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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유방, 항우, 한신의 전투전적과 승률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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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의 『사기』를 통해서 알아본 유방과 항우, 한신의 전투전적과 승률 입니다.


승리-초록색

무승부-보라색

패배-빨강색











 

유방(고조).jpg [초한지] 유방, 항우, 한신의 전투전적과 승률 비교


한 고조 유방




1. 진나라 사천군감, 사천 태수와의 전투


진의 사천군(泗川郡) 군감 평(平)이 병사를 거느리고 풍읍을 포위했으나 이튿날 나가 싸워 격파했다. 옹치(雍齒)에게 풍읍을 지키게 하고 병사를 데리고 설현으로 갔다. 사주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군사를 거느리고 설현(薛縣)으로 진격했다. 사천군 태수 장(壯)이 설현에서 패하여 척현(戚縣)으로 도망쳤다. 패공의 좌사마(左司馬) 조무상(曹無傷)이 사천태수 장을 잡아 죽였다.

-출처 : 고조본기-



2. 장한의 별장 사마이와의 전투에서 승리


진의 장수 장한(章邯)은 진왕(진섭)을 추격하고, 별장 사마이(司馬夷)는 병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초 땅을 평정한 다음 상현(相縣)을 함락시키고 탕현(碭縣)에 이르렀다. 동양 사람 영군과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소현(蕭縣) 서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병사를 수습하여 유현으로 돌아와 다시 모아 탕현을 공략하니 3일 만에 탕현을 취했다. 이에 탕현의 병사들을 거두니 5,6천에 이르렀다. 하읍(下邑)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군을 풍읍으로 돌렸다.

-출처 : 고조본기-



3. 성양 함락


항량은 패공과 항우에게 따로 성양(城陽)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서쪽으로 진의 군대를 복양(濮陽)의 동쪽에서 격파하니 진은 병사를 거두어 복양으로 들어갔다.

-출처 : 고조본기-



4. 항우와 함께 옹구를 공략하여 대파


진의 군대가 다시 병력을 정비하여 복양을 지키고 해자를 팠다. 초군은 이동하여 정도를 공략했다. 정도는 함락되지 않았다. 패공은 항우와 서쪽 땅을 공략하며 옹구에 이르러 진의 군대와 싸워 대파하고 이유(李由, 이사의 아들)의 목을 베었다.

-출처 : 고조본기-



5. 항우와 함께 외황을 공격하나 함락 실패


군을 돌려 외황(外黃)을 또 공격했지만 외황은 함락되지 않았다.​

-출처 : 고조본기-



6. 강리에서 진군을 격파


마침내 항우를 허락하지 않고 패공을 보내어 서쪽을 공략하게 하니 진왕과 항량의 흩어진 병졸을 수습하였다. 이어 탕현을 따라 성양(成陽)에 이르러 강리(杠里)의 진군과 보루를 끼고 진의 2군을 격파했다. 초의 군대도 출병하여 왕리를 공격하여 대파했다.

-출처 : 고조본기-



7. 창읍 공격 실패


패공은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다가 창읍에서 팽월과 만나 함께 진군을 공격했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철수하여 율현(栗縣)에 이르러 강무후(剛武侯)를 만나서 그의 군사 4천여 명을 빼앗아서 합쳤다. 위의 장수 황흔(皇欣), 사도(司徒) 무포(武蒲)의 군사와 함께 창읍을 공격했으나 창읍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서쪽으로 고양을 지나는데 역이기(酈食其)가 감문(監門)에게 "여러 장수가 이곳을 많이 지나갔지만 내가 보기에 패공이 대인이고 장자시오."라며 패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패공이 마침 침상에 걸터앉아 두 여자에게 발을 씻기게 하고 있었다.

