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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3 vs 1 (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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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대 공포게시판 손에꼽는 명작가 k12kb님 작품을 퍼왔습니다.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fear&st=name&sk=k12kb&searchday=all&pg=0&number=46859) 


오싹한 전율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재성은 날이 밝자 209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한참을 두드리자 문이

열리고 한순경이 나왔다. 떡진 머리에 부스스한 얼굴로 그가 재성을 쳐다본다.

"할 얘기가 있습니다"

재성은 그의 방에서 간밤에 있었던 일은 모조리 털어놓았다. 졸린 표정으로 듣던 그의 표정이 시간이 지남

에 따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니군요"

재성이 입을 열려던 찰나 한순경이 가로챘다.

"잡읍시다, 증거가 없으니 현장에서 잡아야합니다"

재성이 마른침을 삼키며 되물었다.

"어떻게요?"

"범인들 잡는덴 잠복이 최곱니다...이따 저녁에 작가님 방으로 몰래 가겠습니다"

재성의 몸 안에서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재성이 책상 앞에 앉았다. 밤을 꼬박

샜지만 정신은 또렷했다. 문득 종이와 펜이 시선에 잡혔다. 기이한 충동에 재성이 펜을 들고 글을 써내려가

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구성에 머리를 짜냈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소재를 옆에 두고도 

먼 곳만 쳐다봤다. 하루종일 글을 쓴 재성이 마침내 펜을 내려놓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이었다. 잊고 

있었던 공복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주방으로 가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한순경이 올 시간이 가까웠기 때

문이다. 십분도 지나지않아 한순경이 왔다. 경찰봉과 수갑을 준비한 채 그가 재성의 방으로 들어왔다. 나머

지 손에는 쟁반이 들려 있었는데, 몇가지 과일과 과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준비 끝났어요"

시간은 아직 멀었지만 재성은 벌써부터 흥분되기 시작했다. 재성이 침대에 앉자 한순경이 의자에 앉았다.

"작가님은 애인 없으세요?"

그의 말에 재성이 멈칫거렸다.

"없어요, 그러는 순경님은요?"

"저도 없어요, 사실 있었는데 헤어졌어요.."

"어쩌다가.."

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진다.

"제가 5년째 순경이거든요..근데 그 친구 아버님이 경찰 간부세요"

"그럼..."

"네...진급도 못하고 있으니까 반대했나봐요"

"저런"

"노력해도 잘 안되네요, 시험 운도 형편없구요"

그의 표정에 단호한 뭔가가 서렸다.

"만약 오늘 그 놈 잡으면 희망이 있어요, 칼이라도 들고 있으면 바로 구속입니다"

"그렇군요"

재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물었다.

"근데 작가님은 여기에 무슨일로 오셨나요?"

깜빡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 기묘한 골목이라고 아세요?"

"기묘한 골목요?"

"네"그가 잠시 생각에 잠긴다.

"아뇨, 처음 듣는데요"

"세명이 살해 당하고 두명이 자살했다던데.."

"아, 거기 말하는 구나"

그제야 이해한 듯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가까워요, 근데 거긴 왜요?"

"제가 잡지에 글을 싣거든요...이번에 싣게 될 대상이 그 골목이라서요"

"흐음"

그의 표정이 기이한 빛을 띤다.

"거긴 위험해요, 웬만하면 가지 마세요"

"네? 많이 위험한가요?"

"아직 범인도 안 잡혔고, 아무튼 기분 나쁜 곳이예요"

재성이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꼭 가야 되는데...취재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렇게 안 좋은가요?"

"사실 사건은 육개월도 전에 일어났어요, 거기가 원래 우범지역이거든요. 원래 안 쓰던 골목인데 사건 후에

는 아예 시멘트로 막아놨어요, 못 지나가게 하려구요"

"아, 네.."

"사실 지금도 사람들이 몰래 지나다니긴 해요"

"그런가요?"

"네, 거기가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지름길이거든요"

"저기, 궁금한게 있는데 그럼 희생자들은 어떻게 죽었죠?"

재성이 궁금한 점을 빠트리지 않고 질문했다. 이참에 그곳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얻을 속셈이었던 것이다.

한순경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자세하게 답변해 주었다.

"미국 할렘가 아시죠? 거기서는 강도들이 무조건 총부터 들이밀어요. 재수없이 걸리면 몽땅 털리는 거죠,

근데 거기선 불문율이 하나 있어요. 총을 들이밀면 절대로 뒤돌아 봐선 안돼요. 앞으로 쳐다보면서 잽싸게 

지갑만 건네줘야 무사할 수 있어요"

"그건 왜죠?"

"자신들의 얼굴을 쳐다보면 바로 총을 쏴버려요, 후환을 대비하는 거죠. 가끔씩 교민들이 멋도 모르고 뒤돌

아보는데 열에 아홉은 시체로 변하죠. 내 돈 뺏아간 놈이 누군지 억울해서라도 쳐다보는데 그러면 얼굴 한

번보고 그냥 골로 가는거죠"

"아.."

"그 골목도 비슷해요, 돈 달라고 했을 때 돈만 주면 되는데, 그러면 돈만 잃으면 그만인데, 꼭 뒤돌아 봤다

가 개죽음 당했죠. 세 명다 그렇게 죽었어요. 근데 정말 가실 거예요?"

"네...잠깐이면 됩니다. 안보고 글을 쓸 순 없거든요"

"언제 갈건데요?"

"일요일날 갈 예정입니다. 다른 날보다 덜 위험하겠죠"

"가실거면 오전에 가세요, 해진 이후엔 무조건 안되고 오후도 위험합니다"

"그럴 생각입니다"

말을 하던 재성의 배에서 갑자기 꼬르륵 소리가 튀어 나왔다.

"배고프신가봐요?"

"네, 저녁을 굶었더니..."

"이거라도 깎아 드세요"

그가 과일쟁반을 내밀었다. 사과 몇 개와 배가 담겨져 있었다. 재성이 과도를 들어 사과를 깎기 시작하자

그가 말없이 지켜본다. 깎은 사과를 먹기 좋게 썰자 한순경이 하나를 집어들었다.

"벌써 열 시네요"

그의 말에 시계를 보자 정말로 열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니 시간이 지나가 있었다. 썰

었던 사과를 먹고 나자 뱃속이 한결 나았다.

"한시쯤이라고 하셨죠?"

"네, 두 번 다 그쯤이었어요"

남은 과일을 모조리 비우자 긴 침묵이 흘렀다.

"검은집 보셨어요?"

시계가 열두시를 넘겼을 때 한순경이 입을 열었다.

"영화 말인가요?"

