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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주성치 14 2147 3 0

2013121312124911923-540x358.jpg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군주의 정책활동은 크게 내치와 외치로 구분할 수 있어.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은 세자 시절에 임진왜란 와중에도 분조를 이끌며 민십수습에 힘썼고


왕이 된 후에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으로 유명해. 


개집형들도 아마 교과서나 TV 같은데서 한번쯤 들어봤을거야. 


그런데 이런 광해군의 세자시절 활약과 왕이 된 후에 외교적 업적은 잘 알려져있지만, 

내치를 어떻게 했는지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거 같아. 


백성을 사랑했네~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전후복구를 했네~ 식의 두루뭉실한 평들은 많이 보이던데


그사람들은 대체 광해군의 뭘 보고 그런 평을 하는건지 의문이야. 


이제 광해군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렸으며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보자. 









토지의 변화.png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경제 꼬라지는 당연히 엉망이었어. 

나라가 몇년동안 왜놈들 말발굽에 짓밟혔는데 멀쩡한게 이상한거지. 


기록에 따르면 전쟁 전에 비해 세금이 20~30% 밖에 안 걷혔다고 해.  


이렇게 나라 사정이 어려우면 지도자가 할일은? 당연히 전후복구지. 


백성들의 세금을 탕감하고, 재정지출을 되도록 아끼는 그런 정책. 


그런데 우리 백성을 사랑하는 광해 임금님이 선택한건 뜬금없게도 궁궐 건축이었어.










경복궁.jpg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뭐 궁궐 건축 자체는 이해할만해. 임진왜란 때문에 궁궐이 타버렸으니 그거 복구해야지. 


그리고 전쟁 때문에 실추된 왕권 회복을 위해서라도 멋드러진 궁궐을 짓는건 어느정도 필요했어. 


문제는 광해군의 궁궐 건축은 그 정도가 해도해도 너무했다는거야. 


광해는 창덕궁을 비롯하여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 인경궁, 자수궁 등등 궁궐들을 끊임없이 지어댔어. 


전쟁 때문에 불탄 궁궐 복원하는 것만 아니라 무슨 궁궐병에 걸린 미친 사람처럼 새 궁궐을 계속 지어댄거야. 


궁궐의 크기가 소박했느냐? 그것도 아니야. 임진왜란 전에 경복궁이 700칸이었는데 경희궁이 1500칸, 인경궁이 5,500칸이었어.


게다가 궁궐에 얹는 기와를 럭셔리한 청기와로 만들라고 닦달했는데, 청기와의 재료 중에 하나가 '염초'였어.


염초는 바로 화약의 재료야. 군사들 무장시켜야 할 화약의 재료를 궁궐 공사에 쏟아붓고 있었다는 소리야. 


그것도 모자라서 전쟁을 대비해 비축해야 할 군량미까지 끌고와서 궁궐 공사에 써먹었지. 



전쟁 직후에 나라가 휘청거리는데 우리 광해 임금님은 나라재정 거덜내면서 심시티 즐기느라 정신이 없었다는거지. 


보다보다 안되겠는지 신하들이 이런 광해군을 말리는 모습을 실록에서 몇번이나 찾을 수 있어.




광해 1년 9월 24일 임인 3번째기사


궁궐의 건축 중지를 사헌부에서 건의하다



광해 9년 4월 18일 임자 4번째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광해 9년 6월 28일 신유 4번째기사 


영건도감이 도성내에 궁궐이 많음을 지적하다



광해 10년 윤 4월 17일 을해 7번째기사 


지사 심돈이 오랑캐의 일로 병력 조발, 군량 마련, 군사 공사 정지 등을 청하다



광해 11년 4월 27일 경진 2번째기사


영건도감이 두 궁궐의 역사 중 하나를 중지할 것을 청했으나 불윤하다



광해 11년 9월 1일 경진 3번째기사


신궐 영건도감이 궁궐 공사를 중지하고 처소를 옮기 도록 아뢰다



광해 12년 3월 25일 계모 3번째기사


좌의정 박홍구, 우의정 조정이 26일 경복궁 친행 중지를 청하다






저기서 나온 '영건도감'은 궁궐 건축을 담당하는 부서였어. 