-출처 : 고조본기-



8. 양웅과의 전투에서 승리


역생(역이기)은 절을 하지 않고 약간 길에 고개를 숙이면서 "족하께서 무도한 진을 반드시 토벌해야겠다면 그렇게 걸터앉아서 장자를 만나면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에 패공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며 사죄하고 상석에 앉혔다. 역이기는 패공에게 진류를 습격하여 진의 양식을 얻으라고 권했다. 이에 역이기를 광야군(廣野君)으로 삼고 역상(酈商)을 장수로 삼아 진류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께 개봉(開封)을 공격으나 개봉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다시 서쪽으로 전진하여 백마(白馬)에서 진나라 장수 양웅(楊熊)과 싸우고, 또 곡우(曲遇) 동쪽에서 싸워 대파했다.양웅이 형양으로 도망치니 진 2세가 사신을 보내 (양웅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렸다. 남쪽으로 영양(潁陽)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장량(張良)과 함께 한(韓)의 땅 환원(轘轅)을 공략했다.

-출처 : 고조본기-



9. 남양 태수 여의를 격파


이 즈음 조의 별장 사마앙(司馬卬)이 막 황하를 건너 함곡관에 진입하려고 했다. 패공은 바로 북으로 평음(平陰)을 공략하여 황하 나루를 끊었다. 그리고는 남하하여 낙양 동쪽에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회군한 뒤 양성에 이르러 군중의 기병을 수습하여 남으로 남양 태수와 여의(呂齮), 주현(犨縣) 동쪽에서 싸워 격파했다. 남양군이 공략당하자 남양태수 여의는 달아나 완성(宛城)을 지켰다. 패공이 병사를 이끌고 (완성을) 지나쳐 서쪽으로 가려 하자 장량이 "패공께서 서둘러 함곡관으로 진입하려 하시지만 진의 병사가 아직 많고 험한 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완성을 손에 넣지 못하면 완성이 뒤에서 공격하고 강력한 진이 앞에서 버티게 되니 이는 위험한 방법입니다."라고 직언했다.

-출처 : 고조본기-



10. 서진하여 석현,여현을 함락


이어 병사를 이끌고 서진하니 항복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단수(丹水)에 이르니 고무후(高武侯) 새(鰓)와 양후(襄侯) 왕릉(王陵)이 서릉(西陵)에서 투항했다. 다시 돌려 호양(胡陽)을 공략하고 파군(番君)의 별장 매현(梅鋗)과 함께 석현(析縣)과 여현(酈縣)을 항복시켰다. 위 사람 영창(寧昌)을 진에 사신으로 보냈으나 사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때 장한은 이미 조에서 군대를 거느리고 항우에게 투항했다.

-출처 : 고조본기-



11. 장량의 계책을 수용해 진군을 격파


조고가 진 2세를 시해한 뒤 사신을 보내 관중을 나누어 각자 왕이 될 것을 약조하려 했다. 패공은 이를 거짓으로 판단하여 바로 장량의 계책대로 역생과 육고(陸賈)를 보내 진의 장수들을 설득하고 이익을 유혹한 다음 바로 무관을 습격하여 격파했다. 또 진의 군대와 남전(籃田) 남쪽에서 싸웠는데, 가짜 병사와 깃발을 늘리고 지나는 곳에서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하니 진 사람들이 기뻐했고 진의 군사들은 해이해져 대파할 수 있었다. 또 그 북쪽에서도 싸워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마침내 무찔렀다.

-출처 : 고조본기-



12. 한신과 함께 장한을 격파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써서 옛길을 따라 돌아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장한은 진창(陳倉)에서 한을 맞이하여 공격했으나 옹(장한)의 군대가 패하여 도주했다.호치(好畤)에서 다시 싸웠지만 또 패하여 폐구로 도망쳤다.한왕이 마침내 옹 지역을 평정하고 동으로 함양에 이르러 병사를 이끌고 폐구에서 옹왕을 포위했다. 또 여러 장수들을 보내 농서, 북지, 상군을 공략하여 평정했다. 장군 설구(薛歐), 왕흡(王吸)에게는 무관을 나가 남양의 왕릉의 군대와 함께 태공과 여후를 패현에서 모셔오게 했다. 초가 이를 알고는 군대를 내어 양하에서 막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과거 오현 현령이었던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한의 군대를 막게 했다.