"아뇨. 기시유스케의 원작소설요"

"물론이죠,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예요. 한순경님도 읽어 보셨나요?"

"네, 근데 그 소설에 나오는 사치코 있잖아요. 마음이 없는 사이코패스"

"네, 후우 정말 무서운 여자입니다. 마음이 없으니 그런 짓도 할 수 있겠죠"

"저는 사치코가 예외적인 경우라고 생각해요"

"무슨 말이죠?"

재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직업이 이 짓인지라 거기에 대해 연구해 본 적이 있죠"

"그래요?"

"경찰학교 시절에 꽤 깊이 탐구했었습니다. 제가 결론 내린 사이코패스는 사치코 같은 부류가 아니예요, 오

히려 반대라고 할 수도 있죠"

"반대라뇨?"

"사치코에겐 적어도 목적이 있었어요, 보험금이라는 목적이 있으니까 그런 행동을 한 것이죠. 만약 보험이

란 제도가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사람을 죽이진 않았을 겁니다"

"그럼 순경님 말은..."

"네 맞아요, 제가 내린 사이코패스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진정한 사이코패스에겐 아무런 목적이 없어요. 살

인을 즐기는 사이코도 아니고 충동적인 정신질환은 더더욱 아닙니다"

"....."

재성이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냥 죽여요, 말 그대로 그냥 죽이는 겁니다. 온갖 목적들에게서 완전히 자유로운 영혼. 그것이 진정한 사

이코 패스입니다."

"한가지 의문인게 사람을 죽일 때 과연 아무런 동기도 못 가질수 있을까요? 본인도 모르는 최소한의 감정

매커니즘이 작용했기 때문에 죽인것이 아닐까요?"

"작가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제 이론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사이코 패스를 말하는 겁니다. 물론 사치

코도 사이코 패스가 맞습니다. 헌데 전 좀 더 학문적으로 다가가고 싶었거든요"

재성이 말이 없자 그가 마지막으로 말을 뱉었다.

"숨쉬는 거랑 똑같아요, 숨쉴 때 아무런 생각이 없잖아요. 물론 살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다고 할 수도 있

지만, 그렇게 따지면 그들에겐 상대방의 생체기능을 정지시키는 것이라는 목적이 있는 겁니다"

재성이 뭐라 반문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순수한 사이코 패스라...어디까지나 한순

경 자신의 이론이었다. 물론 커다란 사이코 패스의 범위 안에는 그들이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재성의 생각

은 달랐다. 적어도 숨쉬듯 죽인다는 표현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시군요, 준비하세요"

한순경의 말에 재성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화에 집중하다 보니 본래의 목적을 까맣게 잊고 잊었던 것이

다. 둘의 시선이 조용히 문고리에 향했다. 한순경이 의자에서 일어나 경찰봉을 꺼내들었다. 당연한 말이지

만 문은 잠그지 않은 상태였다. 만약을 대비해 재성도 과도를 쥔 채 그의 옆에 섰다. 딱딱하게 굳은 한순경

의 옆얼굴이 재성의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시계가 

두시를 가리켰지만 둘은 방심하지 않았다. 마침내 시계가 세시를 가리켰을 때 한순경이 들었던 경찰봉을 내

려놓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안 올 모양이군요”

그의 말에서 허탈함이 느껴졌다. 말은 안했지만 언짢은 기분도 들었으리라. 재성은 자신 때문에 헛고생을

한 그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죄송합니다, 괜히 저 때문에...”

“괜찮아요,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냈잖아요”

한순경이 돌아가자 재성의 기운도 쭉 빠졌다.

재성은 더 이상 문고리에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상대가 누구든 내버려두기로 했다. 문은 철저히 잠

갔지만 더 이상 새벽에 일어나지는 않았다. 기묘한 골목길을 방문 할 때까지 글쓰기에 전념하기로 했다. 고

시원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연쇄살인사건. 재성 자신이 주인공이었고, 고시원 어딘가에 살인마가 숨어있다.

밤이 되면 살인마가 활동을 시작한다. 슬며시 방문을 열어보/지만 전부 잠겨있다. 살기에 눈빛이 번뜩 거린

다. 마침내 잠기지 않은 방을 발견했다. 들어가 보니 여자가 엎드려 있다. 머리위로 식칼이 번쩍 들린다.

“재미없군”

갈증을 느끼자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들었다. 남아있는 물을 전부 마셨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감질

맛만 남긴 채 물통이 텅 비어버렸다. 복도로 나오자 누군가 재성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70대는 족히 넘은

노인이었는데, 관자놀이 부근에 검버섯이 자라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노인이 계속 다가오자 재성

이 슬쩍 말을 걸었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노인은 재성의 코앞까지 온 채 열쇠로 문을 열었다. 노인은 옆방에 묵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이 들어가 버

리자 머쓱해진 재성이 주방으로 향했다. 물통에 물을 채운 뒤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은 텅 비어있었고, 

재성은 담배를 붙여 물었다. 담배를 반 쯤 태우자 구석에 떨어진 열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에 떨

어뜨린 듯 시커먼 때가 잔뜩 묻은 열쇠였다. 담배를 다 태운 뒤 다시 방으로 갔다. 오후 내내 글을 쓰고 저

녁이 되자 재성은 고시원을 나섰다. 편의점에서 담배와 컵라면을 사서 나오던 중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한

순경이 손에 조그만 박스 하나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한순경님”

“정작가님 아니세요, 뭐 사러 오셨나봐요”

“네, 퇴근하는 길이세요?”

“아뇨 오늘은 비번이예요”

재성과 한순경이 고시원으로 들어섰다.

“운동 하실래요?”

재성이 비밀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한순경이 물었다.

“무슨 운동요?”

“줄넘기요”

재성이 선뜻 수락했다. 별로 하고 싶진 않았지만 한순경의 부탁을 거절하기 싫었던 것이다. 옥상에는 아무

도 없었고, 어둑한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한순경이 들고 있던 박스를 열자 MP3가 보인다. 이어폰을 귀

에 꽂고는 전원 버튼을 누른다. 그가 줄넘기를 시작하자 재성이 구경했다. 쉬지도 않고 10분정도를 뛴 그

가 재성에게 줄넘기를 내민다.

“들으면서 하세요”

MP3 마저 재성에게 내준다. 이어폰을 꽂자 강렬한 비트가 고막을 때린다. 볼륨 버튼을 눌렀지만 먹히지 않

았다. 하릴없이 그 상태로 줄넘기를 뛰었다. 쿵쿵거리는 드럼소리에 앵앵거리는 전자기타소리가 묘하게 어

울린다. 박자에 맞춰 줄넘기를 뛰다보니 어느새 숨이 가빠왔다.

