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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3 vs 1 (상편)

리버풀 2 1651 0 0

웃대 공포게시판 손에꼽는 명작가 k12kb님 작품을 퍼왔습니다.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fear&st=name&sk=k12kb&searchday=all&pg=0&number=46854)


"저 작업 중인거 아시잖아요"

"알다마다, 아니까 이렇게 부탁 하는게 아닌가"

"그냥 다른 사람한테 넘겨요, 안 그래도 요즘 진도 못빼서 답답하구만"

"기분전환 한다고 생각해, 안써지는 소설 붙들고 있으면 머리만 빠져 이사람아"

"어쨌든 싫어요"

"그러지말고 한 번 더 생각해봐, 그럼 연락 달라구 정작가"

동식의 은근한 설득에 재성의 이마가 엷은 주름을 만들어냈다. 자그마한 규모의 잡지사에서 편집장으로 일

하는 동식을 안 것이 올해로 삼년 째다. 월간잡지 '피닉스'에 정기 칼럼을 연재하면서 그와의 인연이 시작

됐는데,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무척이나 활달한 사람이었다. 재성이 쓴 칼럼은 오래 전에 끝났지만, 가끔

씩 투고 형식으로 글을 올리곤 했던 것이다. 전국의 유명한 흉가나 폐가, 각종 미스테리한 장소들이 그 대

상이었다. 그곳을 방문하여 사진 몇 장 찍으면 끝나는 간단한 일이었다. 가끔씩 인근 주민들의 인터뷰를 싣

기도 했지만 그건 드문 일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조합하고 재구성해서 재성 자신이 직접 꾸며내었

다. 가상의 주민들을 상대로 인터뷰를 한 뒤 그럴싸하게 포장하면 감쪽같았다. 애초에 그 장소란 것들이 과

장되고 부풀려진 소문으로 인해 유명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소재고갈로 그만두긴 했지만 가끔씩 용돈 

벌이식으로 기고하곤 했던 것이다. 통화를 마치고 재성은 담배 한대를 꺼내 물었다. 열 평 남짓한 작업실은

엄연한 금연구역이었지만, 지금은 재성 혼자였다. 창문을 열고 라이터의 부싯돌을 당겼다. 숫돌끼리의 마찰

로 요란한 불꽃이 튀었지만 웬일인지 불이 붙지 않았다. 라이터를 들어 눈앞으로 가져오자 드러난 밑바닥

이 보였다. 주황 빛깔의 일회용 라이터는 아직 스티커도 떼지 않은 상태였지만, 연료가 사라진 이상 플라스

틱 덩어리에 불과했다. 재성이 라이터를 쥐고 위아래로 흔들기 시작했다. 반쯤 기울인 채 연거푸 부싯돌을

당기자 가느다란 연기가 솟아올랐다. 무리하게 힘을 준 탓인지 엄지가 쓰라려왔지만, 다행히도 노란 불꽃

을 피워낼 수 있었다. 연기를 깊숙히 들이마신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중충한 하늘에선 금세라도 비

가 쏟아질 기색이었다. 점심도 먹지 않은 오전이었지만 짙은 어둠으로 인해 해질녘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

다.

"후.."

연기를 길게 내뿜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 여느때와 달리 니코틴의 독특한 향을 느낄수는 없었지

만 담배를 태운다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었다. 한모금을 더 들이마신 뒤 재성의 시선은 다시 책상으로

향했다. 노트북 화면에는 못다쓴 문장이 타이핑 되어있고, 그 오른쪽에는 구겨진 휴지 뭉치들이 수북히 쌓

여있었다. 축축한 휴지 뭉치들은 한 덩어리로 쌓여 있었는데, 흐릿한 날씨와 어우려져 작업실 분위기를 한

층더 눅눅하게 만들었다. 코끝이 간질거림을 느끼자 재성이 반사적으로 휴지를 집어들었다. 어제 새로 뜯은

두루마리 휴지가 어느새 심지를 드러낼 정도로 줄어있다.

"패앵"

힘껏 코를 풀자 싯누런 콧물이 휴지 가득 쏟아진다. 끈끈하게 뭉쳐진 콧물이 포도알맹이처럼 탱탱하다.

"부우웅"

휴지를 아무렇게나 던지고 나자 핸드폰의 진동이 울린다. 액정화면에 낯익은 번호가 뜨자 재성의 얼굴이

삽시간에 찌푸려진다. 들었던 핸드폰을 슬그머니 내려놓자 진동소리가 더욱 커진다. 재성의 씁쓸한 눈이

제자리를 빙그르 돌고있는 핸드폰에 고정되었다.





"은정아, 그만 헤어지자"

커피잔을 쥔 그녀의 손이 움찔 거렸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

"오늘 날씨 진짜 좋다, 이런날 교외로 나가야 하는데.... 오빠, 이왕 말 나온 김에 오늘 어때?"

"은정아 그.."

"잠깐만, 여보세요? 어라 현주니? 야 이게 얼마만이야, 진작에 연락좀 하지 기지배야"

과장된 억양으로 그녀가 핸드폰을 받았다.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건 그녀도 알고 재성도 안다. 그녀가 재성

쪽을 힐끔거린채 계속 통화를 이어나간다.

"오빠 미안해, 나 잠깐 통화좀 하고 올게"

그녀가 대답도 듣지 않은채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조개껍질로 만든 목걸이가 위아래로 크게 휘청거린다.

생일 선물로 사준 목걸이 속에는 그녀의 탄생석이 숨겨져 있다. 그녀는 재성이 당황할 정도로 기뻐했었다.

비싸지도 않은 선물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고마워하던 그녀가 떠올랐다. 화장실로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재성은 소파 깊숙히 등을 파묻었다.

"04학번 김은정이라고 합니다. 집은 울산인데 사정상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게 됐습니다. 취미는.."

"그만그만..이거 너무 딱딱하잖아, 그런거 말고 진짜로 자기 소개를 해보란 말야"

지켜보던 재성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친구는 있는지, 연애경험은 몇번인지 이런걸 말해줘야지"

태훈은 짐짓 심각한 어조로 신입생들을 나무라고 있었지만, 구경하는 사람들 입가엔 하나같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체격도 크고 눈도 왕방울만한 선배하나가 연신 다그치자 신입생들의 얼굴이 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친구는 없어요, 아직 한번도 사겨 본적이.."

남자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댔다. 심리학 동아리 '프로이즈'를 구성하고 있는 시커먼 남자들 다섯명이

내지르는 소리에 세 평 남짓한 동아리실이 떠나갈듯 들썩거렸다. 하얀블라우스를 목 끝까지 잠근채 긴 생머

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이 상황이 어색한지 연신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조금은 촌스러웠지만 때묻지

않은 순수함이 느껴졌다. 저만치 떨어져 있던 재성이 천천히 다가와 그녀 앞에 섰다.

"다른 동아리 놔두고 하필 재미도 없는 심리학 동아리에 온 이유가 뭐지?"

재성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얼핏 감정을 상하게 할수도 있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순순

히 대답했다.

"히스테리 증세가 조금 있어요..거의 다 치료 됐는데 한 번 연구해 보려구요.."

"히스테리라면 가벼운 신경성 질환 아닌가? 근데 그게 치료 받을 만큼 심각해?"

"심하진 않은데 유전성 질환이어서 완치는 힘들다고..."

그녀의 대답에 다들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지만 재성만이 웃으면서 어깨를 두드렸다.

"같이 한번 연구해보자, 못 이겨낼 병은 세상에 없어"

재성의 손길에 그녀가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또깍거리는 하이힐 소리에 재성이 현실로 돌아왔다. 그녀가 소파에 앉아 재성을 바라본다. 붉은기가 가시

지 않은 두눈을 애써 감추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물을 틀어 놓은 채로 울었을 것이다. 소리 죽여

울었을 그녀를 생각하자 재성의 가슴속이 납덩이 마냥 무거워졌다.

"요즘 머리가 복잡해..마감 날짜도 다가오는데 글은 반도 못썼어, 게다가.."

"나 때문에 그런거라면 며칠간 안보면 되잖아, 일 끝내고 다시 만나자. 응? 그러면 되잖아"

그녀의 속사포같은 말에 재성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이번이 벌써 세번째 이별 통보였다. 진작에 헤어졌어

야 하지만, 끈질긴 설득에 끝내는 마음이 약해져 버리고 마는 그였다. 굳게 마음 먹었다가도 울면서 매달리

는 그녀를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질질 끌어온 것이 벌써 일년이 넘는다.

"안돼 안돼, 절대로 안돼..이건 기다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재성이 벌썩 일어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제 네 전화도 안받을거고 더이상 만나지도 않을거야..진짜로 끝이야"

재성이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읊조렸다.