궁궐 공사가 많이 벌어진만큼 당연히 광해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혜택도 많이 봤지. 


근데 그런 영건도감에서조차 "이건 좀 아닌데..." 생각으로 공사 중단을 건의했던 거야. 


그렇다고 광해군이 궁궐에 저리 매달린게 무슨 대단한 의미나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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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1516274896.jpg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광해의 궁궐집착이 워낙 심하다보니 경복궁을 한번 쓱 둘러보고 오자 


주위에서 "저저저 저놈 저거 또 궁궐 지으려고 저러네 또!" 수근거릴 정도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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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해군은 듣는척만 할 뿐 



광해 10년 5월 15일 임인 2번째기사 


궁궐 공사를 착실히 거행하라고 전교하다



광해 13년 9월 19일 정사 4번째기사 


궁궐 짓는 일을 부지런히 하도록 명하다



오히려 궁궐을 열심히 지으라고 닦달하는 모습을 보였어. 






 






자, 나라의 재정은 얼마 있지도 않은데 엄청난 규모의 토목 공사를 무리해서 계속했어. 


재정이 바닥나는건 뻔한 결과였지.




광해 3년 8월 8일(을해) 1번째기사


호조 판서 황신이 재정의 고갈을 아뢰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대비할 것을 청하다



광해 9년 1월 3일(기사) 6번째기사


호조에서 재정이 탕진되 선혜청의 방법으로 운영하기를 청하다



광해 9년 4월 18일(임자) 4번째기사


호조가 궁궐의 건축으로 인한 재정의 부족에 대해 아뢰다






벌려놓은 궁궐 공사는 한가득이고, 궁궐은 짓고 싶어 미치겠고, 그런데 나라의 곳간은 텅 비어버렸고.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 우리 백성밖에 모르는 광해 임금님은 아주 간단한 방법을 생각해냈어.


2012100337121887 (1).jpg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아, 백성들을 더 쥐어짜면 되겠구나!"





모자란 궁궐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광해는 전국 각지에 '조도사'라는 관리들을 파견해. 


조도사가 맡은 임무는 백성들에게 할당량만큼 세금을 걷어서 조정으로 보내는 거였어.


그래, 쉽게 말하면 국왕이 직접 백성들로부터 재물을 갈취하라고 관리를 파견한거야. 


조도사들은 백성들을 가혹하게 수탈해서 할당량을 채웠는데 


당연히 그 과정에서 자기들 이익을 챙기려고 횡령을 하는 경우도 잦았어. 


일부만 빼돌리는게 아니라 아예 몇배, 몇십배의 재물을 뜯어내는 놈까지 있었지.


이들의 횡포가 워낙 심하다보니 신하들이 임금에게 조도사의 죄를 고하거나 수탈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는 일도 잦았는데 


광해는 이런저런 변명을 하면서 그저 조도사들이 올려보내주는 재물을 가지고 궁궐 짓는데만 열심이었어.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를 찾아내고 징벌해야 할 임금이, 되려 그들을 감싸준거야. 








15f74f021591269.png 백성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광해군에 대해 알아보자
 


임금과 임금이 파견한 관리들이 이 모양인데 지방관리들이라고 멀쩡했을까? 


당연히 뒷주머니를 차고 서로 누가 더 백성을 잘 쥐어짜는지 열심히 경쟁했지. 


이 당시 조선의 나라꼴은 경제파탄으로 인해 


부모가 자식을 내다 팔고

집과 땅을 잃고 떠돌고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삶을 비관해 목을 매고 자살하는 


말그대로 망하기 직전이었어.




....쌀과 포목은 한계가 있는데 공역은 끝날 기약이 없어서 백성들의 골수까지 다 뽑아 내었으므로 자식들을 내다 팔았으며, 떠도는 자가 줄을 이었고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그득하였다. 심한 경우에는 왕왕 목매어 죽는 자도 있었다. 그런데도 저 도감에 있는 자들은 너무도 어려워서 계속할 수 없다는 뜻으로 와서 고하지는 않고, 매번 백성들에게 긁어모아서 크고 사치스럽게 하기만을 일삼고 있으니, 통탄을 금치 못하겠다. - 광해군일기 사관의 평 





 



우리 광해 임금님의 백성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어.