“하악..힘들어 하...못하겠네요”

한순경이 씨익 웃으며 줄넘기를 건네받는다. 그가 다시 줄넘기를 시작하자 재성은 조용히 옥상을 내려왔

다. 오랜만에 유산소운동을 하자 숨쉬기가 힘들었다. 자신의 방문 앞에서 재성이 주머니를 더듬었다. 한참

을 더듬거려도 찾는 것이 만져지지 않았다.

‘젠장’

열쇠가 없었다. 재성이 인상을 쓰며 왔던 길을 되짚어 나갔다. 편의점부터 해서 샅샅이 훑으면서 걸었다.

이미 밤이었지만 가로등 때문에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옥상으로 올라가자 자신을 지나쳐 내려가는 작업복

남성이 보였다. 안쪽에선 한순경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 하하, 그 자식 사고 한 번 칠 줄 알았다”

옥상을 꼼꼼히 살폈지만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재성이 무언가를 찾자 한순경이 통화를 멈춘 채 물어본다.

“뭐 찾으세요?”

“아...열쇠를 떨어트렸어요..아무리 찾아도 없네요”

“저런...잘 한번 찾아보세요”

한순경이 멈췄던 통화를 계속한다. 아무리 찾아도 없자 재성이 한순경에게 다가갔다.

“이런 아무데도 없군요"

한순경의 얼굴이 약간 굳어진다.

“그러고 보니 김근치 그 사람이 좀 전에 왔다갔어요”

본능이 위험하다고 신호를 보내왔다. 작업복 차림의 사내를 떠올리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후다닥 내려와 카운터로 갔다. 총무가 자장면 한 그릇을 비비고 있는 중이었다.

“누가 열쇠 맡긴 거 없어요?”

총무가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대답한다.

“몰라”

“확실하게 대답해봐 있어, 없어?”

재성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제야 총무가 고개를 쳐든다.

“왜 남 자장면 먹는데 와서 행패야?”

정상적인 총무의 태도가 아니었다. 총무의 말투엔 재성을 업신여기고 깔보는 듯한 뉘앙스가 짙게 풍겼다.

“제대로 말 안하면 그 자장면 다 먹은 줄 알아, 농담 아니야”

총무의 뱁새눈이 크게 째진다. 한마디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문다.

“좀 전에 누가 열쇠 갖고 왔어”

재성이 빠르게 되물었다.

“작업복 입은 아저씨 맞지?”

“그래, 자 열쇠 여깄어. 이제 방해 하지마”

재성이 열쇠를 받아 쥐자 총무가 창문을 닫아 버렸다. 열쇠엔 흙이 잔뜩 묻어 있었고 군데군데 녹까지 슬어

있었다. 재성이 다시금 창문을 열고 소리를 쳤다.

“이거 말고 내 방 열쇠 말야”

잘 버무린 면발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행동이 멈췄다.

“그거 밖에 안 받았으니까 직접 가서 물어보든가..”

총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화가 났다는 증거다. 총무의 모습에 재성의 기분이 약간 풀렸다. 생각 같

아선 더욱 몰아치고 싶었지만 이쯤에서 마치기로 했다.

“내 방 열쇠가 없어졌어, 비상으로 있는거 내줘”

“키 보증금 이만원 내놔”

“뭐?”

“키 보증금 몰라? 열쇠 잃어버리면 돈 내야 해 돈”

재성은 부글거리는 속을 억누르며 이만원을 꺼내주었다.

방으로 와서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었다.

‘온통 미친놈 투성이다’

재성은 골목에 들렀다가 이곳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자신의 정신도 이상해 질 것 같았

다.





일요일이 되자 재성이 아침부터 준비를 마쳤다. 디지털 카메라와 필기구를 챙겼다. 오전 열시가 되자 재성

이 건물을 나섰다. 편의점 아줌마에게 물어서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주택사이를 꼬불꼬불 걸어가자 파

란색 대문이 보인다. 눈앞에 보이는 한옥집 뒤편으로 좁은 골목이 나있었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꼬마 애들

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쉴새없이 울려댄다. 개똥들을 피해서 조금 걸어가자 우측에 시멘트벽이 나타났다. 재

성의 키만한 시멘트벽에는 온갖 음란한 낙서들이 새겨져 있었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재성이 담으로 다가갔

다.

“으차”

기합소리와 함께 힘껏 도약했다. 담벼락 위로 한쪽다리를 걸치자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쿠웅”

담을 내려오자 눈앞에 골목이 펼쳐졌다. 골목은 주택단지의 뒤편 담벼락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골

목이 아니라 우연하게 생겨난 길쭉한 공간이었다. 주택들에 가려져 온통 그늘이 져있었다. 천천히 걸어가

자 골목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담벼락 아래쪽에는 조그만 배기관들이 튀어 나와 있었는데, 그곳으

로 구정물이 흘렀다. 담벼락과 맞닿은 지면에는 온통 이끼가 껴 있었고, 곳곳에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 

조금 더 들어가자 상황은 훨씬 심각했는데 휴지나 과자봉지부터 해서 음식물 쓰레기까지 범벅이 되어 있었

다. 실제로 냄새가 느껴진 건 아니지만 무의식적으로 코를 막았다. 쓰레기들을 피해 걷다 보니 어느새 끝

이 보였다. 반대편 역시 시멘트벽으로 막혀 있었는데, 들어온 곳보다 훨씬 높았다.

‘별거 아니잖아’

재성은 약간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본 골목은 음습하고 더러운 공간에 불과했다. 사진을 찍기 위

해 카메라를 눈앞으로 가져간 순간 무슨 소리가 들렸다.

“다다닥”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재성의 눈앞에 빛이 번쩍했다. 강한 충격에 서있던 자세 그대로 나자빠졌다.

손으로 눈을 감싸자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왔다.

“퍽 퍽..퍽”

재성의 머리로 강한 충격이 연이어 가해졌다. 재성이 몸을 웅크린 채 벽으로 기어갔다.

“아악, 지갑 여기있어요”

재성이 주머니를 뒤져 미친 듯이 지갑을 꺼냈다.

“악, 그만 때려요”

상대는 아랑곳 하지 않고 재성을 가격했다. 관자놀이와 귀를 집중적으로 때렸는데, 나중에는 머리 전체에

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댔다. 한참을 때리던 상대가 움직임을 멈췄다. 재성의 얼굴에서 흘러내린 피가 구정

물과 섞여 검붉은 색을 만들어 냈다. 상대가 재성이 던져 놓은 지갑을 들었다. 재성은 몸을 웅크린 채 눈

을 꼭 감고 있었는데, 고통과 공포로 전신에 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고막이 터졌는지 귀에서 수십 마리

의 모기가 달려드는 소리가 났다. 한참을 웅크리고 있던 재성이 실눈을 뜨고 지면을 바라봤다. 상대의 신발

이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눈을 뜨고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 사라졌는지 골목에는 재성뿐이었다.

