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미스터리 > 미스터리
미스터리
27 Comments
발라모굴라스 2018.08.01 10:06  
저것도 있는데 경상도에 지키고 있던 장군들이 걍 튄경우도 많았음 정발은 그나마 목숨걸고 싸우기라도 했지....

럭키포인트 405 개이득

장득춘 2018.08.01 10:08  
빵싯 ㅋㅋㅋㅋㅋㅋㅋ

럭키포인트 440 개이득

바부코리아 2018.08.01 10:28  
역사 영상을 좋아해서 이것저것 찾아보는편인데
패인의 원인중에 하나가 조선이 일본을 너무 작고 쉽게 생각한것입니다. 지도상으로도 조선지도에는 일본의 크기가 매우 작고 아래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3ㅡ4배 크기이죠. 영토는 곧 농업 생산량으로 이어지고 군사력과 직결됩니다. 윗글에는 경제 문화 기술력이 강하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고려이후로 왜놈들이 농업생산량을 압도하였다고 하네요. 쳐들어 올것을 대비하였지만 최대 2만명정도로 예상한 수준이고 실제로는 열배가 와버렸죠..

럭키포인트 365 개이득

까우링 2018.08.01 13:33  
[@바부코리아] 임란시기면 조선과 일본이 생산량이 비슷하거나 약간 더 많을 시기 아닌가요? 관동평야가 당시에는 늪지대라서 생산성 제로에 훗카이도도 아직 일본땅이 아니던 시기입니다 일본 농업 생산량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두곳이 당시에는 미개척지 혹은 국토가 아니었던거를 생각해보면 일본이 농업 생산량이 더 많다는 건 의심해볼 법 하지 않을까요

럭키포인트 191 개이득

바부코리아 2018.08.01 14:19  
[@까우링] 관동평야가 아니더라도 산악지형이 많은
조선보다는 일본이 더 생산량이 많다고 알고있습니다.
말씀해주신 관동평야는 막부이후(임란이후)에 개발을 시작했는데 1700년 극초반으로 비교를 해봐도 조선139.5만결(31.81억 리터) 일본 46억7천만 리터로 30프로 이상 차이가 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두배이상 차이가 나게됩니다.
까우링 2018.08.01 14:23  
[@바부코리아] 제가 찾아본 자료와는 다른 내용이네요 제가찾아본 자료는 경작지면적이었는데 조선이 임란전 약 400만 헥타르의 면적이었고 일본은 160만헥타르정도 메이지유신즘에 접어들어서야 조선의 생산력과 비슷해졌다고 나와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악지형은 일본이 국토의80프로정도고 한반도가 70프로정도로 알고있습니다
바부코리아 2018.08.01 14:39  
[@까우링] 저도 세부적으로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봤거든요.
경작지 면적을 보지않고 생산량을 보았는데 이야기하는게 서로 많이 다르네요..
관동평야가 치수공사때문에 1800년대에나 개발이 완료되었으니 임란과는 무관한것도 확실하고 당장 비교가능한1700년 초만하더라도 위에 표기하였듯 30프로 이상 차이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1900년 조선은 1230만석 일본2591만석으로 2배정도 차이가 나는걸로 추정된다네요.
까우링 2018.08.01 14:51  
[@바부코리아] 1900년도면 그정도가 차이가 나지요 저는 임란 전의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요 고려말기는 원체 나라가 개판이었으니 별개로 치더라도 적어도 간토 평야개간전까지 백만 헥타르근처이던 일본 농토가 개간 이후 삼백만 헥타르대로 늘어났다는점과 조선과 일본의 도량 형의차이 그리고 제가 찾아본 자료에서의 도량형 환산해놓은것을보면 조선이 약 1900만석 근처정도이고 일본이 임란전 태합검지를통한 통계가 1850만석이라 하더라구요
바부코리아 2018.08.01 15:31  
[@바부코리아] 계속 운전중이라 답변이좀 늦었습니다ㅜ 제가 1900년 극초반 이야기를 하는거는 우링님께서 메이지유신이야기를 하셔서 했어요. 그때가서야 조선일본이 비슷해졌다하셔서요. 제가본글은 세종실록 지리지 기록과 일본 석고를 통한 생산량 추정글입니다.
까우링 2018.08.01 16:11  
[@바부코리아] 글쿤요 일단 일본과 조선의 도량형이 홉에서 조선이 일본의 1/3정도 라는 내용이 있더라구요 이 부분 때문에 치환을 해야 어느정도 근접한 결과값이 나오는거 같았습니다.
 그리고 따로 아래쪽 제 댓글에 다른 사이트에서 긁어온 다른 분의 글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심도 좋을듯 싶습니다. 시대별 일본의 농지 면적과 인구수 그리고 에도시대인 18세기 생산량을 계산해놓은것과 1910년 대한제국의 농업생산량을 비교한 내용이라 가져와봤습니다