그게 삼일전 일이었다. 하루동안은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재성은 커다란 해방감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년 묵은 변비가 모조리 배출되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글도 술술 써졌다. 반 년전

부터 쓰기 시작한 추리소설이 근 보름째 답보상태에 머물러 있던 중이었다. 한번 발동이 걸리자 둑이라도

터진것 처럼 신들린듯 써내려갔다. 생동감 넘치는 문장에 절묘한 묘사는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어제부터 그녀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배터리를 두어시간 뺐다가 다시 끼웠을때 재

성은 두 눈을 의심했다.

부재중 -180통-

잡지사에서 온 두통을 제외하면 모두 그녀에게서 온 전화였다. 섬짓한 느낌과 함께 머리카락이 쭈삣섰다.

사귀면서 유달리 집착이 심하긴 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다. 재성은 다시금 배터리를 빼버리곤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옹달샘처럼 샘솟던 창작의 열기는 대번에 식었다. 저녁을 먹기전에 다시 한번 핸드폰의 전원

을 켰다. 화면에 S사의 로고가 어지럽게 뜬다. 몇초나 지났을까 부팅이 완료된 핸드폰에서 진동이 길게 울

린다. 한번 울린 진동은 그칠줄을 모르고 계속 울렸다. 밀린 메시지가 한꺼번에 수신되면서 생기는 현상이

었다. 쉴새 없이 울리던 진동이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내가 잘못했어..다시는 안그럴게-

-미안해 정말 미안해, 제발 전화좀 받아줘-

-나 지금 미쳐버릴것 같아.. 오빠 제발그러지마 내가 노력할게-

-미안해 미안해 정말이지 귀찮게도 안하고 간섭도 안할게 정말 반성 많이 했어-

-사랑한다고 했잖아..이제 와서 이러면 어떡해..다시 예전으로 돌아가자-

-야 이 개새끼야, 나한테 이러고도 니가 잘살거 같아? 당장 전화 안받을래?-

-아아..내가 미쳤나봐..맙소사 내가 무슨 소릴 한거야..오빠 제발 용서해줘-

재성은 쉴새없이 문자를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절절한 심정이 느껴졌지만 이젠 되돌릴 수가 없었다. 하루

동안의 달콤한 안식은 재성의 결심을 확고히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했다. 문자를 삼분지 이 가량 읽었을

때 화면이 갑자기 바뀌어 버렸다.

'아뿔사'

화면 하단에선 통화시간이 1초씩 더해지고 있었고 중앙에는 익숙한 번호가 떠있었다. 실수로 전화를 받아

버린 것이다.

"아..오빠..전화 받았구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빠..고마워..내 기도가 통했나봐..정말 고마워 오빠..

"재성이 핸드폰을 뗀 채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냥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웬지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빨

리 단념시키는게 그녀에 대한 예의리라. 재성의 눈이 가늘게 떠지면서 딱딱한 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 사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어,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이제 연락하지마 번호 바꿀거야"

단숨에 말하고 나서 잽싸게 폴더를 닫아버렸다. 긴장과 흥분으로 재성의 호흡이 약간 거칠어졌다. 거짓말이

지만 효과는 무서웠다. 더이상 그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전원을 한참동안 켜두었지만 핸드폰

은 조용했고, 재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비록 고질적인 축농증에 괴로웠지만 그녀만큼은 아니

었다. 콧구멍속이 점막을 중심으로 꽉 막혀서는 공기 한 점 허용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버틸만했다. 꽃가루

가 날리는 이맘때쯤이면 한 두달 고생하는 질병이었다. 풀고 또 풀어도 누런코는 끝없이 나왔다. 도대체 어

디에서 저것들을 계속 생산해 내는것일까..재성은 밥먹기 전까지 코를 쥐고는 천천히 주물럭거렸다. 이것이

정확히 어제 저녁 무렵의 일이었다.

"부우웅"

적막한 작업실안을 진동소리만이 장악했다. 작가 세명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곳 작업실엔 재성뿐이었다.

한명은 가벼운 교통사고로 입원중이었고, 한명은 중국에 조사차 가 있는 상태였다. 재성이 생활하는 독신

자 아파트에서 작업실까지는 도보로 20분 거리였지만, 언제나 버스를 타는 그였다. 북한산의 끝자락에 위치

한 이곳 작업실까지는 쉴새 없는 오르막길이었다. 걸어서 출근한 적도 있지만, 작업실에 도착할 무렵이면

흘러내린 땀이 엉덩이까지 번져 있곤 했다.길게 울린 진동이 멈추고 다시금 적막이 찾아왔다. 답답한 마음

에 창문을 열자 시커먼 구름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흐린날씨가 며칠째 계속되었지만 끝끝내 비가 쏟아지

진 않았다. 열었던 창문을 닫고서 침대에 주저 앉았다. 낡은 탁자 두개를 엮어 만든 간이침대가 삐그덕 소

리를 내며 흔들린다.

"부우우웅"

또다시 진동소리가 울렸다. 문자가 온 듯 진동은 한번으로 끝났고 재성은 슬며시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죽여버릴거야..거기 꼼짝말고 있어-

가슴이 덜컥 내려 앉으면서 하마터면 핸드폰을 떨어뜨릴뻔 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침과 동시에 온몸에 소

름이 돋아왔다. 갑자기 현기증 이라도 난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침대에 눕자 천장이 재성을 중심으로

빙빙 돌았다. 꽃무늬로 도배된 천장이 파도처럼 울렁거린다. 눈에 힘을 주고서 똑바로 노려보았지만 잠시

늦춰지는가 싶더니 다시금 빙빙돈다. 천장도 돌고 침대도 돈다. 재성이 참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자신을 깨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재성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주위는 새까만 어둠이었고, 째

깍 거리는 벽시계만이 규칙적으로 울려댔다.

"사삭"

재성의 귓가에 이질적인 음향이 들려왔다. 미약한 소리였지만 분명 익숙한 소리는 아니었다. 재성이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해가 진 듯 창밖으로도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약간 어지러웠지만 아까보다

는 한결 나았다. 귀를 세우고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사사삭"

이번에는 또렷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리는 현관쪽에서 들렸고, 종이끼리 마찰되면서 나는 소리인 듯

싶었다. 현관쪽으로 다가간 재성이 불을 키려고 전등 스위치에 손을 갖다댔다.

"사삭 사삭"

잠시 고민하던 재성이 불을 켜는 대신 방범구멍으로 눈을 갖다댔다. 누군가가 현관의 윗쪽 틀을 향해 손을

뻗고있었다. 손이 안닿이자 폴짝폴짝 뛰면서 손을 뻗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반대편 손에 들린 신문지 뭉치

가에서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삭 사악"

아무렇게나 뭉쳐진 신문의 끝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끝이 벌어지면서 무엇인가가 뾰족 솟아나왔다.

어느새 어둠에 적응한 재성의 각막에 그것이 크게 맺혔다.

'식칼..'

갑자기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목젖까지 솟아오른 위액을 간신히 삼켜내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뜀띠기를 하

던 그림자가 행동을 멈추고는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죽일테다..사지를 도려내 버릴테다.."

그림자가 방범구멍으로 눈알을 불쑥 들이밀었다.

"으헉"

재성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나왔다.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소리가 들렸을 수도 있다. 그림자는 은정이었

다. 잠옷차림의 그녀가 식칼을 들고선 재성을 찾아온 것이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한참을 살피던 그녀

가 다시 뛰기 시작한다.

'침착하자'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는다. 재성은 슬금슬금 물러섰다. 아침에 문을 잠궈두지 않았다면 자신은 꼼짝없

이 죽었을 것이다. 비로소 그녀의 정신질환이 떠올랐다. 원래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재성때문에 심해진 것

인지 알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미쳤다..완전히 미쳐버렸다'

재성은 경찰을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지만 증발이라도 한

듯 종적이 묘연했다.

'아..'

순간 둔탁한 충격이 뒤통수를 내리쳤다. 불현듯 그녀가 찾는게 무엇인지 떠올랐다. 그녀가 손을 뻗어대는

문 틀에는 열쇠가 숨겨져있다. 비상시를 대비해 몰래 숨겨둔 것인데 불현듯 그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평소

작업실에서 자주 숙식을 취하던 재성에게 그녀는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열쇠의

존재를 귀띔해 주었을 것이다. 재성의 시선이 문득 간이침대로 돌아갔다. 재성은 저곳에서 그녀와 격렬한

섹/스를 나누곤했다. 그녀의 달뜬 신음소리가 삐그덕대는 침대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듯 했다. 녹슨 침대의

울림이 점점 빨라진다. 규칙적으로 흔들리던 침대소리가 광폭하게 터져나온다. 무서운 속도로 발광함과 동

시에 그녀의 입에서 하이톤의 비명이 터져나온다. 눈동자가 뒤집히면서 그녀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진다. 그

녀가 재성을 밀어내려고 온몸을 퍼덕거린다. 재성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미친듯이 벗어나려 한다. 침대의

울림이 극한에 다다름과 동시에 재성이 그녀의 몸을 단단히 움켜쥔다. 호흡을 멈추고 어금니를 힘껏 문채

허리운동에 모든걸 집중시킨다. 그녀의 숨이 꺽꺽 넘어간다. 더이상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온몸으로 절규한

다. 마침내 재성의 움직임이 멈추었고, 그녀는 짐승의 울음소리를 뿜어낸다. 그녀의 번들거리는 복부가 경

련으로 들썩 거린다. 허벅지와 가슴의 잔경련이 여진처럼 몰아친다.