“하아...”

욕도 나오지 않았다. 저만치 떨어진 카메라를 줍고서 몸을 일으켰다. 얼굴 전체가 맨소래담 이라도 바른 듯

이 화끈거렸다. 어떻게 고시원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이 없다. 자신의 방앞에 도착했을 때 겨우 정신이 들었

다. 방문을 열자 종이 하나가 나풀거리면서 떨어진다. 종이를 주워보니 메모지였다. 손바닥만한 종이에 글

씨가 써있었다. 흐릿한 눈을 비비고는 내용을 확인했다.

-당신의 방문을 여는 사람을 알고 있소, 진실을 알고 싶다면 찾아오시오. 219호-

219호라면 자신의 옆방이었다. 검버섯이 피어있던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장 고시원을 떠날 생각이었

던 재성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떡하지... 정말 알고 있는 걸까...’

궁금했다. 이대로 떠나버리면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이었다. 재성이 자신을 설득했다.

‘아무일 없을 거야...상대는 노인네라구’

재성이 옆방의 문고리를 쳐다본 채 심호흡을 했다.

“끼릭”

문을 열자 시커먼 어둠이 쏟아진다. 열린 방문 사이로 방안의 구조가 희미하게 보였다. 노인은 의자에 앉

은 채 뒤돌아 있었는데 재성이 들어오자 입을 열었다.

“문을 닫으시오”

바리톤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고막이 윙윙거리는 탓에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지만 무척이나 깨끗한 목

소리였다.

“철컥”

문을 닫자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잠식했다.

“방문을 연 사람이 누구입니까?”

재성이 묻자 노인이 대답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목격했소,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보았소”

굵은 목소리가 방안 전체에서 울렸다. 나이에 비해 성량이 대단한 노인이었다. 노인의 목소리가 재성의 귀

에서도 한동안 울려댔다.

“그게 누구죠?”

재성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노인은 대답이 없었다.

“말해주세요, 누구를 보셨죠?”

잠시 침묵하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총무요”

재성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면서 분노가 치솟았다. 내심 작업복 남성으로 단정했었는

데 뜻밖이었다. 뱁새 눈깔을 치켜든 채 반말을 내뱉던 총무가 떠올랐다. 온몸을 휘감고 돌던 분노가 마침

내 적개심으로 변했다.

“나한테 들었다는 사실은 비밀이오”

“알겠습니다”

재성이 이를 갈면서 방문을 열었다.

노인의 방을 빠져 나온 뒤 곧장 총무를 찾아갔다. 현관으로 나가자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총무의 모습이 보

였다. 신발을 신고 문을 확 제꼈다. 총무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자 어느새 저만치 앞에 걸어가고 있다.

‘병/신 같은 새끼가 나를 놀렸다 이거지’

총무가 방향을 틀어 편의점 옆의 샛길로 빠진다. 재성은 으슥한 곳에서 그를 패버릴 생각이었다. 굵은 나뭇

가지 하나를 주워들고 호시탐탐 기회를 살폈다. 총무는 샛길을 나와 다시금 대로변을 걸었는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총무가 아파트 공사현장 쪽을 향하자 재성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휴일이라 공사현장엔 아무도 없었고 총무와 재성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총무가 철근을 쌓아놓은 모퉁이로

들어가자 재성이 나뭇가지를 단단히 잡았다. 소리라도 지르며 달려가려는 순간 말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대단하세요, 어쩜 이렇게 완벽하죠?”

“하하...과찬입니다, 은미씨야 말로 완벽히 아름다워요”

“호호호”

재성은 모퉁이에 붙어선 채 고개를 내밀었다.

‘헉’

충격적인 장면에 재성이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모퉁이 너머에는 여자 둘과 총무가 있었는데, 여자들은 모

두 재성이 아는 사람들이었다.

‘이럴수가...’

은정이 돌바닥위에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은미가 총무와 웃으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무표정한 은정의 얼굴을 보니 그 날의 악몽이 떠올랐다. 한줄기 공포가 엄습하자 주체할 수 없이 전체로 확

산됐다.

‘저들이 도대체 어떻게...’

허겁지겁 공사장을 빠져나오며 재성이 고민했다. 총무에 대한 분노는 달아난 지 오래였다. 총무는 문제가

아니었다. 저 자매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겉으로는 부정했지만 본능이 쉴새없이 속삭였다.

‘널 죽이러 온거야’

자신의 위치를 묻던 은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은정을 퇴원 시킨 걸까?’

재성은 문득 자신이 착각 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은정은 애초에 정신병원으로 가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

다. 하나가 해결되자 또 하나가 고개를 쳐들었다.

‘여긴 어떻게 알아냈지?’

동식을 생각해 보았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은정은 동식의 존재를 전혀 모른다. 잡지사에 글을 연재한 사

실조차 꺼낸 적이 없었다. 재성은 침착하게 이동했다. 무릎이 휘청거렸지만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넘어질

수는 없었다. 걸으면서 머리는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동식을 제외시키자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핸드폰

은 오래전에 꺼두었고, 아무에게도 이곳 얘기는 꺼낸 적이 없었다.

“빠아앙”

덤프트럭 한 대가 날카로운 경적소리를 울리며 지나갔다.

‘아뿔싸’

순간적으로 팩스용지가 떠올랐다. 자신의 아파트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온 그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열

쇠가 은정에게 있었으니 그것을 발견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이곳으로 온 뒤 은미가 총무를 유혹했을 것이

다. 안봐도 뻔했다. 멍청한 총무놈은 멋도 멋도 모르고 동조했겠지. 재성은 자신의 미련스러움을 탓하면서 

부지런히 걸었다. 드디어 목적지가 눈앞에 드러났다. 열 평 남짓한 그곳 주차장에는 순찰차 한 대가 세워

져 있었다. 한순경이 근무하는 은곡 제2지구대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경찰관 두명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

다.

“한순경 있나요..”

“무슨 일이시죠?”

중년의 경찰관 한명이 재성에게 다가왔다. 재성이 입을 열려는 순간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한순경이 의아

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 분이 자네를 찾던데 아는 분인가?”

경찰관의 말에 한순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들고 퉁퉁 부은 재성의 얼굴을 보자 그의 표정이 안쓰

럽게 굳어진다. 그가 재성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재성을 벤치에 앉힌 뒤 자판기에서 우유 두잔을 뽑아온

다.

