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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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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칸나이에서의 참패와 마르켈루스의 집정관 당선


  BC 216년 8월 2일, 두명의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이끄는 8만 6천명의 로마군이 한니발에게 대패하였다. 로마군은 약 5만-6만명에 달하는 병사를 잃었고 80명의 원로원 귀족, 집정관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도 전사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한니발의 군대를 이탈리아에 묶어두어 장기전을 펼치려 했던 파비우스의 노력은 한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로마인들은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를 독재관으로 선출해 잃어버린 군대를 재건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로마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한니발이 수도 로마로 들이닥치지 않음으로써 로마는 피해를 복구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카르타고군이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유린하고 다니는 것만큼은 막을수가 없었다.

  BC 215년에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가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나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는 갈리아 키살피나 지역의 리타나 실바 숲을 지나가던 도중 보이이족들의 매복 공격을 받아 전사하고 그의 군대도 전멸하였다. 그의 후임 집정관으로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선출되었는데 그가 취임한 3월 15일에 예언의 결과가 안좋게 나오자 투표가 무효로 선언되었다. 그리고 다시 재투표를 실시해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BC 214년의 집정관 선거에서는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가 집정관으로 당선됨으로써 마르켈루스는 정당하게 집정관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되었다. 



2. 마르켈루스의 이전 경력

  그는 BC 222년에 집정관, BC 224년과 216년에는 법무관을 지낸바 있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BC 264년-241년)에서도 시칠리아 전선에서 활약하여 많은 훈장을 받았는데 그 중에서 로마에서 가장 영예로운 훈장으로 꼽히는 시민관(코로나 키비카)으로 한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자기 목숨을 구해준 은혜나 공적을 인정하여 내리는 훈장이었다. BC 222년에 집정관으로서 그는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큰아버지) 와 함께 갈리아 키살피나의 한 부족인 인수브레스족 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이미 전해에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에게 패배해서 로마에게 항복 협상을 하려고 하였지만 이들은 군사적 공적을 세우려는 욕심에 그냥 무시해버리고 원로원에게 사절단을 그냥 돌려보내라고 설득했다. 두 집정관은 아케라이의 언덕 요새(오피둠, oppidum)를 포위했다. 이에 대응하여 인수브레스족은 가이스타이(Gaestae)라고 불린 갈리아 출신 전사들과 연합해 로마 동맹의 일원인 클라스티디움 마을을 포위했다. 

  이에 마르켈루스는 본대는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에게 맡긴채 기병대의 2/3과 600명의 경보병을 이끌고 클라스티디움을 구하러 떠났다. 인수브레스족을 이끄는 브리토마루스는 왕이라는 지위에 걸맞게 금과 은으로 제작한 흉갑을 입고 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브리토마루스는 휘하의 기병대를 이끌고 수적으로 월등한 로마군을 향해 선제 공격을 개시했다. 마르켈루스 또한 브리토마루스 왕을 확인하고 말을 몰았다. 두 지휘관이 맞부딪혔고 마르켈루스가 브리토마루스를 향해 창을 던지자 브리토마루스는 그 충격으로 즉시 말에서 떨어졌다. 마르켈루스는 몇번을 더 가격하였고 브리토마루스의 시체를 가져가 가죽을 벗겼다. 그리고 로마 기병들도 적의 본대를 향해 돌격해 마침내 인수브레스족을 물리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그나이우스 스키피오와 다시 합류하여 아케라이를 함락시키고 인수브레스족 최대의 도시 중 하나인 메디올라눔(지금의 이탈리아 밀라노)을 공격하여 점령함으로서 원정은 끝이 났다. 이들은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거행했고 인수브레스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유피테르 신전에 바침으로써 그 대미를 장식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야전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는 BC 216년과 215년 2차례의 놀라 전투에서의 맹활약으로 칸나이 전투 이후 사기가 크게 꺾인 로마인들에게 비록 소규모 전투였지만 승전보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 지역은 매우 울퉁불퉁하고 불규칙한 지형으로 그는 파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최대한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기 전까지는 선제 공격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병사들을 철저히 통제하여 도중에 탈영병이 발생하는것을 방지하고 몸소 정찰대를 이끌고 정찰을 해서 적절한 행군 경로를 찾기도 하였다. 야영지를 고를 때도 최대한 신경을 썼고 전투도 자신이 확실하다고 생각할때만 전투를 치뤘다. 