"하."

재성의 바지가 터져나갈 듯 솟구쳤다. 혈액을 한계까지 머금은 페니스에선 고통마저 느껴졌다. 이 상황에

도 본능은 어쩔수 없는것인가. 재성은 쓴웃음을 머금은채 계속해서 핸드폰을 찾아 나갔다.

"부우웅"

별안간 천둥같은 소리가 터져나왔다.

'젠장..하필이면..'

덕분에 책상아래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본 재성의

안색이 꺼멓게 물들었다. 바로 그녀의 전화였다. 진심으로 그녀가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재성이었다.

"삭 삭삭삭삭"

신문지 소리가 미친듯이 터져나왔다. 확신을 가진듯 그녀의 쿵쿵뛰는 소리가 보란듯이 들려온다. 재성은 캐

비닛을 열고 여행용가방을 꺼냈다. 꾸깃꾸깃한 그것을 펴자마자 재빠르게 물건들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노

트북을 시작으로 각종 서류와 서적들이 쉴새 없이 채워졌다.

"채챙"

재성이 가방의 노끈을 묶었을때 요란한 쇳소리가 울렸다.

"철컥..철컥"

열쇠를 찾은 듯 끔찍한 음향이 들렸다.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로 쏟아진다. 아래쪽을 보니 몇명

의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쿠웅"

우선 가방을 집어던졌다. 육중한 소리에 사람들이 재성을 올려다 봤지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창밖으로 몸

을 밀어넣은 뒤 가스배관을 잡았다. 작업실은 3층이었지만, 비스듬한 오르막길에 위치한 탓으로 실제로는 4

층도 넘어보였다. 도시가스가 지나는 통로인 배관의 온도는 무척이나 낮았다. 그것을 단단히 움켜쥐고선 삐

져나온 이음새로 발을 구겨넣었다. 이음새는 발가락을 간신히 가릴정도의 크기였지만 그에겐 천금보다 소중

한 것이었다.

"콰앙"

현관문이 열린 듯 거센 소리가 작업실안에서 터져나왔다. 배관의 이음새들을 밟아가면서 재성의 몸이 천천

히 아래로 내려왔다. 2층의 창문이 보이자 심호흡을 한 뒤 펄쩍 뛰어 내렸다.

"털썩"

딱딱한 아스팔트위로 재성의 몸이 거칠게 착지했다. 가방을 매고 위를 올려다보자 휑하게 열린 창문만 보였

다.

"윽"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발목에 시큰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충격으로 약간 접질러진 모양이었다. 두 세명

의 사람들이 수군거리면서 쳐다봤지만 재성은 말없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

도 있었지만, 위험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에 그들이 도움이 될리 없었다. 칼이라도 보면 뒤도 안 돌아보

고 도망칠것이 분명했다. 한쪽발을 질질 끌면서 한참을 내려가자 눈앞에 도로가 나타났다. 때마침 택시한대

가 다가오자 재성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택시는 조금의 속력도 줄이지 않은채 재성을 지나쳐

버렸다.

'빌어먹을'

온갖 저주를 택시기사에게 퍼부었다. 북한산의 중턱에 위치한 2차선 도로는 택시를 끝으로 텅텅

비어버렸다. 갑자기 뒷목 쪽에 따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돌아보자 십 여미터 거리에 그녀

가 서있었다. 신문지는 온데간데없고 오롯이 드러난 식칼만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잠옷차림의 그녀가 

기이한 표정을 지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곰돌이가 그려진 잠옷의 하의에는 시뻘건피가 흥건했다. 사타구니

부터 허벅지까지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듯 번져있었다. 재성의 머릿속에 문든 오늘날짜가 떠올랐다. 그녀

의 생리기간이 분명했다. 생리혈을 죽죽 쏟은 채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재성이 그

녀와 같은 보폭으로 뒷걸음질 쳤다. 고요한 도로 위를 걷는 두 사람을 가로등만이 지켜보고 있었다.

"위잉"

재성의 귓가로 희미한 울림이 느껴졌다.

'엔진소리'

울림은 점점 커져서 재성이 서있는 도로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이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의 움직임엔

변화가 없었다.

"빵.빵"

마침내 승용차 한대가 요란한 경적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모조리 켜진 헤드라이트 불빛에 삽시간에 대낮처

럼 밝아진다. 검은색 소나타한대가 도로를 가로막은 재성에게 연거푸 경적을 울려댔다.

'하나..둘.셋!"

속으로 숫자를 센 뒤 재성의 몸이 쏜살같이 소나타앞으로 뛰어들었다. 속력을 늦추고 있던 소나타의 바퀴

가 완전히 정지하자, 재성이 양손을 미친듯이 흔들었다.

"아저씨 뭐야..미쳤어?"

창문이 열리고 앳된 얼굴의 청년 하나가 고개를 내민다. 뒤를 바라보자 식칼을 높이 든 채 그녀가 뛰어오

고 있었다.

"헉..저 아줌마는 또 뭐야?"

청년의 눈이 재성의 뒤편을 향했다.

"철커덕"

손잡이를 거칠게 당기자 문이 열렸다. 속으로 환호성을 지르며 민첩하게 차에 올랐다.

"빨리 출발하세요, 저 여자 강도예요"

재성이 멍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청년에게 소리쳤다. 그녀가 본네트를 지나 재성이 탄 앞좌석으로 다가

왔다.

"문잠궈 빨리"

재성의 벼락같은 외침에 청년이 반사적으로 버튼을 눌렀다.

"척"

운전석의 락 버튼이 눌리자 동시에 모든 손잡이가 잠겼다.

"철컥..철컥"

그녀가 미친듯이 손잡이를 당겼지만, 잠긴 차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면서 설명할게요, 빨리 출발 합시다"

재성의 말에 청년이 기어변속기에 손을 올렸다.

"쩡..쩡"

별안간 조수석 창문에서 번개치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녀가 식칼로 창문을 찍어대고 있었다.

"쩡.쩡.쩡.."

어찌나 세게 찍었는지 거미줄같은 금이 창문전체로 퍼져나갔다.

"씨/발..도대체 뭐야"

청년은 욕짓거리를 뱉으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나아가면서 허공을 내젓는 그녀의 식칼이 보였다.

"하아.."

재성이 그제서야 비로소 참았던 한숨을 몰아쉰다. 흉물스럽게 금이 간 창문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우측 백

미러를 보자 차를 뒤쫓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의 모습은 점점 작아지더니 마침내 사라져버렸다.

"부우웅"

진동소리에 재성의 몸이 움찔거렸다. 핸드폰을 꺼낸 뒤 번호를 확인했다.

'은미..'

은정의 동생인 은미였다. 잠시 생각하던 재성이 폴더를 젖혔다.

"어..은미야"

"재성오빠, 괜찮아요? 저희 언니 지금 그쪽으로 안갔어요?"

은미의 목소리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나 죽을뻔 했어..칼까지 들고 찾아왔단 말야"

"오빠 죄송해요..언니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어요..요며칠 이상했는데 기어이 일이 터졌네요"

"완전히 미친거 같아, 눈빛이 완전 맛이갔다구"

잠시 조용하던 핸드폰에서 은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지금 병원에 연락했어요, 한시간에 안에 강제입원 시킬거예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거 아냐?"

"신고해도 정신병원으로 갈거예요, 언니 상태 보셨잖아요"

재성이 탄 소나타가 어느새 번화가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청년이 길가로 차를 세운뒤 재성을 쳐다보았다.

"알았어, 언니 입원하면 다시 연락줘"

전화를 끊고 나자 두통이 몰려온다. 청년의 시선과 금간 창문을 느끼자 골통이 아파왔다.




"잘 생각했어 정작가, 시간 넉넉하게 줄테니까 휴가라 생각하고 다녀와"

"자료는 팩스로 보내주세요, 이따가 확인할게요"

"알았어, 그럼 나중에 보자구"

희뿌옇게 동이 터왔지만 재성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동식과의 통화를 마치고 두시간이 더 지나서야 은미에

게서 문자가 왔다.

-방금 입원수속 마쳤어요.성동정신병원인데 의사말로는 상태가 안좋대요.몇년동안은 치료받아야 할거래요-

문자를 읽고 나서야 재성의 발길이 집으로 향했다. 그가 사는 독신자 아파트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재건축

허가가 떨어진걸로 알지만, 웬일인지 건설사측은 움직임이 없었다. 단지 내로 들어서자 5층 높이의 건물들

이 들어왔다. 낡은 아파트 벽을 타고 온갖 넝쿨들이 꼬여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그것들은 건물 전체를

칭칭 감은채 또아리를 틀고있다. 여기저기 드러난 철근들까지 가세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재성

이 자신의 동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다시 문자가 왔다.