“대체 무슨 일이죠? 얼굴은 누가 그랬어요?”

우유를 한모금 마시자 입안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우유를 옆에다 내려놓고는 재성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열흘 전부터 일어난 일들을 빠짐없이 털어놓았다. 은정부터해서 은미까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몽땅 얘기하

고 나자 한순경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세상에...”

재성은 그의 표정이 이해가 갔다. 자신도 믿지 못할 일들이었다.

“잠깐만 기다리세요, 신고 접수하고 올게요”

한순경이 지구대 안으로 들어갔다. 출입문 너머로 그가 동료 경찰관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됐어...이제 다 해결 될거야”

출입문이 열리고 한순경이 밖으로 나왔다.

“지금 곧장 고시원에 가 계세요, 지금 모두 출동할거니까 여기도 위험해요”

재성이 반쯤 부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가셔서 문 꼭 잠그고 계세요, 체포하는 즉시 그리로 갈게요”

“알겠어요..”

재성이 힘없이 대답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돈이 없었다. 가방도 고시원에 있고,

그들이 체포되면 진술도 해야 할 것이었다. 한순경이 다시 지구대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재성이 그곳을 빠

져 나왔다. 붓기 때문에 시야가 많이 제한되었지만 주위를 꼼꼼하게 살피면서 고시원으로 돌아왔다. 혹시

나 싶어 카운터를 살폈지만 총무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들이 체포되길 바랄 뿐

이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재성이 문을 굳게 잠갔다. 수납장을 눕혀 문 앞을 가렸다. 냉장고의 코드를 

뽑은 뒤 수납장 위로 올렸다. 하나의 가능성도 허용해선 안된다. 문앞을 꽁꽁 막고 나자 불안감이 조금은 

가시는 듯 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계가 저녁 일곱시를 가리켰을 때 노크

가 울렸다.

"저예요 정작가님“

한순경의 목소리였다.

“잠깐만요”

냉장고를 밀어내고 수납장을 일으켜 세우자 문을 열 수 있었다. 한순경이 방안의 광경을 보고 무겁게 고개

를 끄덕인다.

“잡았나요?”

“그게...종적이 묘연합니다, 공사장에도 없고 근처에도 없어요”

“그럴리가요...”

재성의 입에서 실망스러움이 묻어 나왔다.

“걱정말아요, 곧 잡을 테니까. 지금 본서에서도 형사들이 출동했어요. 몽땅 돌아다니면서 수색 중이예요”

“그렇군요”

조금은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서서히 범위를 좁혀 가고 있으니 한 시간 안으로 어떻게든 결론이 날겁니다, 한 시간만 더 숨어 계세요”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여기 말고 제방에 가 계세요, 총무놈이 열쇠를 갖고 있을 수도 있어요”

“아, 듣고보니 그렇군요”

“그럼 한 시간 후에 봅시다”

한순경이 따뜻한 눈빛을 건네고는 이내 뒤돌아 나갔다. 후다닥 뛰어가는 그를 보며 재성도 복도를 가로 질

렀다. 한순경의 방 앞에 도착하자 지체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처척”

하지만 무엇인가에 막힌 듯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이런...’

방문이 잠겨 있을 거라곤 도저히 생각하지 못했다. 한순경 역시 실수했던 것이다. 꼼꼼하게 챙길 정신이 둘

에게는 부족했던 것이다. 다시금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계속 있으려니 찝찝했다. 잃어버린 열쇠와 함께

총무의 신경질 부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새끼가 갖고 있어‘

의심은 점차 확신으로 변했다. 잠시나마 작업복 남성을 의심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두 번 당할 수는 없었

다. 성큼성큼 걸어서 중앙복도로 다가갔다. 벌써 이십분이나 흘러 있었다. 이제 사십분만 숨어 있으면 상황

은 종료될 터였다. 노크도 않은 채 방문을 열었다. 여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알몸으로 엎드려 있었다.

‘더 이상의 실수는 없다’

문을 잠그고는 창문을 닫았다. 이 소란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않는다. 그녀의 매끄러운 굴곡이 시선에

들어왔다. 움푹 들어간 허리에 비해 유달리 엉덩이가 탱탱하다. 새삼 그녀의 몸매가 완벽하게 느껴졌다. 생

고무 같던 그녀의 생식기가 떠올랐다. 어릴 때 좋아하던 곶감의 감촉과도 비슷했다. 죽어있던 페니스가 어

느 샌가 고개를 쳐들었다. 재성이 한점의 망설임도 없이 하의를 벗었다. 옷을 벗고 나자 오일이 떠올랐다. 

자신의 책상 한쪽에 곱게 모셔둔 그것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그녀의 화장품 하나

를 집어 들었다. 다시 옷을 입기가 싫었다. 옷을 입고서 자신의 방으로 가는 건 더욱 꺼림칙한 일이었다.

로션을 손바닥에 대고 거칠게 찍어 내렸다. 쉬지 않고 찍어대자 한손 가득 하얀 덩어리들을 뽑아 낼 수 있

었다. 손바닥을 포개어 덩어리를 나눈 뒤 그녀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손끝을 대는 순간 익숙한 차가움

이 전해져 왔다. 예상대로 그녀의 몸은 공기보다 차가웠다. 골고루 바른뒤 자신의 물건에도 마저 발랐다.

“물컹”

처음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에게는 시간이 없었고, 얼른 정상에 올라야 했다. 재성의 허벅지와 그녀의

둔부가 부딪히면서 철썩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성의 몸놀림이 빨라질수록 철썩대는 소리대신 질퍽한

요분질 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흐윽...”

마지막 한방울까지 그녀의 안에다 쏟아낸 재성이 몸을 일으켰다. 페니스를 중심으로 사타구니 전체가 유분

기로 번들거렸다. 티슈를 뜯어 대충 닦아 낸 뒤 옷을 입었다. 오늘따라 특히 반응이 없다. 저번보다

도 심했다. 흡사 단백질 인형과 정사를 나눈 기분이었다. 재성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방안이 삽시간에 깜

깜해졌다. 창문에서 흘러들어온 빛으로 약간의 밝기가 있었지만,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창문을 미세하게 연 뒤 복도를 살폈다. 복도 전체가 깜깜했다. 곧이어 방에

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며 그들이 빠져 나오자 고시원 전체가 들썩거렸

다. 그들이 몽땅 나가자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재성이 잠시 자신의 행보를 고민하고 서있는 사이, 무엇

인가가 복도로 다가왔다. 또깍또깍 하이힐 소리가 복도바닥을 울렸다.

‘신발을 신고 돌아다니다니...’