럭키포인트 77 개이득

바부코리아 2018.08.01 16:19  
[@까우링] 옙.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블로그에는 기록이 오차가 심하게 나는데 이유가 뭘까요? 3배나 차이가 난다고하는데 이해가 되질않네요.  https://m.blog.naver.com/kkumi17cs1013/221206376853

럭키포인트 96 개이득

까우링 2018.08.01 16:42  
[@바부코리아] 해당 블로그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경작지 차이가 크게 나오네요 일본이 210만 정보고 조선이 60만 정보라는 데 어떤 시대 어떤 기록을 바탕으로 계산 한것인지 나와있지 않으니 알수가 없겟지만 이부분에서 그런 결과 값이 나오지 않나 싶습니다
 제가 찾아본 다른 기록이나 자료에 의하면 임란 당시 일본의 경작지 면적이 조선의 3배이상이 나올수가 없거든요
까우링 2018.08.01 16:54  
[@바부코리아] 가생이라는 사이트의 동아시아 게시판에 올라온 eo987 님의 글의 링크를 하나 드릴게요
http://www.gasengi.com/main/board.php?bo_table=EastAsia&wr_id=140338
 한번 읽어보심도 괜찬을듯 싶어요
광광 2018.08.01 10:56  
초반에 전라도지역 안 뺐긴게 다행

럭키포인트 410 개이득

한치두치세치네치뿌꾸빵 2018.08.01 10:56  
은본위의 세계적 추세때문에 도요토미가 명나라치려했다는 최진기 강의재밌던데

럭키포인트 340 개이득

장사셧제 2018.08.01 11:02  
허니잼

럭키포인트 86 개이득

엠봉에서왓수다 2018.08.01 11:30  
개꿀잼이네 ㅋㅋ ㅊㅊ

럭키포인트 271 개이득

아빠와아들 2018.08.01 11:48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신성분 때문에 쇼군은 못한걸로 알고있는데?

럭키포인트 487 개이득

Kuat 2018.08.01 12:18  
죽은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왜군 가노로 둔갑시켜서 빼앗긴 어린아이들도 셀 수없고, 명군에 전공을 위해 수급만 남기고 시체가 된 백성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었죠. 전쟁은 이래서 미친짓