-언니가 잘못했지만..오빠도 나빴어요-

재성의 무표정한 얼굴에 한가닥 조소가 어렸다. 사실 가슴 한켠에 그녀에 대한 연민이 존재했었지만 지금

은 아니었다. 그녀가 식칼을 들고 나타난 후로 일말의 감정도 사라져버렸다. 소름끼치는 느낌과 함께 불쾌

함만이 가득했다. 계단을 올라서자 습한 공기가 확 끼친다. 평소라면 썩은 곰팡이 냄새에 코라도 막았겠지

만 지금은 괜찮았다. 꽉막힌 코에서는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모서리 곳곳에 거미줄이 지저분하게 걸

려있었다. 오랜시간에 걸쳐 덮이고 덮인 거미줄은 새하얗게 뭉쳐진 상태였는데, 온갖 나방들로 기괴하게 장

식되어있었다. 3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도착하자 재성의 미간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현관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집안은 난장판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은정은 작업실로 오기전에 재성의 아파트를 먼저 찾아왔던

것이다. 그녀에게 열쇠를 복사해준 자신의 손을 잘라내버리고 싶었다. 각종 서적들이 허연 속살을 드러낸

채 나뒹굴고 있었고, 일부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박스 한가득 정리되어 있던 A4용지들도 모조리 흩어

져 있었다. 재성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갔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침대시트가 그를 반긴

다. 팩스위에 놓인 종이를 거칠게 빼들곤 침대에 엉덩이를 붙였다. 전송된 지 얼마 안 된 듯 종이는 따뜻했

다. 동식에게서 온 팩스의 내용은 간단했다.

-기묘한 골목-

경기도 상주시 은곡면에 위치한 이 골목에 붙은 이름이다. 너비 3미터 길이 30미터 가량의 이곳 골목에선

올해 들어서만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명이 자살했고, 세 명이 살해당했다. 범인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고...

재성이 읽던 종이를 구겨버렸다. 위치와 이름만 알면 된다. 어차피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된다. 자신이 직

접 가서 확인하면 될 터였다. 장롱을 열고 필요한 옷가지들을 꺼냈다. 삼십분가량 움직이자 모든 짐을 쌀 

수 있었다. 빠트린 것은 없었다. 수많은 출장의 경험은 그에게 조금의 실수도 허락하지 않았다. 짐을 싸고 

나자 한꺼번에 졸음이 몰려왔다. 눕고 싶었지만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흉하게 찢어진 침대시트가 그의 

수면 욕구를 억눌렀다. 억지로 가방을 짊어진 채 집을 나섰다. 구름은 상당히 걷힌 상태였는데, 오랜만에 

햇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재성이 상주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 무렵 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그를 깨운 건 고속버스기사였다. 버

스는 상주터미널에 도착해 있었고 재성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터미널 내부는 조용한 분위기였다. 노인

몇 명만이 대합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화장실로 들어서자 낡은 세면대가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

으로 부쩍 초췌해진 재성의 얼굴이 비쳤다. 푸석푸석한 피부와 두 눈은 한가득 피곤을 머금고 있었다. 헝클

어진 머리 한쪽은 푹 눌려 있었고, 얄팍한 입술 위에는 하얀 껍질이 뒤덮고 있었다.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세차게 쏟아졌다. 강한 수압에 사방으로 물방울들이 튀자 열었던 꼭지를 반이나 잠갔다. 양손 가득 물을 모

은 채 얼굴로 끼얹었다. 차가운 느낌에 그제야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듯 했다. 재성은 물기도 닦지 않은 채

화장실을 나왔다. 터미널을 빠져 나오자 서늘한 바람이 그를 반긴다. 수분이 증발하면서 얼굴 전체가 말할

수 없이 시원해졌다. 길게 늘어선 택시하나를 타고선 목적지로 향했다. 번화가를 벗어나자 들판이 즐비한

시골의 풍경이 펼쳐진다. 대규모의 비닐하우스 단지를 지나자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가 나타났다.

“은곡에 사시나봐요?”

“아뇨, 부모님이 사세요”

푸근한 인상의 40대 택시기사가 라디오볼륨을 줄이며 말을 걸어왔다. 재성이 초행길인 것을 알면 빙 둘러

서 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꽤 많이 바뀌었네요”

“네, 여기도 땅값이 엄청 올랐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택시 팔아서 땅이나 사두는 건데”

택시가 개울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자 할증이 붙으면서 계기판의 요금이 껑충 뛰었다.

“이제 다 왔어요, 근데 은곡 어디라고 하셨죠?

재성의 눈앞으로 옹기종기 들어앉은 주택들이 보였다. 주택단지 뒤편으로는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얼

핏 보기에도 20층이 넘어 보였다.

“혹시 근처에 고시원이 있나요?”

재성의 물음에 택시기사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고시원요? 가만보자.. 고시원이라..”

택시가 주택단지로 들어서자 아이들 서넛이 흙장난을 하는게 보였다.

“분명히 봤는데..이상하네”

골목사이를 몇 바퀴 돌자 어느새 요금이 2만원까지 올라 있었다. 재성이 택시를 세우려는 찰나 택시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찾았다, 저깄네요”

재성의 눈에 저만치 떨어진 3층짜리 건물이 들어왔다. 갈색 벽돌로 지은 건물은 상당히 낡아보였는데 넓은 

대지에 홀로 서있었다.

“수고 하세요”

택시에서 내리자 건물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어스름한 황혼의 노을이 건물을 비추고 있었는데 왠지 모

를 스산함이 느껴졌다. 건물의 출입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고, 양쪽 모두 기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일층

은 사용하지 않는 듯 철제셔터가 내려져 있었는데, 큼직한 자물쇠가 세 개나 채워져 있었다. 이층으로 올라

가자 카운터가 보였다. 작은 창문 너머로 총무로 보이는 남자가 티비를 보고 있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은 비스듬히 누운 채 한쪽 손으로 연신 사타구니를 긁어대고 있었다.

“저기...”

“낄낄”

재성이 창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청년이 요란스레 웃는다. 청년의 벌어진 입사이로 못생긴 뻐드렁니가 드러

났다. 청년의 손이 아예 바지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바지 전체가 들썩 거릴 정도로 벅벅 긁던 청년이 별안

간 창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심한 곱슬머리에 눈꼬리가 위로 째진 것이 영락없는 쥐새끼 상이었다.

“방 좀 보려구요”

청년은 뱁새 같은 눈을 들어 재성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고 청년이 입을 열었다.

“창문 있는 방은 다 찼어요, 그래도 괜찮으면..”

재성은 잠시 고민했다. 취재차 머무르는 지방마다 고시원을 잡았었다. 그 중 창문 없는 방도 분명 있었지

만, 그때는 일이 목적 이었다. 잠만 잘 수 있으면 충분했었지만 지금은 망설여졌다. 자신의 목적엔 분명히

휴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아저씨, 여기서 고시원은 이 곳 뿐이예요. 어떡하실 거예요?”

재성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청년이 재촉했다.

“그거라도 주세요”

“드르륵”

창문이 닫히고 청년이 카운터에서 나왔다. 열쇠 꾸러미를 쥔 채 청년이 재성 앞으로 다가왔다. 청년의 키

는 재성보다 약간 컸는데, 쇄골이 드러날 정도로 말라 있었다.

“비밀번호는 5896이예요. 이렇게 순서대로 네 개”

청년이 비밀번호를 누르자 철커덕하고 걸쇠가 열린다. 청년이 들어가자 재성도 뒤따라 들어섰다. 재성을 처

음 반긴 것은 십 수 켤레의 신발들이었다.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신발이 그야말로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이 신고있던 슬리퍼를 그것들 위에 대충 벗어놓고는 복도로 올라섰다. 재성도 신발을 벗고서

그를 뒤따랐다. 고시원의 복도는 전체적으로 어두 침침했는데, 드문드문 매달린 벽등 만이 간신히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컴컴한 영화관 속을 걷는 것 같았다. 복도를 따라 이리저리 꺽어가자 수십개의 방들

이 나타났다.

“여기 중앙에 있는 방들은 복도창문이 있는데, 벌써 다찼어요”

외곽으로 둘러쳐진 복도 사이에는 각각 네 개의 방이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모두 복도 쪽으로 창문이

나있었다. 창문은 재성의 눈높이에 절묘하게 위치해 있었으나 모두 굳게 닫힌 상태였다. 공동세면장과 화장

실을 지나자 복도의 끝이 나타났다. 청년이 멈춰선 곳은 다림질대가 놓여있는 복도의 마지막 방이었다. 