재성의 눈가가 조금 찡그려졌다. 또깍거리는 소리가 중앙 복도를 지나 점점 멀어졌다. 얼핏 들어보니 소리

가 재성의 방쪽으로 향하는 듯 싶었다.

순간 찌릿한 전류 하나가 정수리에 내려 꽂혔다. 어금니가 힘껏 맞물린 채 주먹 쥔 손에서 땀이 맺혀 올라

왔다.

‘은정이다!’

그녀가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이곳까지 나타난 것이다. 자신의 방으로 곧장 향하는 걸 보니 총무놈도 같이

온 듯 싶었다. 총무는 무섭지 않았다. 쇄골이 드러날 정도로 말라빠진 그는 재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은미도 섬뜩하긴 했지만 은정만큼은 아니었다. 은미는 언니와 달리 정상이었던 것이다.

‘세명이라...’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 세명이 있다. 더 이상 피할 구석은 없었다.

‘오냐, 너희들이 원하는 싸움을 해주마’

깊숙한 곳에서 뜨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골목에서 두드려 맞았던 상처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웠다.

재성이 마음속으로 삼대 일의 싸움을 선포했다. 도장까지 찍은 채 그들에게 선전포고장을 날렸다. 결심이

서자 망설일 틈이 없었다. 은정이 가버린 지금이 기회였다. 소화기를 집어 든 채 방문을 열었다. 공포로만

가득하던 그의 마음속에 어느새 투쟁심이 솟구쳤다. 어설프게 덤벼들면 소화기를 골통을 부숴버릴 작정이었

다. 경찰들의 증언과 나타난 정황들이 그를 정당방위로 만들어 줄 것이었다. 복도의 끝에 누군가 서있었

다. 소화기를 번쩍 든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이 가자 작업복 차림의 남성인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한때 그를 의심했던 자신을 반성했다. 그는 대꾸도 없이 재성을 쳐다본다.

그를 지나쳐 복도를 건너자 현관이 나타났다. 재성의 신발은 보이지 않았고 슬리퍼 몇 짝만이 제각각 흩어

져 있었다. 발에 채이는 대로 주워 신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일층 셔터문 앞에 예상대로 총무와 은미가 서

있었다.

“은미 너 미쳤구나”

재성이 나타나자 둘은 꽤나 당황한 모습이었다.

“오빠...”

“닥쳐, 너도 정신나간 니 언니랑 똑같은 년이야”

은미의 얼굴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그리고 총무 너 이 개새끼야”

총무가 슬쩍 뒤로 물러선다. 발에 부딪힌 셔터문이 시끄럽게 요동친다.

“니가 무슨 생각으로 저년들을 돕는지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알아둬. 넌 엄연한 살인죄의 공범이야. 니

가 안죽이면 괜찮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멍청한 니 생각일 뿐이야”

“나..나는...”

“알아, 알아... 아무짓도 안했다고?”

총무의 겁먹은 눈이 고개와 함께 세차게 끄덕거린다.

“5초줄게, 그 안에 사라지면 눈감아 주겠어. 하나, 둘...”

총무는 재성이 셋도 세기 전에 도망가 버렸다. 예상대로 총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제 이대 일이 남았

다.

“오빠...”

은미의 짧은 단발머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타다닥”

별안간 계단 위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은정이 눈을 부릅뜬 채 내려오고 있었다.

“너희는 끝났어”

재성이 비웃듯이 내뱉고는 고시원을 빠져나갔다. 조금만 나가면 경찰들이 쫙 깔려 있을 터였다. 뒤를 돌아

보자 두 자매가 재성을 뒤쫓고 있었다. 하이힐이 거추장스러웠던지 은정이 벗어버린다. 맨발로 달려들자 제

법 속도가 빨라졌다.

“미친년이 지랄 염병을 해요”

재성이 약이라도 올리듯 천천히 도망쳤다. 그렇게 몇 분을 도망치던 재성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이상했

다. 예상대로라면 경찰들이 눈에 띄어야 했다. 경찰에게 그녀들을 인도하려면 재성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

다.

‘무슨 수작을 부린거지’

은미가 재성의 속내를 짐작한 듯 교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아아”

은정이 숨겨둔 식칼을 치켜 세우고는 괴성을 지른다. 동공에 흰자위가 가득하다. 은정은 완벽하게 미친 버

린게 확실했다. 재성이 다시 도망쳤다. 뛰다 보니 문득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벗어날 수는 있겠지

만, 이런 일이 또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은정은 몇 년만 지나면 다시 정신병원에서 나올 것이다.

그때 또 자신을 죽이려 들면 어쩐단 말인가. 평생을 쫓겨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

다.

“우아아악”

은정이 또다시 고함을 질러댄다. 재성의 머릿속에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계획이 성공한다면 더 이상 쫓겨

다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도망치는 와중에 재성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바쁘게 움직이며 자신

이 원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주택 단지에 들어섰을 때 마침내 그것을 찾았다. 분리수거대 위에 높이 매

달린 그것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재성이 찾은 것은 CCTV였다. 자신의 정당방위를 입증해 줄 고마운 친

구였다. 달리던 재성이 걸음을 멈추었다. 들었던 소화기를 옆에다 내려놓자 그녀들이 들이닥쳤다.

“언니! 죽여버려”

은미가 표독스럽게 외친다.

‘그래 그게 니 본모습 일테지’

은정이 코앞까지 달려들었지만 재성은 피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식칼이 날아오자 그제야 몸을 비틀었다.

“으윽”

어깨부터 팔꿈치 길게 베였다. 불에 댄 것처럼 팔 전체가 화끈거렸다. 재성이 한번더 CCTV를 바라본 뒤 소

화기를 집어 들었다.

“우아악”

은정의 벌어진 입에서 걸쭉한 국물이 흘러내렸다.

“죽어버려!”

재성이 있는 힘껏 소화기를 집어 던졌다. 한 방으로 끝낼 수 있게 젖먹던 힘까지 짜냈다.

“퍼억”

소름끼치는 음향과 함께 은정의 얼굴이 무서운 속도로 젖혀졌다. 어찌나 세게 부딪쳤는지 달려오던 자세 그

대로 바닥에 쳐박혔다. 얼굴이 밀가루 반죽마냥 으깨져버렸다. 코와 입주변이 폭탄이라도 맞은 듯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끝이었다. 은정은 경련조차 못한 채 죽어버렸다.

“언...언니..”

은미가 처참한 시체로 변한 은정에게 다가간다.

‘이제 일대 일이다’

CCTV를 힐끔 거린 재성이 마지막 힘을 모았다.

“와우, 퍼펙트하게 들어갔네”

은미가 멍하니 입을 벌린채 재성을 쳐다본다.