  이러한 신중함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상식 중의 상식처럼 보이지만 이 당시의 로마 군대는 이러한 것도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로마는 전문적인 직업군인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평소에는 농사를 짓다가 전쟁 상황이 발생할 경우에만 징집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시민군 체제였었다. 그러므로 번번히 매복이나 기습공격을 허용하기도 하는 등 전쟁 과정에서 서투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들이 오랜 기간 복무하고 전투를 치뤄가면서, 기본적인 군사 역량을 쌓고 직업 군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향상되는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3.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

  그 중에서도 당대의 로마 지휘관들 가운데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가 가장 돋보이는 지휘관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지 협력하였다. 파비우스가 신중하고 결전을 꺼려했다고 해서 모든 유형의 전투를 다 회피한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가 경계한것은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의 본대였으며 카르타고의 소규모 분견대나 카르타고측으로 넘어간 이탈리아 도시들의 군대들과는 결코 결전을 피하지 않았다. 또한 동맹국들이 로마 연합에서 이탈하지 않고 끝까지 충성심을 유지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 일례로 한 이탈리아 동맹국의 병사가 로마측이 자신의 군복무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해외로 망명하려고 하자 그를 설득하여 다시 아군으로 끌어들였다는 얘기가 있다. 

  BC 214년 파비우스와 마르켈루스는 서로 연합하여 한니발에게 빼앗긴 카실리눔을 탈환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전투 스타일 때문에 로마의 칼과 방패로 불렸다. 성격뿐만 아니라 정치적 입장도 서로 달랐지만 전시 상황에서 만큼은 끝까지 협력하였다.



4. 시라쿠사 포위전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마르켈루스가 거둔 가장 큰 군사적 업적은 시칠리아 섬의 그리스 도시 국가인 시라쿠사 포위전이었다. 시칠리아 섬은 제1차 포에니 전쟁 이전에는 카르타고와 로마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으나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함으로써 로마는 시칠리아를 병합해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속주를 확보했다. 히에로 2세의 재위 기간(BC 270-BC 215)만 하더라도 양국은 매우 가까운 동맹 관계였다. 그러나 BC 215년 히에로 2세가 죽고 그의 손자인 히에로니모스가 즉위하자 시라쿠사에서는 반로마파 세력이 친로마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했다. 비록 1년 만에(BC 214년) 히에로니모스는 친로마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하고 반로마파의 지도자 또한 암살당했으나, 로마는 그들이 카르타고와 잠시나마 연합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위협으로 느꼈다. 

  시라쿠사는 로마와의 관계 개선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BC 214년, 양국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 시기는 한니발과의 전쟁이 절정에 달해있을 때였지만, 로마는 마르켈루스의 지휘하에 시라쿠사로 원정군을 파견했다. 로마군은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도시를 포위했다. 그러나 시라쿠사는 매우 강력한 요새와 성벽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시라쿠사를 보호하는 또 하나의 주역 중에 하나는 그리스 과학자이자 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였다.

  로마군은 비록 도시의 봉쇄를 풀지 않았으나 점점 더 포위전의 어려움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로 인해 로마군은 포위전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도구를 선보였다. 삼부카(sambuca)라고 불린 공성장비는 그리스인인 헤라클리데스가 발명한 도구인데 마치 모양이 삼부카라는 악기와 비슷하게 생겨 삼부카라는 이름을 얻었다. 배에 실려있는 이 공성장비로 성벽을 꽉 붙잡을 수 있는 갈고리가 달려있었고 또는 도르래를 이용해 성벽까지 사다리를 놓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르키메데스는 곧 이러한 도구들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장치를 발명해 반격했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의 갈고리 발톱'이라는 기중기를 이용해 성안으로 진입하려는 로마의 함선들을 갈고리로 낚아 바깥 바다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거대한 거울을 만들어 지중해의 햇빛을 로마군 함선에 달린 돛을 향해 반사시켜 태워버렸다. 성벽에 설치한 노포와 투석기 또한 효과가 있었다. 결국 로마군의 바다를 통한 성벽 진입은 실패하고 희생이 큰 지상으로의 공격을 시도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로마군이 시라쿠사를 향해 공격하기도 어려웠고 시라쿠사로 향하는 보급을 끊을 만큼 포위망이 탄탄하지도 않았다. 반면에 시라쿠사가 로마군을 도시에서 몰아내는것도 어려웠다. 카르타고도 시라쿠사를 지원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로마군에게 격퇴당하거나 히스파니아 전선에서의 전투로 추가적인 병력을 동원할 여력이 모자랐다. 결국 포위전은 곧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로마군이 오랫동안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하자 시라쿠사인들은 과도한 자신감에 차있었다. 포위한지 2년이 지난 BC 212년, 로마군은 시라쿠사 시민들이 아르테미스 여신을 기리는 연례 행사에 참여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시라쿠사인들이 축제에 들떠있는 틈을 타서 로마 측은 소규모 병사를 동원해 야밤에 몰래 도시 외곽의 성벽을 오르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해 결국 외곽 성벽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내부의 핵심 요새는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마르켈루스는 병사들에게 아르키메데스를 보거든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마르켈루스 또한 아르키메데스의 명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78세의 고령인 아르키메데스는 로마 병사가 들이닥친 상황에서도 연구를 계속 하고 있었다. 그는 로마인들에게 작업을 방해받자 매우 화가나서 당장 나가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 로마 병사는 아마도 아르키메데스임을 몰라 보았는지 그 자리에서 아르키메데스를 살해했다. 아르키메데스의 생애는 이렇게 마감했다.