명나라와 후금이 싸운 '사르후 전투'에 조선도 원군을 보냈는데, 대패로 끝났고 조선의 군사들도 대부분이 사망했어.


명나라 황제는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조선 병사들과 유가족들에게 위로금으로 은 1만냥을 보냈지. 


신하들이 이걸 병사들에게 나눠주자고 건의했지만 


백성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광해 임금님은 혹시라도 백성들이 재물을 잘못 사용할까봐 


은 1만냥을 모조리 왕실 창고에 처박은 다음 

나중에 궁궐의 사치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했어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위로금을 착복한거지 







아, 흔히 광해의 업적으로 알려진 대동법 시행을 언급 안하고 넘어갈뻔했네.




광해 6년 7월 3일 계축 13번째기사

호조가 공물 징수에 선혜청을 설치하여 폐단을 없애자고 건의하다 


사헌부가 선혜법(宣惠法)을 팔도에 시행하자고 청하니, 호조가 아뢰기를,


"많은 사람들의 논의가 ‘방납을 금하지 못하면 국가의 경비를 계속 조달할 수 없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않을 텐데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라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변통하여 해결하는 것이 어찌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시험삼아 경기 지방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성들이 많고 무거운 요역(徭役)을 감당하지 못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원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성명께서 왕위에 오르던 초기에 상신(相臣)에게 자문하여 새로이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1년에 단지 쌀 16두를 거두었습니다. 그 처음에는 대개 경기 지방의 공물 징수에만 적용하려 하였는데, 쌀 16두를 거둔 뒤로는 경기 지방의 요역이 모두 지탱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공물 사주인들도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경비도 궁핍하지 않아 경기 지방의 백성들이 그것에 힘입어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으므로 모두가 성상의 은혜를 우러러 보았는데, 이는 실로 이미 시험해 본 명백한 징험입니다.


지금 헌부가 폐단의 근원을 깊이 인식하고 이 계사를 올렸으니 이에 의거하여 시행함이 편하고 이로우리라 여깁니다. 오직 성상의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토지에 따라 공물을 바치게 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경기에서 쌀로 거두는 것이 한갓 본청(本廳)의 하인들이 교활한 짓을 하는 소굴이 되어 구애되는 점이 많으니 먼 장래를 경영하는 방법이 아닐 것 같다. 팔도에는 절대로 경솔하게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 이 공사(公事)는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광해는 대동법(이 당시에는 선혜법)을 찬동하지 않았어. 


어디까지나 신하들이 하자고 닦달하니까 마지못해서 경기도 지역에만 시행했고, 


그 효과가 좋으니 전국으로 확대하자는걸 반대하며 물고 늘어진게 바로 광해야.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시행한게 아니라, 반대로 대동법을 반대했던 임금인거지.



 





 

지금까지 백성밖에 모르는 임금 광해의 내정에 대해 알아봤어.


보다시피 가뜩이나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완전히 망할 지경까지 몰고 간 

내정 관련해서는 혼군, 암군, 폭군 소리를 들어도 싼 인물이야.


그렇다고 광해가 칭찬할거 하나 없는 개막장 임금은 아니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국제정세를 읽고 판단하는 외교적 능력은 제법 뛰어났어.


물론 광해가 시행한 '중립 외교'의 근본적인 면은 선조나 인조와 크게 다를점이 없었다는 점과

사르후 전투에 조선의 정예군을 파병해서 모조리 말아먹었다는 점 등  

외교에 대해서도 지적할 면이 많긴 하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광해가 외교에 제법 신경쓰고 적절한 판단을 많이 내렸던건 맞아. 

후금에 위협을 어떻게 대비할지 심도있게 논의하는 기록들을 읽으면 

과연 이게 그 궁궐에 미친 폭군 광해군이 맞는가? 의문이 들 정도야.