“병/신같은 년, 재미없게 벌써 죽어버리다니...끝까지 쓸모가 없구만”

“뭐..뭐라구”

“첫경험도 나랑 하더니 마지막 경험도 나랑 하네, 장애인 같은 년. 크크”

“.....”

“왜? 너도 경험시켜줄까?”

은미의 팔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선 마스카라와 뒤섞인 시커먼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 너를 알아, 너도 정신질환자/지?”

“으으....”

은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빨을 다닥 거리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너도 나한테 처녀막을 헌납해라, 그러면 일년 정도는 데리고 놀아주마”

은미의 눈이 희끄무레하게 변했다. 시체 옆에 떨어진 식칼을 주워 들고 재성을 노려보았다. 성공이다. 재성

의 계획이 완벽하게 맞아 들어갔다. 이제 쐐기를 박을 차례다.

“니 애미도 정신병자, 니 할미도 정신병자”

재성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으아아아”

은미가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준비하고 있던 재성이 잽싸게 물러섰다.

“우와아아”

마구잡이로 식칼을 휘두르며 재차 재성을 덮쳐갔다.

‘씨/발’

재성이 눈을 감은 채 반보만 물러섰다.

“서걱”

예상했던 끔찍한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가슴부터 배까지 찢어진 옷이 흉하게 나풀거렸다. 뜻밖의 행운이

었다. 재성이 재빨리 소화기를 들자 그녀가 다시 달려들었다.

“퍼어억”

허리힘까지 모조린 동원한 풀스윙이었다. 이것이 야구배트였다면 무조건 홈런이었다. 그녀는 실 끊긴 연처

럼 날아가 아무렇게나 쳐박혔다. 이마부터 광대뼈까지 피떡으로 변했다. 바깥으로 튀어나온 광대뼈는 설탕

가루처럼 잘게 빻아져 있었다.

“이겼다..”

이제 모든 것은 CCTV에 달렸다. 자신은 흉기로 공격당했고, 게다가 지금은 야간이었다. 자신의 정당방위가

거의 확실해 보였다. 소화기를 내려놓자 멀리서 일단의 사람들이 들이 닥쳤다.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날카

로운 눈매로 볼 때 형사들이 확실했다.

“정재성...당신을, 컥 이게 뭐야”

달려오던 그들이 처참한 시체를 보자 잠시 멈칫 거린다.

“완전 미쳤구만, 널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일단 경찰서로 가죠, 가서 다 얘기할게요”

재성의 말에 형사들이 서로를 쳐다본다. 그들 중 하나가 재성의 팔을 사정없이 비틀었다.

“으윽, 살살해요”

형사는 묵묵히 수갑을 채우고는 거칠게 팔을 붙잡았다.

순찰차를 타고 재성이 도착한 곳은 은곡 경찰서였다. 3층짜리 건물의 경찰서 입구에는 두 명의 의경이 경례

를 붙이고 있었다.





건물안으로 들어가자 길게 뻗은 통로가 나타났다. 재성의 양팔은 형사들에 의해 단단힌 붙잡힌 상태였는

데, 그들의 손아귀 힘에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강력계의 푯말이 붙은 사무실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

들이 보였다. 작업복 차림의 남성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총무가 무엇인가를 조사받고 있었

다. 재성이 들어가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총무는 재성과 눈을 마주치자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앉아”

재성이 순순히 그들의 말을 따랐다. 최대한 협조적일 필요가 있었다. 책상하나를 사이에 둔 채 머리가 희끗

희끗한 남성 하나가 자신을 바라봤다.

“다 말한다고 했다면서?”

“네, 다 말할게요”

“지금 말한다고 자수가 성립되진 않아, 한발 늦었어”

형사의 말에 재성이 고개를 저었다.

“자수가 아니라 정당방위입니다”

“정당방위?”

“네, CCTV에 다 찍혀 있을 겁니다. 가서 확인해 보세요”

“무슨 소리 하는 거지?”

재성을 연행해 온 형사 중 하나가 그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전달한다.

“그 새 또 죽였어? 이거 완전 악질이구만”

문득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재성이 표정을 굳힌 채 형사에게 질문했다.

“제 죄명이 뭐죠?”

형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입술을 벌렸다.

“기억이 안나는 모양인데, 설명해주지. 넌 지금 최부성과 오민아의 유력한 살인 용의자다”

“네? 그게 누군데요?”

재성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잡아떼 봐야 소용없어, 증거들이 너무 확실해”

“정말 몰라서 그러니까 말해주세요, 그들이 누구죠?”

혀를 끌끌 차던 형사가 서류하나를 펼쳐들었다.

“이름은 최부성, 나이는 칠십사세, 이 사람은 너의 옆방에서 살해당했어”

“잠깐만요”

“뭐지?”

“옆방 노인네가 죽었다구요?”

“그래 사망원인은 질식사지만, 목에는 칼이 꽂혀 있었지. 목졸라서 죽인 후에 목에다 칼을 꽂은 거야”

“그럴 리가요...아까까지 저랑 대화했는 걸요”

“너랑 얘기 했다고?”

“네, 분명히 얘기 했어요”

“기가 막히는 구만, 그 사람은 성대부종이야. 성대를 드러내 버려서 말을 할 수가 없다고”

재성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그럼 오민아는 누군가요?”

“오민아, 나이는 이십삼세. 이 여자도 목졸라 죽였구만...”

재성이 직감적으로 누군가를 떠올렸다.

“죽이고 나서... 강간까지 하고 말야”

“아..아니야”

“아니긴, 목격자가 있는데”

재성의 눈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작업복의 남성이 들어왔다.

“관계는 했는데 죽이지는 않았어요”

“훗”

재성의 말에 형사가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자신이 말해 놓고도 어색했다.

“말이 되는 변명을 좀 해봐, 시체 썩은 냄새까지 참아가며 그 짓거리 했잖아, 변태새끼 아니랄까봐 화장품

을 사용했더구만”

“냄새를 못 맡아요..”

재성이 힘없이 대답하자 형사가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어이쿠, 그래서 화장품을 사용하셨어요?”

“물이...물이 안나왔어요”

“당연하지 시체니까”

재성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목격자가 있다 쳐도 노인네는 제가 죽였단 걸 어떻게 알죠?”

“그야 쉬운 일이었지, 자네 주민등록증이 떨어져 있었으니까”

둔기로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골목길에서 자신을 덮친 누군가가 떠올랐다. 범인은 바로 그 놈이었

다.

“모함이예요”

재성이 고함을 질렀다.

