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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주성치 1 1211 8 0





거란,여진에 이어 등장한 유목민족의 끝판왕 몽골.



고려중기에는 거란과 여진이 만주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상당히 강한나라였던 금나라를 몽골이 물리치고
가볍게 만주를 정복해버린다.


만주.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이후 만주지역은

만주의 일부를 제패한 몽골
거란과 여진의 유민
금나라의 잔당 군벌
여진이 모여 세운 동진국

등 혼돈의 시기가 온다.





몽골의 인구가 적다보니 
현재 가진영토도 관리가 안되는 상황



그런상황에
도대체 고려를 왜 침략했을까?



이에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몽골의 국력을 기울인 전쟁이었을 것이라는 설과

그냥 만주지방에 있는 몽골 군벌의 침략일 뿐이라는 설로 나뉜다.





유목민족인 거란과 여진에게 

수차례 침공을 받아온 경험이 있는 고려는

이때 어떤 상황이었을까?




칭기즈 칸이 서방원정을 시작할 무렵.


고려에서는 무신정권 끝판왕이었던 최씨 정권이 등장했다.


무신.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혼란스러웠던 1기 무신정권이 끝나고

그나마 최충헌의 무신정권의 시대가 들어와서야

차츰 안정기에 접어드는 고려.



최충헌에게는 무술실력뿐 아니라 
다른 군인들에게는 없던 

정치적 역량이 있었다.


최충헌.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최충헌은 정치적인 개혁도 하고, 사회안정을 도모한다.


허나 아쉽게도

혼란스러웠던 고려 내부사정을 안정시키느라
고려 바깥사정은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고려의 국경지역에서


1225년 몽골 사신 '저고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몽골은 고려의 짓 이라고 생각을 하고,
고려는 금나라의 소행이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는

외교적 수완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그냥 
몽골과의 국교를 단절해버린다.


최씨 정권밑에서 눌려살던 고려의 고종이
엄청나게 공물을 요구하고
준 공물을 최하품이라며 집어던지는 등 갑질횡포를 부리자

그냥 싸우자고 할 정도로 몽골의 횡포가 심했다.

어이.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어이가 없네?
 

고려가 사신 살해에 계속 반박했고
고려입장에서는 몽골이 사신에대해 더이상 별말을 하지 않으니
아예 나서서 대응을 안하고 '나몰라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교에서는 있어서는 안되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장 쳐들어 올것같던 몽골이


한동안 잠잠했다.


(칭기즈 칸의 죽음으로 칸을 선출하러 몽골로 복귀했던 것)



하지만 고려는 한동안 잠잠하니

안심했다.



최충헌이 암살을 두번이나 겪을정도로
내부투쟁이 심했던 무신정권에서

최충헌은 외부에서 전쟁이 나는 것을 꺼렸고

군대를 개경밖으로 내보내려 하지않았다.






1231년 몽골장군 살리타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한다.

고려의 입구였던 의주는 그리 쉬운곳은 아니었으나
(비난할정도로 방어체계가 허술하진 않았던 고려)

몽골에게 몽골식 초토화를 당한다.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의주 코앞까지 올때까지
침략사실을 몰랐다.




농업국가의 치명적 약점.

그것은 징병으로 인해
전시체제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몽고사신의 죽음이후 몽골에대한 대비로

군대를 징발하여 부대를 의주에 모아놨더니

감감무소식인 몽골군 때문에

현지에서 주둔하며 소비만 하는 주둔군에대한 고려주민의 인식이 안좋았던 것이다.
.
.
.
.

' 하... 얘네 언제가냐?'



믿고싶은 것만 믿는 것이 사람의 특성.

이런상황의 지속으로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대외위기는 없다'라고 굳게 믿어버린다.


덜컥.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의주로 들어온 몽골군 장군 살리타.


상시 주둔군이 있었던 의주에는 

조숙창 장군이 사령관이었다.



이 조숙창 장군의 아버지인 조충


거란유민이 고려침략을 했을때, 몽골과 같이 합세해
거란유민을 몰아낸적이 있었고

따라서 조충은 몽골장군과 친분이 생겨 의형제를 맺는다.




이런 인연으로 몽골과 사이가 좋았던 조숙창은


'제가 그 의형제맺었던 사람 아들입니다'라며
몽골에 그냥 항복해버린다.
( ' 조 ' 의 의지? )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죽더라도 버티며
본영에서 대응할 시간을 벌어주는게1차 방어선인데,


그 거란전쟁에서 한번도 안떨어진 흥화진을 포함한 1차 방어선 의주가
전혀 시간을 못벌어주고 이렇게 몽골에 넘어가버린다.