문제는 내정이 조선 역사 500년 중에 뒤에서 원탑을 다툴 정도로 시궁창 그 자체였다는거지. 


위에서 말했듯이 군주의 정책활동은 크게 내치와 외치, 둘로 구분할 수 있고 

둘은 결코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걸 생각하면 

내치를 완전히 말아먹은 광해에게는 결코 종합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가 힘들어.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겠다고 열심히 머리 굴리고 계획 세우면 뭐해. 

나라 경제가 완전히 망해버려서 그걸 실행에 옮길만한 힘이 없는데 말야. 


그런데도 재평가 바람과 미디어의 영향으로 오늘날 광해군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는건 꽤 흥미로운 일이지. 

심지어 명군, 성군 소리를 하는 사람들까지 있으니, 한번 박힌 '이미지'라는게 참 무섭지. 

몇십년 혹은 몇백년 후에 광해는 또 어떻게 평가될지 상상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뎟) 혹시 "광해군은 폐위당한 왕이니 분명 후대에 기록이 조작된거 아닐까?"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실록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조작이 가능한 물건이 아니며 광해군일기는 중초본(초기본), 정초본(수정 및 완성본)이 동시에 존재하는 유일한 케이스야. 어디가 어떻게 수정된건지 초본과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신롸성이 높다는거지


그리고 조작의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광해군일기를 부정할거면, 광해군의 분명한 업적인 중립 외교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아버리지. 그것도 광해군일기에 적혀있는 거니까. 

Best Comment

BEST 1 Lincecum  
[@딜교장인] 광해가 앞뒤 병신들로 인해 버프받는건 사실인듯
BEST 2 정은지  
[@이름없음56] 그냥 대충 읽었습니다.......
학력은 높지 않으나 한능검1급은 받았습니다
그냥 제대로 읽지 않고 스르륵 내리며 읽어
제 불찰입니다 미안합니다
14 Comments
불량우유 2018.02.26 11:31  
광해군 너무 빠는것도 그런데 너무 까는것도 그르네
랜드마크 건설 말곤 나름 괜찮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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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교장인 2018.02.26 12:55  
광해군자체만 놓고보면 적어도 성군이 아닌건 맞지 다만 앞뒤로 선조와 인조가 역대급 병신이 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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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cecum 2018.02.26 20:11  
[@딜교장인] 광해가 앞뒤 병신들로 인해 버프받는건 사실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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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코리아 2018.02.26 13:20  
모르던 내용인데 좀 충격적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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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지 2018.02.26 13:25  
이거 야사임?
실록에 기록된 정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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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돌 2018.02.26 19:22  
[@정은지] 다시 읽어봐 답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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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지 2018.02.26 19:49  
[@순돌] ㄱㅅㄱㅅㅋㅋㅋㅋㅋㅋ
이름없음56 2018.02.26 19:23  
[@정은지] 국사 공부좀,,,
조선왕조실록인데 야사라고 물어보면,,,

럭키포인트 722 개이득

정은지 2018.02.26 19:49  
[@이름없음56] 그냥 대충 읽었습니다.......
학력은 높지 않으나 한능검1급은 받았습니다
그냥 제대로 읽지 않고 스르륵 내리며 읽어
제 불찰입니다 미안합니다
아연 2018.02.26 19:40  
궁궐에 집착한 거는 자기가 서자 출신 왕이라서라는 말이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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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탱크탑 2018.02.27 00:43  
[@아연] 그렇게 따지면 조선 왕 중에 서자 출신 아닌 놈 몇 없음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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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양 2018.02.27 09:44  
[@보라색탱크탑] 적장자가 별로 없어서 그렇지 적자출신은 많은걸로 알고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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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소리잘해요 2018.02.26 21:01  
역시 광해'군'인 이유가 있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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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양버루 2018.02.27 10:42  
오호.. 이걸 몰랐었구나
영화의 힘이 이렇게 큰건가?

광해군을 명군이라고 보는 시각은 보통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죠

내치 외치 다 ㅂㅅ이었죠
중립외교도 1만 3천 중 1만명 이상이 죽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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