럭키포인트 119 개이득

비둘기 2018.08.01 12:39  
빨리 2부 올려줘

럭키포인트 283 개이득

6974 2018.08.01 14:29  
2부는 언제 올라와요? 너무 재밌어요 빨리 올려주세요

럭키포인트 459 개이득

까우링 2018.08.01 15:28  
가생이라는 사이트의 꼬마러브 라는 분의 글 내용중에서 일부를 긁어와 봤습니다
日本の農地
 930年(平安末期)…『和名類聚抄』‥85万ヘクタール。
 鎌倉時代から室町時代にかけて二毛作が普及して、食糧不足が緩和されて餓死が減少した。
 1450年(室町中期)…『捨芥抄』‥94万ヘクタール。
 1600年(江戸初期)…162万ヘクタール。
 1720年(江戸中期)…294万ヘクタール。
 1874年(明治7年)…水田面積、265万ヘクタール。畑面積、190万ヘクタール。合計、455万ヘクタール。
 1912年(大正元年)…558万ヘクタール。
 1926年(昭和元年)…580万ヘクタール。
日本の人口
社会工学研究所(1974年)
1600年    12,273,000
1700年    28,287,200
1750年    31,005,900
1850年    30,714,000
明治13 1880年 36,649,000
明治43 1910年 49,184,000 

에도시대의 최대 번성기였던 18세기를 기준으로 (일본측자료라...일본의 쌀생산량을 최대한 많이 쳐준거임)


18 世紀半ばの平均米生産総量
1640万反 × 1.1石 = 1800万石以下
人口約3000万人の( 60 )%
米以外の主食の比重は( 40 )%
都市居住者の武士や町人…主食は米
農民の人口は,全人口の約80%
쌀 1800만석        1인당 0.6석
잡곡 1200만석    1인당 0.4석
인구 3000만명    1인당 년간 1석을 소비

한국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1910년 미곡 생산량

1910년 미곡 생산량 1240만석
잡곡 2000만석
잡곡수입 26만석     
 도합 3266만석 인구 1313만명
쌀 1240 만석        1인당 0.94석
잡곡 2000만석      1인당 1.52석
인구 1313만명      1인당 년간 2.46
까우링 2018.08.01 15:29  
[@까우링] 그나저나 찾아보고 조사해볼수록 조상님들의 식사량에는 감탄을 금할수가 없네요.. 동시대 일본이나 중국인의 몇배에 달하는 식사량이라니..
MomotaniErika 2018.08.01 15:30  
탄금대 전투는 진짜 미스터리이긴 하지...
문경새재라는 천혜의 요새를 버리고 배수진을 쳐서 싸그리 죽었으니....그렇다고해서 신립이 무능한 장수인 것도 아님..

 그 뭐냐 임진왜란을 배경으로한 왜란종결자란 판타지소설보면 뭐 귀신이 씌여서 신립장군이 그런 결정을 한 걸로 나오는데 그 정도로 그 당시의 판단력이 매우 흐렸던거지..

럭키포인트 4 개이득

마끼아또 2018.08.01 20:27  
[@MomotaniErika] 엌ㅋㅋ 왜란종결자 오랜만에 듣네 ㅋㅋ

럭키포인트 51 개이득

송운화 2018.08.02 21:16  
[@MomotaniErika] 신립은 당시 최선의 선택을 했습니다. 탄금대는 수로로 군량을 보급받을수 있는 위치이고
병졸들은 오합지졸에 무기를 처음들어보는 농민병이 다수였기에 고립된 산악지형을 방어할시에 야간탈영병들이 많아질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평야에 배수진을 침으로 훈련받지 않은 병사들의 전투력을 이끌어내려 하였고, 이외에도 탄금대에 풍향도 일본이 역풍을 맞는방향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는 당시 활과 총의 유효사거리의 유의미한 영향을 미칩니다. 패인은 병사의 질, 신립장군이 왜군과 전투경험이 전혀없는점, 교전 주도권이 일본에게 있어 불리한 날씨에서 전투가 일어났다는점 등이 있습니다. 
애초에 이길수 없는 싸움을 신립장군은 당시 주어진 조건에서 최고의 선택을 하였으나. 전투에서 패함으로 그간의 명성을 뒤로하고 배수진을 쳐서 진 멍청한 장수쯤으로 여겨진 비운의 장군입니다.

럭키포인트 71 개이득

풋핫하하 2018.08.01 22:12  
바부코리아 님들은 전공이 무엇... 역사 전공이신가ㅠ

럭키포인트 357 개이득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