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미스터리 > 미스터리
미스터리

삼국지 ep 15 제 2부. 인맥이 뭐 필요해? 가족이 인맥인데! Part 1

Kuat 2 489 7 0

사마의를 소개하기에 앞서 사마씨라는 성씨의 값어치, 파급력을 서술하자면, 제갈량의 시조인 제갈풍이 사례교위라는(한국으로 치면 서울고등법원장 겸 경기도지사와 제3야전군사령부의 통솔권을 일부 쥐고 있는 수준) 명사이기는 했어도, 사마씨의 시조인 사마앙은 항우가 세운 18제후국 중 하나인 은왕을 맡은 거물이었습니다. 무려 '왕'을 시조로 둔 집안이라는 것이죠.



한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터전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삼국지 시대까지 무려 400년이라는 세월을 하내 지방의 토호로 사마씨가 군림하게 됩니다. 여기에 많은 인재들도 정치계에 지속적으로 배출한 덕에 대개의 귀족가문들이 중앙정계에 방귀 좀 뀌던지 아니면 지방호족으로서 뿌리가 깊던지 둘 중 하나인 것에 비해 두 가지 모두 가진 몇 안되는 알짜 귀족 가문이 바로 사마씨 일족입니다. 


사마의네는 대를 이어서 거친 작위는 최소가 태수-(녹봉 2천석)인데, 고조할아버지는 정서장군, 증조할아버지는 예장태수, 할아버지는 영천태수, 심지어 아버지인 사마방은 낙양령, 경조윤을 지냈는데 한국으로 치면 서울 부시장이랑 부산시장을 둘 다 해본 격이니 레알 금수저 중의 금수저.


이런 배경을 가진 덕분에 웬만큼 무능력한 경우가 아니라면 가문에서 밀어주는 힘도 있으니 후대로 갈 수록 쉽게 고위직을 차지하고 탁상공론에 매몰되는 아둔함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흔한데 놀랍게도 사마의를 포함한 8명이 전부 준재로 이름을 떨치면서 '사마팔달'이라는 칭호까지 얻는 명문가의 클라스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고금을 통틀어서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이 있죠. 반대로 말하면 이름 있는 집안이라도 그에 걸맞는 행적을 3대 이상 보여주기는 힘들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마의 항렬은 5대째인데도 여론의 호의를 잘 얻을 수 있었느냐?



바로 이들의 아버지인 사마방이라는 존재 덕분입니다. 


이 양반은 한 마디로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할까요? 


영미야!



요즘에야 한국 교육 시스템에 체벌금지가 들어있어서 이런 선생님이 더는 없겠지만 그 전까지 학교에 무조건 한 명쯤은 모든 학생들이 기피하는 엄근진의 표본이자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는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저의 경우는 김준엽 한문 선생님...지금은 은퇴하셨으려나? 

아 실명 거론




이런 분들의 공통점은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본인 스스로에게도 아주 높은 규율을 적용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상대가 누구이던 예외를 두지 않는 융통성 제로의 태도를 고수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목청이 기차 화통을 삶아먹을 정도로 크고 욕설 사용이 그랜드 마스터 수준이라는 겁니다. 



요런 이미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 인물이 바로 사마의의 부친 사마방입니다. 기록을 보면 아들들 입장에서 정말 숨이 턱턱 막힐 수 밖에 없는 아버지긴 합니다.




1. 집에 있을 때도 위엄을 지켰다: 


-> 한 마디로 가족들 앞에서도 흐트러짐 없이 꼰대의 스타일을 고수했다는 거죠. 너그럽고 관대함 따위는 없다.




2. 위선적이고 교조적이었던 당대의 효 관념에 충실에 아들들을 엄격하게 대했다: 


->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혼나고, 잘해도 칭찬 한 번 못받는 빡빡한 아버지란 소리;




3. 성인이 되어서도 나아가라 말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했고 질문하지 않으면 말 하지 못했고 앉으라는 말이 없으면 감히 앉지 못했다:


-> 동작 하나, 말 한마디, 착석기립도 명령이 떨어져야 가능



에잉?

.

.

.

.