다림질대를 들어 한쪽으로 치우자 방문의 손잡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철커덕"

청년이 열쇠로 문을 열자 새까만 공간이 나타났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자 두 평 남짓한 방안이 삽시간에

밝아졌다. 오른편으로 침대 매트리스가 길게 놓여 있었고, 왼편에는 책상과 수납장이 들어서 있었다. 침대

받침대의 옆면에도 길쭉한 서랍이 달려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꽉 들어찬 느낌이었다. 책상아래에는 소형 냉

장고와 함께 플라스틱 휴지통이 있었는데, 휴지통 바닥에는 말라붙은 휴지조각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조용하게 통화는 할 수 있는데, 담배는 절대로 안됩니다"

청년이 열쇠꾸러미의 고리를 벌려 열쇠를 빼냈다. 열쇠를 내밀자 재성이 손끝으로 그것을 받았다. 사타구

니를 긁어대던 청년의 모습이 떠오르자 열쇠를 내던지듯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 방으로 할게요"

재성이 봉투에서 돈을 꺼내주자 청년이 냉큼 받아 채갔다. 문을 닫고 나서 가방을 내려놓자 그나마 있던 여

유공간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다. 전등스위치 아래에 위치한 또다른 스위치를 누르자 천장 한가운데 있던 환

풍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이잉"

날카로운 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기름기가 모조리 말라버린 듯 환풍기에선 철판 긁는 소리가 터져 나

왔다. 뻑뻑한 플라스틱 날개가 회전하면서 내는 소리에 재성의 인상이 절로 찡그러졌다.

"탁"

환풍기를 끄자 거짓말처럼 소음이 사라졌다. 침대 위에 주저앉은 채 가방을 열었다. 구겨진 옷가지와 잡동

사니들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가방 속을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불현듯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일어서서 전

등을 끄자 칠흑 같은 어둠이 나타났다. 한줌의 빛도 없는 완전한 어둠이다. 조심스럽게 몸을 눕자 척추 쪽

에서 요란한 뼈소리가 터져 나왔다. 눕자마자 재성의 몸이 침대 속으로 점점 가라앉는다. 침대 한가운데 깊

이 파묻히는 기분이다. 재성은 그렇게 기절하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재성의 눈꺼풀이 가볍게 떨리면서 눈이 뜨였다. 얼마나 잔 것일까. 방안은 여전히 칠흑같이 어두웠고 주위

는 고요했다. 물먹은 솜 마냥 축 늘어진 몸을 일으켜 전등을 켰다.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벌써 점심때

가 가까워져 있었다. 꿈도 꾸지 않고 내리 15시간을 잤던 것이다. 문득 텁텁한 공기가 느껴졌다. 방안은 재

성이 밤새 뿜어낸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 있었다. 방문을 열자 신선한 공기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확

실히 느낌이 달랐다. 깊게 들이마시자 폐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복도로 나온 재성이 엉거주춤 걷기

시작했다. 딱히 갈곳을 정해두진 않았지만 일단은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모퉁이가 보이자 왼쪽으로 방향

을 틀었다. 중앙의 방들이 나타나자 다시금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군데군데 굴러다니는 먼지 덩어리가 눈

에 띄었다.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뭉친 먼지들이 색바랜 솜사탕처럼 보였다. 복도창이 있는 방들은 어제

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공동세면장을 지나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자 양쪽으로 방

들이 나타났다. 세 걸음 정도를 옮겼을 때 오른쪽에서 따뜻한 습기가 느껴졌다. 곁눈질로 힐끗 보자 중앙방

들 중 하나의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내부를 볼 수도 있었겠지만, 왠지 가슴이 찔리는 

듯 하여 그만두었다. 중앙의 방들을 모두 가로지르자 오른쪽에 주방이 나타났다. 잊고 있었던 공복감이 스

멀스멀 피어올랐다. 주방으로 들어서자 싱크대와 가스렌지가 보였다. 싸구려 원목으로 만든 식탁에는 네 개

의 의자가 삐뚤삐뚤 놓여 있었다. 식탁 구석에 놓인 밥통을 여니 반쯤 남은 밥이 보인다. 건조대에서 그릇 

하나를 가져와 밥을 담았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밑반찬은 보이지 않고, 양파 몇 개만이 덩그러니 채워

져 있었다. 밥그릇을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자 싱크대 한쪽으로 냄비하나가 보였다. 냄비를 열자 걸죽한 된

장찌개가 보였다. 냄비를 가져와 밥과 함께 꾸역꾸역 씹었다. 마지막 한술을 뜨려는 순간 주방의 문이 벌

컥 열렸다. 뱁새눈깔의 총무와 건장한 체격의 남성 하나가 동시에 들어섰다. 총무는 재성을 본체만체하고

선 싱크대로 걸어갔다. 같이 온 남성이 재성을 보고 살짝 눈인사를 건넨다. 재성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주

자 남성이 씨익 웃는다. 30대 초반이나 됐을까. 건장한 체구에 단정히 깍은 스포츠머리가 꽤나 호감을 자아

냈다. 여기저기를 살피던 총무가 뭔가를 찾는 듯 식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재성 앞에 놓인 냄비를 발견하

자 별안간 소리를 지른다.

"아니 미쳤어요? 왜 이걸 먹고있어..이거 상했단 말야"

총무가 거칠게 냄비를 빼앗고는 싱크대로 가져간다.

"며칠을 굶으셨나, 왜 상한걸 먹고 지랄이야.. 배탈나면 누구한테 덤터기 씌우려구"

총무는 연신 시부렁거리면서 냄비를 씻었다.

"미안해요, 제가 요즘 냄새를 못 맡아서"

재성이 겸연쩍은 듯 뒷통수를 쓸어 내렸다.

"못 맡으면 다야..혓바닥은 빨통 빨때만 쓰는가.."

총무의 계속되는 무례에 재성의 한쪽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재성이 뭐라고 대꾸하려는 찰나 설거지를 마

친 총무가 신경질적으로 나가버렸다.

'쥐새끼 같은게..'

재성이 사라지는 총무를 보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왜 냄새를 못 맡으세요? 다치셨어요?"

남아있던 남성의 입에서 가느다란 미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연약한 목소리였

다.

"아뇨, 알레르기성 축농증 이예요.. 조금 지나면 괜찮아져요"

"아..그러시구나, 근데 여기는 언제 오셨어요?"

"어제왔어요"

남성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경극배우의 그것처럼 희안하게 들렸다.

"반갑게 지내요, 전 209호실에 있어요"

남성이 손을 내밀자 재성도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남성마저 주방에서 나가버리자 재성이 식탁에서 일어

섰다. 밥이 조금 남았지만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그도 상한걸 알았으면 절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었다.

입안을 헹구고 나서 주방을 나섰다. 자신의 방으로 오는 길에 세면장에 들려 가볍게 세안을 했다. 말

이 공동 세면장이지 세면대 세 개와 샤워실 하나가 전부였다. 물기를 대충 털어버리곤 복도로 나왔다. 먼지

들을 피해 다니며 걸어가자 어느새 중앙복도가 나타났다. 재성의 시선에 복도에 서있는 누군가가 들어왔

다. 까치발을 든 채 창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재성이 한참을 다가가도록 훔쳐보기에 열중해 있다.

"아흠"

슬며시 헛기침 소리를 내자 슬그머니 돌아본다. 작달만한 키에 중년 남성이었다. 남성은 부끄럽지도 않은

지 재성을 슬며시 노려보고는 복도 한켠으로 사라졌다. 그가 쳐다보던 창문은 아까전에 재성이 보았던 그

창문이었다.

'뭘 보고 있던 거지?'

재성이 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창문을 힐끔거렸다.

'헛'

일초도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똑똑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침대에는 희끄무레한 물체가 엎드려 있었는

데, 본능적으로 그것이 여자의 알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끈한 허리라인 아래로 탐스런 둔부가 불

룩 솟아있는 그것은 분명한 여자였다. 시커먼 머리카락이 날개뼈 근처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펼쳐져 있었는

데, 불까지 켠 상태로 대범하게 누워 있었던 것이다. 재성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혈액이 중심부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 생리혈을 질질 흘린 채 다가오던 은정의 모습이 떠올랐다. 끈적한 암컷의 냄새가 그

의 호흡을 거칠게 만들어버렸다.