철산.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오히려 그 밑의 철산이 보름간의 처절한 결사항전을 하다 
식량이 떨어진 철산이 몽고군의 악명높은 초토화를 예감하고 전부 자결하며
전멸한다.
(이들이 진정한 전쟁공로자)




철산 덕분에 그나마 고려는 보름의 시간을 번다.



내려오는 몽골군과 고려는 

귀주에서 접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세계 유수의 천혜의 요새를 다 점령하며
최첨단의 공성기술과 전투력을 가졌던


몽골군은
공성전에 도가 터서 정말 귀신같이 잘싸운다.



여기서
살라딘의 예루살렘공방전보다 처절한 사투가 벌어진다.


여몽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성벽이 수차례 무너지고 다시 메꾸고
백병전하는 식으로 반복이 일어나는데

3번 무너진 성벽을 고려군은

한번은 몸으로 막고
한번은 목책으로 막았으며
한번은 쇠사슬로 막았다.


백병전으로 뚫고 들어가려는 몽골을 두번이나 버텨낸 고려.


천하의 몽골군이
성벽이 다시 무너졌는데 백병전돌파를 망설이는 상황.


고려군이 뛰어나가 몽골군을 쳐서 깨트린다.


그 몽골군을 상대로 수성을 하며 버티고, 
심지어는 성밖으로 나가서 싸워 승리한 고려.

사실은 <킹덤 오브 헤븐>의 예루살렘공방전 보다 

이게 훨씬 더 영화같은 전투이다. 




유목민족의 끝판왕 몽골족은 

차례대로 함락시키고 내려왔던 거란,여진족과 달리

여러개의 사단을 뿌려놓고 고려의 동서남북을

호라즘의 전격전하듯이 동시다발적으로 친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적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더
크다고 착각하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고려의 고을들이 쓸려버리자
그래도 고려의 무사계급인 ' 별초' 들이 도망치지말고 싸우자며 귀주에 모였고
싸움을 이 전문가들이 이끌며 승리했던 것이다.

(귀주성에 있던 별초는 원래 50명, 귀주에서 싸움이 일어날때 귀주에 모인 별초는 250명이었다.)




이들을 귀주로 이끌고 들어온 장군중에 한명이 바로


'김경손' 장군이다.


무신2.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귀주에서 김경손 장군은 본인과 12명의 별초만을 데리고 나가

몽골군에 단독기습을 가한다.



적의 기세를 꺾기 위해 먼저 김경손 장군은,

활을 들고 말을 타고 달리며 


적의 기수들을 한명씩 저격한다. 


활.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깃발을 들고 있는 몽골군의 기수가

영화처럼 한명씩 쓰러져 나갔다.


기수가 쓰러지자 혼비백산 하는 몽골군.


활을 잘쐈던 몽골조차 놀라는


양궁.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차원이 다른 고려의 활솜씨


고려말의 야사에 이런 이야기도 있다. 

원나라에 활쏘기대회에 참가한 고려의 제일궁.
몽골의 제일궁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원나라 황제가 
'어떻게 생긴 팔뚝이기에 이리도 활을 잘쏘느냐 '라며 
팔뚝을 만져봤다는 일화가 있다.


그 고려의 제일궁이 이성계와 활실력을 겨뤘더니

막상막하 였다고 한다.

태조.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태조 당신은 도덕책...)



이런 김경손 장군의 전술안과 전략에
나머지 별초들도 가세하기 시작하여 

몽골과 고려의 기동전이 시작되는데,

스피드를 앞세운 기동전의 강자 였던 몽골을


고려가

스피드로 그냥 짓밟아 버린다.


그리고는 

김경손과 12명의 별초들은 성안으로 생환한다.
(주모!!!!!!!!)



김경손의 일대기는 영화 <킹 아서>와 비슷하다고 한다.

의주 주변에 살았던 김경손과 12별초는 몽골에 항전하러 의주로 갔으나
의주는 몽골에 항복하고 성문을 안열어주고 돌아가라고 한다.
거기서 7일간 굶으며 행군끝에 귀주로 간신히 들어온 김경손 장군과 12별초.
그곳에 모인 200명 정도의 별초들에게
김경손 장군은 '너희는 일반 용사가 아닌 별초다 나가서 같이 싸우자'라고 독려하지만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다. 이런상황에서 같이 싸우겠다며 따른 별초는 12별초 뿐이었고,
이들이 나가서 성과를 거두자 호응했던 것이
앞서 얘기한 몽골과의 남문방어전이다.



린정.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평소 김경손장군을 높이 평가 하지 않았던 귀주성 사령관 박서 장군.