.

.

.

.

.

.

.

.

이거 완전 군대 아니냐?





*사실 틀린 말도 아닌게 사마방은 노년에 기도위로 전임되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 자리는 황제의 근위 기병직이니 현대로 치면 청와대 근접경호원이거든요. 세습직이긴 해도 무예 실력 없으면 늙은 나이에 제수받기는 어렵죠.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8명의 아들들 중 둘째가 바로 사마의입니다. 


장남인 사마랑, 3남인 사마부까지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만 4남에서 8남까지는 최종관직에 대한 기록만 있고 별다른 내용이 없어서 행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이 단점인데요.





8형제를 한 명씩 살펴보겠습니다.






I. 장남 사마랑(司馬朗)한 마디로 너그러운 키다리 아저씨?







호랑이 선생님의 장남답게 불과 12살에 경서 시험을 치뤘는데, 하도 키가 커서 


"얘 12살 맞아??"


이래가지고 신분 확인 할 정도였다고 하니 머리와 피지컬은 일단 매우 우수함을 알 수 있죠.



특기로는 사회의 흐름이랑 민심을 보는 눈이 대단했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면,




1. 반동탁연합군이 발발하자 사람들이 피난길에 오르는 것을 보고(아마도 지역호족이나 관리들인듯) 해당 지역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어지면 주민(백성)들이 다 도적떼로 변할 거라고 경고하는데,


과연 얼마 후 그 지역이 도적소굴이 됩니다.





2.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때 아버지인 사마방이 치서어사(治書御史, 문서와 기사를 관리하는 직위)였기 때문에 따라가야 했는데, 사마랑이 동탁이 곧 망할테니 고향으로 돌아가야한다고 설득해서 하내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데 정작 본인은 밀고로 인해 붙잡혀서 동탁한테 끌려가는데...



동탁이 


"그대는 나의 죽은 아들과 같은 또래이고, 체격도 거의 비슷하오!"



라고 하자,


"명공께서는 세속을 뛰어넘는 덕에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몇 해에 걸친 전란을 만났지만, 사악한 무리들을 깨끗이 제거하고, 현명한 선비들을 대대적으로 천거하였으니, 이것은 확실히 마음을 비우고 지략을 발휘한 것으로서 장차 흥하여 태평성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위세와 덕행이 융성하고 공훈과 생업이 빛나지만, 전쟁이 매일같이 일어나 주와 군이 들끓고, 국경 안쪽에는 백성들이 편안히 사업을 할 수 없어서 집과 재산을 버리고 떠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비록 사방의 관소에서 금령을 설치하고 형벌을 무겁게 할지라도 완전히 사라지게 할 수 없으니, 이것에 제가 걱정하는 이유입니다. 원컨대 명공께서는 지난 일을 살펴 적어도 세 번은 생각을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영예로운 명성은 해와 달처럼 빛날 것이고, 이윤과 주공 또한 견줄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답하고...

(사마랑: 동탁 새끼 우쭈쭈 해주기 힘들다..)


흡족해진 동탁은 



"나 또한 이것을 알고 있소. 그대의 말은 일리가 있소." 



라고 답하죠.


사마랑은 이후 뇌물까지 써가면서 고향 하내로 무사히 귀환합니다.



3. 고향에 반동탁연합군이 다가오자




라고 충고하지만 사람들은 



"뭐래.. 동탁네 치러간다는 애들이 왜 우리를 쳐?" 


라며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고, 오직 조자(趙咨)만이 가족을 이끌고 사마랑네와 함께 여양으로 피난갑니다. 얼마 후, 반동탁연합군이 와서 약탈하고 백성들 태반을 도륙​합니다. 




여기서 살아난 덕분에 조자는 태상(太常, 황실의 종묘와 제사를 주관하는 황제 직속 문관)까지 올라가며 승리자의 인생을 살게 되죠.


역시 친구를 잘 둬야..




192년 불과 22살의 나이에 조조의 부름을 받아 사공연속(司公掾屬, 당시 조조는 아직 승상이 아니라 사공) - 사공(司空)의 보좌관- 이 되었고 성고령, 당양장의 자리에 올랐다고 합니다.