"하아"

자신의 방문 앞을 어제처럼 다림질대가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을 번쩍 들어 한쪽으로 치운 뒤 문을 열었

다. 책상에 앉고서도 두근거림이 한동안 계속 되었다. 실수로 창문을 열어놨던 것일까. 재성은 실수일거

라 믿었다. 어제까지는 닫혀있었으니까 분명히 실수일 것이다. 환기시킨다고 열어놓은 채 깜빡 잠이 들었는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에 대한 생각을 하며 가방을 풀었다. 옷가지들을 꺼내서 수납장에 차곡차곡 넣

었다. 서적과 사무용품들은 책상 한쪽에 가지런히 진열시켰다. 마지막으로 노트북을 꺼냈을 때 재성의 입에

선 낮은 욕짓거리가 튀어 나왔다. 노트북은 중간 연결부분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망가져 있었는데, 한여름 

혓바닥을 길게 내민 개새끼 마냥 시디롬을 길게 내밀고 있었다. 넣어도 넣어도 시디롬은 용수철 처럼 다시 

튀어나왔다. 전원을 눌러보았지만 예상대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작업실을 빠져 나올 때 가방을 던진 것

이 생각났다. 안전하게 감싸든가 아니면 직접 매고 내려 왔어야했다. 소설을 쓰려면 노트북이 있어야 한

다. 그 안에 모든 파일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부 하드는 안전할 것이다. 대리점에 맡기면 무사

히 복구할 수 있다. 헌데 시간이 없었다. 복구하는데 한달 정도는 우습게 지나가 버릴 것이다. 신경질이 머

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저녁에 편의점에 들러 밑반찬 몇 가지를 샀다. 맛을 모르므로 값싸고 양 많은 반찬을 위주로 구매했다. 2층

으로 올라왔지만 총무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얄밉게 생긴 총무의 얼굴에 괜스레 화가 났다. 비밀

번호를 누르려다 문득 담배 생각이 났다. 코가 막히면서 담배 맛 역시 떨어져 버렸지만, 연기를 폐까지 들

이마시는 느낌이 좋았다. 아마도 폐가 담배맛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3층으로 올라서자 쓰레기봉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재활용품부터 해서 잡다한 생활 쓰레기들이 3층을 가득 채우고 메웠다. 3층의 안쪽 역

시 셔터로 굳게 닫힌 상태였는데 한쪽 구석이 찌그러진 채 흉물스런 모습이었다. 다시 한층을 더 올라가자

마침내 옥상이 나타났다. 옥상에는 에어컨 기기 몇 대와 빨랫줄이 길게 널려 있었고, 입구에 놓인 낡은 파

라솔 주위로 담배꽁초가 무수히 널려 있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면서 옥상 끝으로 걸어갔다. 빨랫줄 너

머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보였다. 인사라도 할 겸 재성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안녕 하세요"

재성의 인사에 담배를 태우던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자그마한 키에 무표정한 얼굴. 40대로 보이는 남자는

낮에 창문을 엿보던 그 사람이었다.

"......"

남자는 대꾸도 않은 채 조용히 재성을 바라본다. 회사에서 퇴근한 듯 작업복을 입은 모습이다. 남자가 반

도 더 남은 담배를 조용히 비벼 끄곤 재성을 지나쳐 간다. 남자가 지나치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를 낸

다.

"미친놈"

재성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남자는 계단을 통해 내려가 버렸고 재성만이 홀로 남았다.

'인사를 했는데 욕설을 한다?'

문득 총무의 무례한 말투가 떠올랐다. 이 고시원에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귀신같은 목소리를

내던 청년이 떠올랐고, 알몸으로 엎드려 있던 여자가 떠올랐다. 모두가 이상했다. 늘 접하던 부류의 사람들

이 아니었다. 쓰게 한 번 웃고는 재성이 옥상을 내려왔다. 총무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고, 카운터 안에는 티

비만이 홀로 켜져 있었다.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자 맑은 쇳소리를 내며 걸쇠가 열렸다. 문을 열자 뒤죽박죽 섞인 신발들이 재성을 반긴다.

발을 뻗어 그것들을 한쪽으로 쓸어버렸다. 발길질 한번에 신발들이 더욱 고루 섞인다. 새로 생긴 공간에 자

신의 운동화를 가지런히 정리하고선 복도로 올라섰다.

"철커덕"

다시금 걸쇠가 채워지면서 쇳소리가 울렸다. 손가락 크기의 수쇠가 구멍속으로 들어가면서 기분좋은 금속

의 마찰음이 터졌다. 반찬 봉지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컴컴한 복도를 가로지르자 알 수 없는 긴장

감이 생겨났다.

'설마..'

분명 실수였을 것이다. 중앙 복도에 들어섰을 땐 묘한 기대감으로 마른침을 연신 삼켜댔다.

'열려있다!'

창문은 여전히 열린 상태였고,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꿀꺽"

조심스레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번에도 지나치면서 슬쩍 들여다 볼 참이었다. 재성이 무심한 표정으로 슬

쩍 고개를 돌렸다.

'어라..'

방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대는 반쯤 접힌 이불만이 놓여 있었고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모퉁이를

돌아가던 재성에게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못 보고 지나친 것은 아닐까..'

재성이 맞은편 복도를 빙 돌아서 다시금 중앙 복도로 들어섰다. 한 번 더 확인해 볼 속셈이었다. 천천히 걸

으며 재성의 시선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돌아갔다.

"스윽"

'헉'

하마터면 들고 있던 반찬봉지를 떨어트릴 뻔 했다. 재성이 쳐다보던 순간에 여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

던 것이다. 여자는 멍하니 재성을 바라보았는데 아까와는 달리 옷을 입은 상태였다. 창백한 얼굴에 까만 눈

망울은 금방이라도 굴러 나올 듯 커다랗게 보였다. 시원한 콧날에 짙은 속눈썹의 여자는 흔히 보기 힘든 미

인이었다. 여자가 자신을 계속 주시하자 재성이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재성이 놀

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간 떨어질 뻔 했네.."

반찬봉지를 냉장고에 집어넣자 핸드폰이 울렸다. 폴더를 열자 아는 음성이 들린다.

"오빠, 저 은미예요.. 오빠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시 만날 수 있을까요?"

갑작스런 은미의 말에 재성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전화로 하면 안될까? 나 지금 만나기 곤란한데.."

"바쁘시면 제가 그리로 찾아갈게요, 집으로 가면 되나요?"

"아냐, 오지마.. 나 할 일이 많아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언니랑 관련된 일이야?"

잠시동안 핸드폰에서 대꾸가 없었다.

"전화로는 그렇고 직접 얘기해야 될 문제예요, 어디세요? 제가 지금 갈게요"

무의식적으로 대답을 하려던 재성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기묘한 이질감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미안하지만 안되겠어, 나중에 만나서 얘기하자"

재성의 거절에 다시 또 침묵이 찾아온다.

"알았어요, 그럼 나중에 만나요"

은미와 통화를 끝낸 재성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일이지? 은정이와 관련된 일인가.."

섣불리 판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자신의 위치는 절대로 노출되어서는 안되었다. 핸드폰

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 잠들어 있던 불안감이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혹시 위치추적이라도 하면 어쩌지..아니야 그렇게까지 해서 날 찾을 이유가 없어'

재성은 핸드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취재를 마칠 때까지 핸드폰을 꺼놓기로 결심했다. 동식에게는 자신이 따

로 전화를 주기로 하고 핸드폰을 구석으로 치워버렸다. 전원이 꺼져 있으면 위치추적이 불가능하다는 걸 재

성은 알고 있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는 것처럼 보였던 재성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머릿속을 떠도는 잡념때문이 아니었다.

그까짓 잡생각쯤이야 집중하면 얼마든지 없애버릴 수 있었다. 그를 괴롭힌 건 다른 존재였다.

"윙.."

좁은 공간 속을 모기 한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수면의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번번이 그것

이 방해했다. 귓가로 가깝게 날아드는 그것의 날개 소리는 가벼운 두통마저 자아냈다. 불을 켜고 시계를 쳐

다보았다. 새벽 한시. 더러운 흡혈귀 한마리 때문에 가장 어중간한 시간에 잠이 깨버린 것이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가며 모기를 찾았다. 재성의 살기라도 감지한 것일까. 끈질기게 날라들던 그것이 감쪽같이 사라

져 버렸다.

'제깟놈이 사라져 봤자/지'

2평 남짓한 공간에서 놈이 숨을 곳은 제한되어 있었다. 눈빛을 번뜩이며 구석구석을 살피던 찰나 마침내 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모기는 기다란 다리를 모은 채 문 손잡이에 붙어있었다. 휴지 몇 장을 거칠게 뜯고

는 천천히 다가갔다. 숨도 쉬지 않고서 살금살금 손을 뻗어 갔다.바로 그때였다. 재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

했다. 분명 자신이 착각한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자 마침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문의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어찌나 천천히 돌아갔던지 매달린 모기가 날아가지

도 않았다. 밀리미터 단위로 돌아가는 손잡이를 보자 재성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모기가 백팔십

도를 넘어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까지 족히 삼분은 걸린 듯 했다. 재성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송글송

글 맺혔다. 다행히 문은 잠겨 있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찰칵"

가볍게 손잡이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재성은 꼼짝도 않은 채 긴장하고 있었다. 문

이 잠긴 것을 알자 돌렸던 손잡이를 풀어놓는다. 열었던 속도에 비하면 쏜살같은 빠르기였다. 누군가가 사

라진 뒤에도 재성은 한동안 쥐 죽은 듯이 있었다. 문을 열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고시원 같으니라구'

삼십분 가량을 잠자코 있던 재성이 마침내 욕설을 퍼부었다.