  시라쿠사의 남은 시민들은 모두 내부의 요새로 들어가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제는 로마군이 요새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어 도시의 보급은 끊겼다. 그들은 8달 동안 계속해서 농성했으나 계속되는 굶주림으로 인해 점점 더 어려움에 처했다. 모에리스쿠스라는 사람이 몰래 마르켈루스와 협상을 벌였고 합의한 신호에 따라 결국 성문을 열었다. 로마는 시라쿠사를 완전히 점령했고 도시에서 각종 물자들을 약탈하고 시민들은 노예로 팔아넘겼다. 

  시라쿠사의 정복으로 시라쿠사는 물론 시칠리아 섬 전체가 다시 로마의 속주로 굳건하게 자리매김했고 카르타고는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나중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카르타고 본토로 쳐들어가는 핵심 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제3차 포에니 전쟁(BC 149-BC 146)에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양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양할아버지의 선례를 따라 시라쿠사를 거쳐 카르타고에 상륙 작전을 시도했다. 카르타고는 처절하게 저항했으나 결국 로마군의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멸망당했고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5. 마르켈루스의 전사
  
  BC 209년,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또 다시 집정관에 당선되어 이탈리아 남동부의 타렌툼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마르켈루스는 BC 210년에 4번째 집정관 직을 수행하면서 누미스트로(Numistro)에서 한니발을 상대로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BC 208년에 5번째이자 생애 마지막 집정관 직에 당선되었다. 마르켈루스는 동료 집정관인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함께 22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와 카르타고 양측 사이에 위치한 언덕을 정찰하다가 한니발의 함정에 걸려들었다. 한니발은 로마군이 그 고지대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주변에 병사들을 매복시켜 놓았던 것이다. 카르타고의 누미디아 기병대에 맞서 마르켈루스와 크리스피누스는 치열한 백병전을 펼쳤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 마르켈루스는 누미디아인들의 창에 찔려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크리스피누스는 다음날,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해 죽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젊은 나이에 참전한 세대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한 전쟁이었고 마르켈루스와 파비우스가 바로 그 세대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들은 전쟁의 끝을 보지 못했으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완전히 종결시킨 인물들은 이들보다도 더 어린 세대들이었다.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을 BC 207년에 메타우루스 강 전투에서 물리치고 그의 목을 잘라버린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그리고 자마 전투의 영웅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그 주인공들이었다. 


1.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시라쿠사 방어전을 지휘하는 아르키메데스. 토마스 랄프 스펜스의 그림(1895년)

2.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바다의 공성장비 '삼부카'를 재현한 장면. 배를 이용해 사다리를 성벽과 연결시키는 얼핏 보기에 굉장히 유용해 보이는 도구이지만 수비대가 성안에서 거대한 돌들을 날리자 제대로 사용도 못해보고 쉽게 파괴되었다.

3.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아르키메데스의 갈고리 발톱을 묘사한 그림. 이것은 성안으로 진입하려 하는 로마군의 함선을 낚아서 날려버리는 역할을 하였다. 지울리오 파리기의 작품

4.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햇빛을 반사시켜 로마의 함선을 태우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 지울리오 파리기의 작품.

6.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햇빛을 반사해 로마의 함선을 태우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5.jpg 로마를 빛낸 장군들 - (2)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편


아르키메데스의 죽음. 에두아르 비몽의 작품(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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