요즘 시대야 한 부서의 차관보를 하면서 어떻게 지방의 군수직을 겸임하냐고 하겠지만 옛날에는 이런 게 흔했다니 뭐..



그런데 사마랑이 얼마나 지방직을 잘 수행했냐면 법률이나 형벌을 들먹이지 않아도 백성들이 알아서 잘 따랐으며 수군을 위해 배를 만들 때 나중에 이주해 온 백성들은 사마랑을 돕지 못해 안달나서 부역을 지정받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몰래 배 제작을 도왔다고 할 정도로 맡은 지역을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이후 중앙으로 돌아와서 승상주부(承相主簿, 승상직속 비서+서기)로 일하게 되고..



217년에 오나라 정벌에 종군했다가 전염병이 돌자 자신이 직접 병자들에게 다가가며 의약품을 나눠주었다가 병이 옮아서 불과 47세에 세상을 떠나면서 요절하게 됩니다. 


아버지인 사마방이 2년 뒤인 219년에야 죽기 때문이죠. 자식이 아비보다 먼저 죽다니..


R.I.P






II. 3남 사마부(司馬孚): 삼국지 처음부터 끝까지 산 인간 역사책




1) 사마랑이 인자한 지방행정관, 사마의가 문무겸전의 정치가라면 사마부는 문학과 경전해석의 고수였다고 합니다. 


희한하게도 사마의와 인생 궤적이 거의 판박이인 점이 특징입니다. 거쳐간 관직도 비슷하고, 사마의처럼 아들을 9명이나 둔 점도 그렇고 심지어 사마의보다 20년이나 더 사는 것까지 보면 사마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셈.



첫 출사를 조조의 아들 조식문학연(文學掾, 유학을 가르치던 품계비 300석의 문학선생)으로 끊는데,


조식은 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고 <조자건집(曹子建集)> 이라는 시집도 남겼는데, 그의 시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후대의 문인들이 안칠자원탑이라고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한 마디로 시에 관해서는 당대 최강)


후 조비의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비 600석. 시중과 비슷하나 태자를 따르며 보좌하는 자리)로 있던 형 사마의가 군사마로 영전한 뒤 후임 태자중서자로 낙점됩니다.






2) 조비가 황제에 등극하고서 중서랑(中書郞, 조서의 초안을 잡는 5품관직), 급사상시(給事常侍)를 맡게되고, 나중에는 황문시랑(黃門侍)으로 임명되고 기도위(騎都尉)를 더했다고 나옵니다


그 뒤에도 하내의 전농(典農)으로도 일하고, 조비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도 받고, 청하태수(河太守)의 직분도 맡아 잘 처리하는 수완을 보여줍니다. 




현대로 치면 청와대 공보실, 민정사무관, 보안팀장, 대통령비서, 국세청차관보, 지방군수 등등...


대체 일을 얼마나 시키는 거야 조비 씨부렁..







3) 227년 조예가 즉위한 뒤에 사마부를 보더니 


"내가 사마의를 두 명이나 얻었는데 어찌 근심하겠소?"

 


라고 칭찬하면서 도지상서(度支書,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장관)에 떡하니 임명합니다.


이 때 형인 사마의는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군부의 2인자였는데다 사마부가 기재부 장관이 됨으로서 명예직에 오른 원로 대신 몇을 제외하면 감히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형제의 권력이 커진 셈이죠.


제갈량의 북벌 시기에는 보병과 기만 2만 명을 엄격하게 선별해 미리 주둔시켜서 촉한군을 막도록 대비하게 하고, 기주에서 농정(農丁, 농사짓는 장정) 5천 명을 량주 상규현에 보내서 둔전하게 만듦으로서 사마의의 후방지원에 힘을 실어주는 등 지원가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후로도 관직이 쭉쭉 올라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상서성 2품관직)를 거쳐 작위도 실제 봉토가 있는 창평정후(昌平亭侯)로 승급받고, 상서(書令)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상서성의 최고직으로 관리의 선발 및 기강을 총괄추진하는 오늘날의 청와대 수석급 자리입니다.)