"근데 도대체 누구지.."

아침 일곱시가 넘어서야 재성이 방문을 열었다. 방안에 비치된 작은 소화기를 든 채 강하게 문을 밀었다.

“덜컥”

무언가가 세차게 문에 부딪혔다.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란 재성이 반사적으로 소화기를 쳐들었다. 복도로

나가자 넘어진 다림질대가 보였다. 갑자기 맥이 탁 풀렸다. 누군가 놓아둔 다림질대에 문이 부딪힌 것이

다. 허탈감 뒤에는 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누군가에게 풀지 않으면 화병이 생길 것 같았다. 재성이 성큼성

큼 복도를 걸었다. 중앙복도를 통과하자 예의 그 열린 창문이 나타났지만, 그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

다. 주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총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카운터로 나갔다.

‘도대체 어디 간 거야’

총무는 카운터에도 없었다. 식식거리며 한참을 기다리자 아래층에서 누군가 올라왔다.

“총무...”

재성의 입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새로 산 담배 한 갑을 뜯고 있던 총무가 재성을 본체만체 한

다.

“당신, 고시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재성의 굳은 음성에 그제야 재성을 주시한다.

“뭔 소리야? 아침부터..”

끝까지 반말이다.

“어제 새벽에 도둑이 들어왔단 말이야”

재성이 소리를 빽 질렀다.

“누구한테 도둑이 들었는데?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

총무는 재성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속으로 이를 갈면서 어젯밤 상황을 설명했다.

“뭐야. 난 또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네”

총무가 뱁새눈깔을 찌푸린 채 계단에 올라섰다. 재성을 지나친 뒤 옥상으로 올라가려는 눈치였다. 할 수만

있다면 수십 가지의 방법으로 저놈을 고문하고 싶었다. 살려달라고 빌때까지 지옥의 고통을 안겨주고 싶었

다. 3층으로 향하는 계단 중간쯤에서 총무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 불안하거든 한순경이랑 얘기해봐, 지금 신발 신고 있네”

총무의 말에 재성이 안쪽을 쳐다봤다. 문이 열리고 경찰복을 입은 남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큼직한 체

구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 바로 주방에서 만난 그 남자였다.

“경찰..이셨어요?”

남성은 하얀이를 드러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일 있나요? 고함소리가 들리던데”

낯간지러운 미성이 흘러 나왔다. 재성이 계단 쪽을 보자 총무는 사라져버린 후였다. 재성이 자초지정을 설

명하자 남성이 말없이 경청했다.

“제가 봤을 때는 누가 장난 친 것 같군요, 아니면 방을 잘못 찾았거나요”

남성은 부드러운 억양으로 재성을 위로했다.

“너무 걱정 말아요, 문 잘 잠그고 자면 아무일 없을 거예요”

그의 말에 묘한 신뢰가 느껴진다. 사실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자신의 신경이 예민해져 있어서 객관적

인 판단을 못하는 것일수도 있었다.

“정재성입니다. 직업은 소설가인데 아직 내세울 작품은 없네요”

재성이 진심을 담아 자신을 소개했다.

“한명철 입니다. 여기 은곡 지구대에서 근무하고 있어요, 그냥 한순경으로 부르세요”

한순경이 재성의 어깨를 가볍게 친 뒤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가 사라지자 재성도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이

홀가분해지자 콧노래가 흘러 나왔다. 중앙복도로 들어서자 좀전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녀의 창문은 분명히

열려 있었다. 창문을 지나치면서 재성이 눈알을 힘껏 굴렸다. 지난번처럼 정면으로 마주치면 곤란했다. 고

개는 정면에 두면서 눈알만이 창문쪽으로 쏠렸다. 맙소사,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창문에 뭔가가 아른거렸지만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어찌나 세게 돌렸는지 눈알이 뻐근하다. 대체 뭘

까. 재성이 볼일을 보는 척 하며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는 여자가 얼굴을 내민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

었다.

“네?”

자신을 부르는지 알고 재성이 다가갔다.

“....안 나와요”

“뭐라구요?”

여자가 한글자씩 또박또박 내뱉었다.

“물.이.안.나.와.요”

재성의 표정도 그녀처럼 멍해졌다.

“물이 안 나온다구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머릿속으로 야릇한 생각 하나가 스쳐갔다.

“제가 잠시 봐도 될까요? 간단한 거라면 봐드릴 수 있는데”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럼 실례 하겠습니다”

재성이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방안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온다. 별다른 장식없이 깔끔한 방이었

다. 책상 한구석에 티슈와 화장품들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일순 재성의 동공이 확장됐다. 그 옆에는 생

리대가 있었다. 뜯지도 않은 새것이었지만 상상을 자극하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싱싱한 처녀였고 게다가 아

름답기까지 했다. 매달 한 사발의 피를 쏟아내는 젊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세..세면대는 어디 있죠?”

재성이 이리저리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하기사 애초에 세면대가 있을리 없었다.

“물이 안나와요”

여자가 한숨을 쉬듯 토해낸다. 문득 아랫도리가 뻐근해져왔다. 엉거주춤 서 있는 재성에게 그녀가 손가락

을 들어 보인다.

“물이 안나와요”

그녀의 손가락은 정확히 사타구니 사이를 가리켰고, 재성은 한참동안이나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야했

다. 뒤늦게 야한 생각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이 성욕이 솟구쳤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페니

스가 강하게 바지를 압박했다.

“실..실례했습니다”

재성이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어기적거리며 방으로 돌아온 재성이 침대에 주저 앉았다.

“물이 안 나오다니..그게 안 나올 수도 있는 건가”

재성의 경험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물이 안 나올수는 없었다. 티비에서 할례의식을 치룬 여자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들에게 섹/스는 즐거움이 아닌 고통 자체였다. 음핵을 제거하고 나면 아무런 기쁨도 못 느끼는 

것이었다.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행해지는 그 의식에 매년 200만명이 넘는 어린 소녀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는 것이었다. 시술 도중 죽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녀도 할례를 한 것일까? 아니면 단순하게 맛이 간 것일

수도 있었다. 그녀의 까만 동공이 떠오른다. 그건 미친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재성이 차근차근 생각을 정

리해 나갔다. 그 날 저녁 해가 지자마자 재성이 어딘가로 외출을 했다. 잠시 후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엔 마

사지오일이 들려 있었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가볍게 노크 한 뒤 얼른 문을 열었다. 방안의 불은 꺼진 상태였는데 침대위에 그녀가 엎드려 있었다. 언젠

가 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창문이 있는 방이라서 그런지 완벽한 어둠은 아니었다. 바지를

벗고 속옷까지 벗은 재성이 침대로 올라갔다.

“오일을 사왔어요...물이 안나와도 아프지 않을 겁니다”

재성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로 향했다. 심장은 터질것처럼 울려댔고 극도의 흥분으로 얼굴은 붉게 달아 올라

있었다.

‘헛’

차가웠다. 그녀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엉덩이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싸늘했다.

‘옷을 벗고 있어서 그런가’

재성의 손이 사타구니 사이로 다가갔다. 그곳에 손을 갖다댄 순간 재성은 그녀의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

았다. 그곳에는 한줌의 수분기도 없었다. 바싹 마른 생고무를 만지는 듯 했다. 오일의 뚜껑을 열고 힘차게 

짜냈다. 번들거리는 유분기가 손바닥에 가득 쏟아졌다. 그녀의 생식기에 오일을 듬뿍 발랐다. 구석구석 꼼

꼼하게 바르고 나자 마침내 그것이 온전한 촉감을 전해왔다. 바싹 독이 오른 자신의 그곳에도 오일을 바른

뒤 천천히 엎어졌다. 질퍽한 느낌과 함께 둘의 몸이 완전히 포개졌다. 재성의 허리운동에 그녀의 몸도 들썩

거렸다. 그녀의 의사가 아닌 재성의 움직임에 따라 밀려가는 것이었다. 그녀는 미동도 않은 채 계속 침묵했

다.

“괜찮아요?”

재성이 연신 움직여대며 물었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정말 괜찮아요?”

재성이 연거푸 묻는다.

“그냥 하고 가요...”

모기만한 소리로 그녀가 대답한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대꾸가 없다. 재성은 두 번이나 더 정상에 오

른 뒤에 침대를 내려왔다. 그녀의 몸에선 어느새 온기가 돌아 있었고, 옅은 땀방울들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

다. 옷을 챙겨 입은 재성이 인사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조용히 문을 연 뒤 복도로 나왔다. 후련한 배설

의 쾌감에 자연스럽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자신의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재성은 크게 놀랐다.

창문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누가 봤을까? 아니야 못 봤을거야’

재성이 생각을 고쳐 먹었다.