-출처 : 고조본기-



13. 하내 함락


3월, 한왕은 임진관(臨晉關)에서 황하를 건너자 위왕(魏王) 표(豹)가 병사를 이끌고 따랐다. 하내를 함락시키고 은왕을 포로로 잡은 다음 하내군을 두었다. 남으로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낙양에 이르렀다. 신성(新城)의 삼로(三老) 동공(董公)이 한왕을 가로막고는 의제가 죽은 상황을 말했다.한왕이 이를 듣고는 왼쪽 어깨를 드러낸 채 크게 통곡하고는 마침내 의제를 위하여 상을 발표하고 사흘 동안 곡하고는 사신을 보내 제후들에게 이렇게 알렸다.


"천하가 함께 의제를 옹립하여 북면하고 섬겼다. 지금 항우가 멋대로 의제를 강남에서 죽이니 대역무도한 짓이다. 과인 몸소 상을 발표하니 제후들은 모두 소복을 입으라. 관중의 병사를 모두 징발하고 삼하(하동, 하남, 하내)의 무리를 거두어 남으로 장강과 한수를 따라 내려갈 것이니 원컨대 제후왕들은 나를 따라 의제를 죽인 초를 공격하라!"

-출처 : 고조본기-



14. 팽성대


항우가 이를 듣고는 바로 군대를 끌고 제를 떠나 노현에서 호릉을 나와 소현에 이르러 한의 군대와 평성, 영벽(靈壁) 동쪽의 수수(睢水)에서 크게 싸워 한의 군대를 대파했다. 많은 사졸들이 죽어 수수가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어 한왕의 부모와 처자식을 잡아 군중에 인질도 잡아 두었다. 당시 제후들은 강한 초와 패한 한을 보고는 다시 한을 떠나 초 편에 붙었다. 새왕 사마흔이 도망쳐 초로 들어갔다.

-출처 : 고조본기-



15. 경색의 땅에서 초의 추격군 격퇴


4월에 팽성에 들어갔으나 초군의 반격을 받고 싸움에 패하여 제후군들은 흩어지고 한왕은 서쪽으로 귀환했다.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한왕과 형양(滎陽)에서 만나 초군을 경색(京索)의 땅에서 물리쳤다. 이로써 초나라 군사들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16. 형양 전투


한왕은 형양 남쪽에 주둔하면서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쌓아 오창(敖倉)의 양식을 거져왔다. 이렇게 항우와 1년 넘게 대치했다. 항우는 일쑤 한의 용도를 침탈하여 한의 군대 식량이 부족해지자 마침내 한왕을 포위했다. 한왕이 강화를 청하여 형양 서쪽을 한으로 땅으로 떼어달라고 했으나 항왕은 듣지 않았다. 한왕이 이것이 걱정이 되어 진평의 계책을 채용하여 진평에게 금 4만 근을 주고 초의 군신 사이를 이간질시켜 멀어지게 했다. 이에 항우는 아부(범증)를 의심했다. 이 때 아부는 항우에게 형양을 공격하자고 권했는데 자신이 의심받는 것을 보고는 화가 나서 나이를 핑계로 사직하여 고향을 돌아가길 원했다. 그러나 팽성에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한군의 식량이 바닥이 났다. 이에 밤중에 여자들 2천여 명에게 갑옷을 입혀 동문으로 나가게 했고 초는 사방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장군 기신(紀信)이 한왕의 수레를 타고 한왕인 것처럼 초를 속이니 초는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 동쪽으로 와서 구경했다. 이 사이에 한왕은 기병 수십과 서쪽 문을 통해 달아났다. (한왕은) 어사대부 주가(周苛), 위표(魏豹), 종공(樅公)에게 형향을 지키게 했는데, 따를 수 없는 장수와 병졸들은 모두 성안에 남아 있었다. 주가와 종공이 서로에게 "나라를 배반한 왕과는 성을 지키기 어렵다."며 위표를 죽였다.