4) 249년, 고평릉 사변에서 군부의 1인자였던 태위(太尉, 현대의 국방부장관) 장제와 함께 군기고를 점령하면서 쿠데타의 성공에 이바지 한 공으로 장사현후(長社縣侯, 후작위 중에 급이 가장 높은 자리를 현후라고 함)의 작위를 받고 시중에 임명됩니다.




253년 오나라의 제갈각이 20만의 대군을 동원해서 합비 신성으로 진격해오자, 태위가 된 사마부는 마찬가지로 20만 병력에 관구검과 문흠을 대동해서 맞섭니다. 



여기서 사마부의 군사적 역량이 처음 제대로 등장하는데, 


"무릇 적을 친다면, 사람의 힘을 빌려서 공을 세우는 것이니마땅히 사교(詐巧-남을 교묘하게 속임)를 해야지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힘을 써는 것은 아니되옵니다."


라면서 싸우자고 요청하는 제장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한 달동안 그냥 눌러앉습니다. 


그리고서 진격하자 오군이 섣불리 덤비지 않고 물러납니다.




이후 (司空, 수리와 토목 최고행정자)직을 맡고 다시 태위직을 맡았는데, 255년 강유가 농우로 진격해오자 정서장군 진태와 안서장군 등애 거느리고 촉군을 쫓아냅니다. 


(사실 저 두 명 거느리고 못 막는게 더 이상하지만..)


이 공로로 태부(太傅, 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자리로 삼공보다 위의 최고명예직)에 제수되기까지 합니다.







5) 260년 5월 7일 황제 조모가 성제에 의해 시해되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실권을 잃고 손발이 묶여있던 황제 조모는 사마소를 역적으로 규명하면서 직접 칼을 들고 위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실권자였던 사마소의 부하인 가충이 독단으로 지시를 내리고, 그런 가충의 부하인 성제가 조모를 창으로 찌르고 등에 칼을 꽂아 살해하는 혼돈의 카오스가 발생합니다. 


그러나 사마소와 가충이 무서워서 아무도 액션을 취하지 않을 때 무려 81살이나 된 사마부가 달려와서 시신의 넓적다리를 베고


"폐하를 살해한 것은 신의 죄입니다!" 라고 통곡하며 진상규명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것은 충신 코스프레임을 알 수 있는데, 



황태후(명원황후, 조예의 둘째 황후)가 조모를 평민의 예로 장례하겠다는 의견에 반대하며 왕의 예로 안장하기를 주청하는데 그 내용이 이렇습니다.


"...고인이 된 고귀향공(조모)은 악역무도하고 스스로 커다란 재화 속에 빠졌는데, (중략)...그는 충동적으로 행동하여 인륜을 저버리고 국가를 위험에 빠지게 했으며, 스스로 멸망하여 사람과 신을 모두 버렸습니다...(하략)"



이렇게 고인모독하는 능욕상소를 5월 8일, 조모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던 양반이 하루만에 작성해서 올린 겁니다. 

 




이 정도면 와 씨 소름돋아 싸이코패스 아닙니까? 여든이 넘었는데 실권자의 눈치보지 않고 황제를 따른다는 인상을 심어줄 판단력을 하고 바로 다음 날 황태후가 사마 가문 눈치보며 평민으로 강등 장례치르려는 걸 선심쓰듯이 막으면서 왕으로 예우해줄테니 딴소리 하지 않도록 제대로 단도리하는 냉철함까지 보면 사마의 도플갱어급의 정치감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사마부가 위나라 충신 코스프레임을 알 수 있는 점이 장례 후 장락공(長樂公)으로 작위가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같은 집안 어른이라고 해도 진정 앞길에 방해된다면 아무런 예우를 하지 않거나 벌을 줄텐데 후작에서 공작으로 승작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사마부는 이후에도 위나라 충신 코스프레를 계속합니다... To be Continued..






 

2 Comments
점심메뉴 2018.07.26 18:24  
꿀잼

럭키포인트 125 개이득

내가나다z 2018.08.01 14:38  
긋긋

럭키포인트 340 개이득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