냈다."고 증언했습니다
최기성(87) "연길사범에 다니던 1946년 조선족과 중국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동북인민연군에 자원입대, 1950년 북한 인민군 중위로 참전해 대구-부산간 철도폭파 작전을 수행하던 도중 매복 국군에 기습을 받고 중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파간첩 교관으로 복무하다 1958년 중국으로 귀국했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해 전쟁 당시 싸웠던 곳을 찾아다니면서 말문이 막혔다. 적국이었던 남한은 잘사는 반면, 젊은 날 목숨을 바쳐 싸웠던 북한은 오늘날 굶주림과 가난으로 중국으로의 탈북자들이 늘고 있으니 가슴 아플 뿐이다."
석운하 "참전하고 싶지 않았으나 당시 사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나갔다. 1951년 연길에서 조선족으로 구성된 중공 인민지원군에 입대했으며 이때 함께 참전한 마을동료 13명 중 12명이 전사했다. 강원도 금성에서 조선족 동료들과 함께 미군 3명을 생포해 3급 훈장을 받고 1954년 중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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