‘봤으면 어때 둘다 어엿한 성인인데’

재성이 방으로 왔을땐 여덟시도 안 된 초저녁이었다. 기분좋은 노곤함이 몰려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

얼마 안가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깜짝 놀란 재성이 헛바람을 터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불을 켜고 보자 방문이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재

빨리 손잡이의 돌기를 눌러 문을 잠갔다. 시계를 보니 겨우 12시가 넘어 있었다.

‘한순경의 말에도 안심하지 못했던 것일까’

무의식적으로 불안감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자려고 누웠지만 달아난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삼십

분쯤 뒤척거리다 체념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앉아 펜과 종이를 펼쳤다. 취재를 나가기까진 시간이

많았다. 이왕 노트북이 망가진 마당에 단편소설이라도 쓸 생각이었다. 시나리오 구상에 골몰해 있던 그때

무엇인가가 조용히 움직였다. 극히 미미한 소리였지만 적막한 방안에선 결코 놓칠 수 없는 소리였다. 재성

의 고개가 자동적으로 돌아갔다.

방문의 손잡이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맙소사’


뜬눈으로 밤을 세운 뒤 아침이 되자 재성은 방을 나왔다. 마음에 걸리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고시원 건물

을 빠져 나온 뒤 편의점 옆에 위치한 공중전화로 향했다. 간간히 밀려들던 꽃샘추위마저 사라져버린 완연

한 봄이었다. 따스한 봄날씨를 다들 반겼지만 재성은 반대였다. 꽃가루나 황사 따위가 날리는 봄보다는 겨

울이 훨씬 좋았다. 막힌 코를 주물럭거리며 전화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동전을 넣고 번호를 누르자 익숙한

컬러링이 흘러나온다.

"여보세요"

"저예요, 편집장님"

"정작가? 안 그래도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지금 상주에 있는거 맞지?"

"네, 그저께 왔어요"

"빨리도 갔네. 근데 이건 누구 전화야? 못보던 번호인데"

"공중전화예요.. 사정이 있어서 당분간 핸드폰을 못써요"

"그래?"

"저, 편집장님.."

"응?"

재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찾는 전화 없었죠?"

"정작가 찾는 전화? 아니 없었는데 왜? 누가 찾아올 사람 있어?"

"아니예요, 혹시 누가 저 찾아도 모른다고 해주세요"

"무슨 일 있는거야?"

"그냥 그렇게만 대답해 주면 돼요,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요"

수화기를 내려놓은 재성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싶어 동식에게 전화했지만 예상했던 바였다. 은미

의 전화를 받고나서 불안했었는데, 기우인 듯 싶었다. 하기사 은미가 동식의 존재를 알 리가 없었다. 동식

의 존재는 은정도 몰랐다.

"그럼 누구지?"

고시원 계단을 올라가던 재성이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혔다. 골똘히 생각하느라 누가 내려오는지 못봤던

모양이다. 재성과 부딪힌 사람이 사나운 인상을 짓는다. 남색 작업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었다. 옥상에서 재

성에게 욕설을 했던 그 사람이었다.

"미안합니다"

"미친놈"

남성이 눈알을 희번덕거리며 재성을 노려보았다. 죽일듯한 기세로 쳐다보던 남성이 다시 계단을 내려가 버

렸다.

'혹시'

짜릿한 전류 하나가 재성의 등을 관통했다. 방으로 오면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점검해 보았다.

'하지만 왜?'

합당한 이유가 없었다.

'담배 필 때 말 건 것이 화가 났을까?'

자신이 생각해 놓고도 멍청해 보였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별안간 창문을 훔쳐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엿보는 걸 방해했다고 느낀 걸까?'

그 역시도 가능성이 희박했다. 자신은 복도를 지나갔을 뿐이었다. 만약 그 남자가 범인이라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재성은 자신이 한 행동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았다. 잠잠하던 동공이 점점 커지면서 입이

떡 벌어졌다.

'같이 있는 걸 봤어, 그 여자랑 관계하는 걸 훔쳐 본게 틀림없어'

기분 나쁜 닭살이 우두둑 솟아올랐다. 열려 있던 창문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좋아하던 여자였을까? 아니면 단순한 질투심?'

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재성의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 날 재성은 초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오늘밤에도

문고리가 돌아간다면 신고할 작정이었다. 깊게 잠들지 못한 재성이 피곤한 기색으로 문고리를 주시했다. 새

벽 두시가 넘을 때까지 지켜보았지만 문고리는 돌아가지 않았다. 다음날 밤도 마찬가지였다. 인내심을 가지

고 쳐다봤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침이 되자 담배를 꺼내 물고는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

상에서는 한순경이 추리닝 차림으로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웬 줄넘기세요?"

"아..네..하아..근무 마치고..하아..운동하는 거예요"

한순경은 오분 정도를 더 뛴 뒤에야 줄넘기를 내려 놓았다.

"물어볼게 있는데요"

목에 걸린 수건으로 땀을 닦던 한순경이 재성을 쳐다보았다.

"고시원 사람 중에 키작은 아저씨 있잖아요..."

"키작은 아저씨요?"

한순경이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그 작업복 입고 다니는 사람 있잖아요"

"아! 김근치 그 사람 말하는구나, 근데 그건 왜요?"

"이름이 김근치 인가요?"

"네, 본명이예요"

"사실...그 사람이 좀 수상해요"

재성이 그 남자와 있었던 일은 상세히 털어놓았다. 물론 여자에 대한 얘기는 슬쩍 건너뛰었다. 얘기를 듣

던 한순경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흐음"

한순경이 주위를 두리번 거린 뒤 재성에게 낮게 속삭였다.

"김근치 그 사람 전과자예요"

"전과자요?"

"네, 두명을 토막내고 개사료로 던져준 놈이죠"

"그럴수가.."

재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20년 꼬박 채우고 작년에 출소했어요, 지금은 공장에 다니는데 아무튼 위험한 놈이예요"

뜻밖의 사실은 재성을 혼란으로 몰아갔다. 재성이 두려운 표정을 짓자 한순경이 어깨를 두드렸다.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외부사람 소행일 수도 있구요"

멍하니 서있는 재성에게 한순경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그의 입이 재성의 귓가로 향했다.

"총무있죠? 그 사람도 정상인은 아니예요"

"총무가요?"

한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과 8범인데 중학생 때부터 소년원에 들락거렸어요"

"그렇게나 많이요?"

"전과8범이긴 한데 사실 잡범이죠... 소매치기나 공갈친 것들이 대부분이예요"

총무의 뱁새 눈깔이 떠올랐다.

"제가 여기있는 이유도 사실 그거 때문이예요"

재성이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한순경을 쳐다봤다.

"제가 있음으로 해서 그들을 억제시키고 있는겁니다."

"아..그렇군요"

"무슨 얘기들을 그렇게 하시나"

별안간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총무가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저..그게.."

눈에 띄게 당황한 재성이 말을 더듬거렸다. 수상쩍다는 표정을 지으며 총무가 바싹 다가섰다.

"어흠..쿨럭..쿨럭"

한순경이 요란한 기침소리를 내며 자리를 떴다. 옥상을 내려가는 그를 보며 총무가 뱁새 눈깔을 더욱 가늘

게 떴다.

"아무 것도 아니예요, 밥통에 밥 있죠?"

재성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총무와 떨어졌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끈적한 시선이 그의 등에 쏟아졌다. 계

단을 내려오면서 한가지 계획이 떠올랐다. 한순경은 외부인의 소행일수도 있다고 했지만 가정에 불과했다.

이틀동안 조용하긴 했지만 한번 더 지켜보기로 했다. 밤 10시가 되자 재성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주방

을 지나 현관문까지 간 재성이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아무도 없는걸 확인하자 준비한 테이프를 꺼냈다. 미

리 잘라놓은 스카치 테이프를 문에다 꼼꼼하게 부착시켰다. 문에서 벽까지 길게 붙이고 나서 다시 한번 주

위를 살폈다. 방으로 돌아온 뒤 문을 잠갔다. 깍지를 낀 채 고개를 숙이자 긴장감이 몰려들었다. 트릭은 완

벽했다. 만약 오늘 문고리가 돌아간다면 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 재성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문고

리에 쏟아졌다. 새벽 한시가 넘자 피곤이 몰려들었다. 뻑뻑한 눈을 억지로 벌리고서 잠을 이겨냈다.

"슥"

막 하품을 하던 재성의 눈에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옳거니'

찔끔 흘러내린 눈물을 닦고 나서 한곳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드륵"

문고리가 돌아가고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재성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재성이

다섯시가 되자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서늘한 살기가 몰아

치는 듯 했다. 뒷꿈치를 들고서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주변을 힐끔거린 뒤에 얼굴을 문에 가져갔다. 테

이프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자신이 붙여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범인은 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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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첫느낌 2019.01.12 14:50  
물이 안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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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am 2019.01.12 15:49  
뭐야 야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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