이 귀주성의 승리에 귀주성 총사령관 박서 장군은
눈물을 흘리며 김경손 장군에게 큰 절을했다고 한다.


김경손장군의 형이 최충헌의 최애 심복일 정도로
빽이 있었음에도 김경손 장군은
최전방의 작은성의 장군으로 발령받지만, 거기에서도
목숨을 건 전투를 하며 몸 사리지 않고
헝그리정신으로 싸운다.

두차.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재차 대군으로 공격해온 몽골군.

몽골은 땅굴파는 최첨단 기계 '두차'를 동원했지만, 
고려는 기다렸다 무너뜨려 몽골군을 생매장시키고,
썩은풀을 던져 공성탑을 불태우며 격렬히 버틴다.


여기서 그 바그다드를 함락했던 몽골이

귀주를 무너뜨리지 못하고 결국 물러난다.
(그 어려운걸 고려가 해냅니다.)


대신 귀주 주변의 성들을 쓸어버리는 몽골.


몽골은 버티는 귀주를 버려두고 우회해 수도로 진격해버린다.




수도 개경에 나타난 몽골대군에

고려의 조정은 뾰족한 방법이 없다며 강화를 요청한다.



몽골장군 살리타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항복하는 고려.
거기에 더해 귀주성에도 항복하라며 전갈을 보낸다.

망연자실하는 귀주군.
그들은 전투는 이겼지만, 전쟁은 졌다.



그래도 약속은 잘 지켰던 몽골군은 항복하면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몽골군은 잘싸우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은근한 우대와 존경심이있었다.

항몽.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어쩔수없이 항복한 귀주군의 장군과 별초, 병사,주민들을 
몽골은 해끼치지 않고 고이 보내준다.

귀주말고도 버텼던 고려의 자주성에서도 이런방식으로 항복을 하라는 전갈을 보내는데,
자주성은 고려조정에 불복종하고 버틴다.

화난 고려 조정은 불러다 명령불복종으로 사형시키려고 하는데,
그걸 보고 사정을 듣게된 몽골 사신은

'적인 우리도 살려주는데 너희나라에서는 충성스러운자들을 왜 죽이려 하냐'며 만류하여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



 
아무튼 고려는 몽골에 항복을 하게 되는데,
이 때의 항복은 우리가 아는 항복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이게 몽골의 고려침략의 목적이 애매한 이유중 하나이다.


몽골은 약탈의 목표치를 설정해두고 
상대가 항복하여 목표치의 50퍼센트의 공물을 바치면 
나머지 50퍼센트는 털고 가는 식이었다.


즉, 돈이 목적이지 지배는 아니었던 상황.

몽골은 항복을 받아내고 물러나지만,



조정이 감당못할수준의 무리한 공물 요구를 계속하는 몽골때문에

고려는 피폐해져 갔다.


거기에 돌아가며 감독관을 개경에 두고가 
고려는 이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이 지속되자 결국 몽골과 싸움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고려 조정은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다.




'그들은 타지에서 오래 주둔하며 약탈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태풍을 막을수없다면 피하면 될 것 아니냐 '

'적어도 시간은 벌 수 있다.'

라고 생각한 최우
전략적으로 수도를 천도한다.

전략적,정치적 능력은 좋았던 최우였다.
(수도가 안전해야 통제를 하니까)

강화도.JPG [외전] 칭기즈칸 외전 몽골의 고려침략. 여몽전쟁 -1-

 
그리고 그 천도의 의미는 '몽골에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강화도는 방어에 유리했다. 

서해는 리아스식 해안이라 해안선 또한 복잡하고, 
말이 싫어하는 갯벌 진창 지대가 많았다.
물살이 빨라 조류가 맞지않으면, 옛날배로는 못건너갔고
이때의 강화도에는 산봉우리 처럼 높은 지형도 있었다.

(지금의 강화도의 넓은 땅은 간척한 것이다.)



따라서  강화도를 쳐들어오려면 근처에서 배도 만들고 
상당기간 준비를 해서 와야했던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털러 다니지, 굳이 그런수고를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최우가 예상했던 것.



거기에 더해 강화도는 바닷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고려의 각 군현과 정보교환이 가능한 지역이었고, 육로가 막혀도 바닷길로 세금을 걷는 것 또한 가능했다.


강화도로 수도를 천도 한 것 자체는
고려의 지휘부로써 옳은 전략적 판단이었다.




고려의 강화도 천도가 몽골에 알려지자 

몽골이 괘씸히 여겨 








2차 침공을 시작하게 된다.







-2편에 계속

1 Comments
대깨문 2019.01.22 10:45  
주혁이형 나왔던 무신 다시 보고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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