“제가 죽였다는 증거가 없잖아요, 누군가 제 신분증을 훔쳐서 모함하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물론 아직까진 그렇지, 국과수에 칼을 보냈어. 조만간 지문감식이 끝날 거야”

재성은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경찰은 재성을 범인으로 단정내리고 있었다.

"칼뿐만이 아니라 방안에 떨어져 있던 모발도 같이 의뢰했네, 두 종류의 모발이 발견됐거든. 하나는 피해

자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어"

“그리고 자네가 말한 CCTV도 분석중이네, 테잎을 회수해서 검토하고 있으니까 곧 밝혀질테지”

“그건 정말 정당방위예요”

“글세, 두고봐야 알지”

재성이 멀찍이 떨어져 있던 총무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일듯한 기세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봐 총무, 빨리 말해...너희가 먼저 죽이려고 했잖아”

“미...미쳤어? 살인자 주...주제에 뻔뻔하기는”

총무가 더듬거리면서 소리를 지른다. 기가 막혔다. 분위기를 보니 놈은 무조건 잡아 뗄 기색이었다. 멍하니

있던 재성이 고개를 쳐들었다.

“잠깐만요, 노인네가 말을 못한다고 했죠?”

“그래”

재성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은 분명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도 굵은 성악톤의 목소리를

말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누군가가 노인을 죽이고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메모 역시 자신

을 유혹하기 위한 미끼였다. 이로써 하나는 확실해졌다. 골목길에서 자신을 덮친 놈이 방에 숨어있던 바로

그 놈이었다. 그리고 놈이 이번 사건의 진범이었다. 재성은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흥분하면 꼼짝

없이 뒤집어 쓸 판이었던 것이다. 재성이 침묵을 지키자 형사들도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했

다. 재성이 추리를 해나가는 동안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비행기 타니까 피곤하시겠어요”

별안간 복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굵직한 성악풍의 목소리는 통로를 넘어 사무실 안까지 생생하게 들려왔

다. 또 다른 사람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재성의 귀엔 굵은 목소리만이 벼락처럼 꽂혔다. 구둣발 소리와 함

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드디어 왔구만”

맞은편의 형사가 길게 기지개를 편다. 별안간 재성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저..저놈이예요”

재성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얼마나 크게 소리를 질렀던지 사무실안이 쩌렁쩌렁 울렸다.

“저 목소리예요, 저 놈이 노인네 방에서 나한테 말했다구요”

형사가 진의를 확인하려는 듯 재성을 주시한다.

“확실해?”

“네, 확실합니다”

재성이 거의 울듯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성에게서 진심이 느껴진 모양이다.

“네. 정말 끔찍한 사건입니다”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리자 재성과 형사의 눈이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철컥”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육중한 몸매의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삭발하다시피 한 머리에 얼굴

전체에 자잘한 흉터가 가득하다.

“저 놈입니다, 저놈이 진범이라구요”

재성의 눈에서 확신에 찬 음성이 쏟아졌다. 남성의 뒤를 이어 익숙한 얼굴 하나가 따라 들어왔다. 한순경이

었다. 재성은 든든한 원군이 도착하자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한순경이 재성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재

성도 따라 웃고는 큰소리로 외쳤다.

“이 자식이 확실합니다. 골목길에서 나를 깠던 놈도 이놈이고, 노인네 방에 숨어있던 놈도 바로 이놈입니

다, 이 놈이 두 사람 다 죽였다구요”

재성의 맞은편에 있던 형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다.

“지문과 모발감식 결과가 나오면 다들 알게 될겁니다”

재성이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제 한순경의 증언만 뒷받침되면 자신의 결백이 밝혀질 터였다. 모

두의 시선이 거구의 사내에게 집중됐다. 사내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내가 누굴 죽였다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지독히도 탁한 목소리가 사내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재성의 무릎이 풀썩 꺽

였다.

"....”

맞은편에 서있던 형사가 재성에게 말했다.

“자네가 진범으로 지목한 김형사는 네 시간 전에 입국한 사람일세...”

“마...말도 안돼...”

“마약범죄 관련 협약 때문에 스위스에 다녀오는 길이지...”

재성이 힘없이 주저 앉았다. 흐리멍덩한 눈이 한순경을 향했다.

“여기 CCTV 테잎입니다”

굵직한 음성이 한순경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재성의 입가로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옆을 보자 총무와 작

업복 남성 모두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분석해 보니까 정당방위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총 다섯 번에 걸쳐 그는 CCTV쪽을 쳐다봤고, 일

부러 흉기에 찔린 듯한 정황들이 곳곳에 포착됐습니다. 도망갈 수 있었음에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던 거죠”

“그러면?”

형사의 질문에 한순경이 말을 이었다.

“자세한건 전문가의 감정을 받아봐야 합니다만, 제 견해는 이렇습니다. 저자는 도발을 한 뒤에 여자들을

죽였습니다. 정당방위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다쳤구요”

재성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꿈속을 거니는 듯 희뿌연 안개가 가득찼다. 재성이 힘없이 중얼거

렸다.

“진급 때문이예요”

“진급?”

형사 하나가 용케 알아 듣고 반문했다.

“5년째 순경이어서 진급하려고..”

말의 끝부분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진급 하려고 사람을 죽였다?”

형사들이 제각각 비웃음을 터트렸다.

“한경장은 두달 전에 진급했어, 아마 동기들 중에 세 번째로 빠르다지?”

모두가 껄껄 웃었다.

맞은편의 형사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재성에게 말했다.

“지문감식만 나오면 끝나”

재성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할 필요없어..그거 내 지문이야..”

과일 쟁반을 내밀던 한순경이 떠올랐다. 

“이제 실토하는군, 머리카락도 자네 것이 맞지?"

"그래 아마도..."

머리속에서 장면들이 펼쳐졌다. 한순경이 내밀었던 줄넘기...말을 듣지 않던 MP3의 볼륨 버튼...그리고 한

순경이 자신이 떨어뜨린 열쇠로 방문을 여는것과 여기저기 떨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줍는 장면들이 파노라마

처럼 스쳐갔다 .







형사들의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재성의 눈은 떠지지 않았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최대한 몸을 웅크

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죽은 듯이 있던 재성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웅크렸던 몸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에 파문이 일어났다. 파문은 점차 확산되어 동공 전체로 퍼져 나갔다. 마침내 눈에 생

기가 돌아왔고,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재성의 머릿속에 수십개의 폭죽이 터졌다.




방금 기가 막힌 시나리오 하나가 떠올랐다. 

3 Comments
본좌는무적 01.12 03:17  
이게 끝인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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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와크로스 01.12 10:49  
범인은 본인 맞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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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느낌 01.12 17:54  
[@트리와크로스] 경찰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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