-출처 : 고조본기-



17. 성고 전투


항우는 한왕이 완성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연 병사를 이끌고 남하했다. 한왕은 보루를 견고히 하고 싸우지 않았다. 이때 팽월이 수수를 건너서 항성(項聲), 설공(薛公)과 하비에서 싸우니 팽월은 초군을 대파했다. 항우는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팽월을 공격했고, 한왕도 병사를 이끌고 북으로 올라가 성고에 주둔했다. 항우는 팽월을 격파하고 한왕이 다시 성고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다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형양을 함락시키고는 주가와 종공을 죽이고 한왕(韓王) 신(信)을 포로로 잡아 드디어 성고를 포위했다.


한왕은 등공만 데리고 수레를 타고 성고의 옥문으로 탈출했다. 북으로 황하를 건너 말을 달려 수무에 묵었다. 스스로를 사신이라 하며 새벽에 말을 몰아 장이와 한신의 보루에 들어가 그들의 군대를 빼앗았다. 그리고는 장이를 북으로 보내 조 땅에서 병사들을 더 모으게 하고, 한신에게는 동쪽으로 제를 공격하게 했다. 한왕은 한신의 군대를 얻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병사를 이끌고 황하에 이르러 남쪽을 바라고보 소수무(小修武) 남쪽에 주둔하여 다시 싸우고자 했다. 낭중 정충(鄭忠)이 한왕을 말리면서, 보루와 참호를 높고 깊게 하고 싸우지 말라고 했다. 한왕은 그 계책에 따라 노관(盧綰), 유고(劉賈)에게 병사 2만, 기병 수백을 이끌고 백마진을 건너서 초 땅으로 들어가서는 팽월과 함께 연현(燕縣) 성곽 서쪽에서 다시 초의 군대를 치게 하여 마침내 양의 땅 10여 성을 다시 함락시켰다.

-출처 : 고조본기-



18. 조구와의 전투


한왕 4년(B.C 203), 항우는 해춘후 대사마 조구에게 "삼가 성고를 지켜라. 한이 도전해 오더라도 신중을 기하고 나가 싸우지 말라. 동쪽으로 못 나가게 하면 그만이다. 내가 보름이면 틀림없이 양 지역을 평정하고 다시 장군과 합류할 것이다."라고 일렀다. 바로 진류, 외황, 수양을 쳐서 함락시켰다. 한군이 과연 초군에게 몇 차례 도발했으나 초군은 나오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보내 대엿새 동안 욕을 해대자 대사마는 화가 나서 병사를 이끌고 사수를 건넜다. 사졸들이 반쯤 건넜을 때 한이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초국의 금은보화와 재물을 모조리 얻어갔다. 대사마 조구, 장사 사마흔은 모두 사수에서 스스로 목을 그어 자결했다. 항우가 수양에 이르러 해춘후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한군은 그 때 형양 동쪽에서 종리매(鍾離眛)를 포위하고 있었는데, 항우가 도착하자 모두 험준한 곳으로 달아났다.

-출처 : 고조본기-



19. 고릉 전투


항우가 해산하고 동쪽으로 돌아가자 한왕도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다가 유후(장량)와 진평의 계책에 따라 군대를 진격시켜 항우를 뒤쫓았다. 하양 남쪽에 멈추어 주둔하며 제왕 한신, 건성후 팽월과 날을 정해 합류하여 초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고릉까지 왔으나 이들이 오지 않았다. 초가 한의 군대를 공격하니 대패했다. 한왕이 다시 보루에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비에 들어갔다. 장량의 계책을 받아들이니 그제서야 한신과 팽월이 왔다. 유고가 초 지역으로 들어가 수춘을 포위했으나 한왕은 고릉에서 패했다. 이에 사람을 시켜 대사마 주은을 불러 구강의 군대를 동원하여 무왕(경포)을 맞아들여 성보를 도륙하게 하니 유고를 따라 제, 양의 제후들이 모두 해하에 대대적으로 모여들었다. 무왕 경포를 회남왕으로 세웠다.

-출처 : 고조본기-



20. 해하전투


한왕 5년(B.C 202), 한왕과 제후들은 일제히 초군을 향해 진격하여 해하에서 항우와 결전을 벌렸다. 제왕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대진했고, 그의 부장 공장군(孔將軍)은 좌익을, 비장군(費將軍) 우익을 맡았다. 한왕은 한신의 후위를, 강후 주발(周勃), 시장군(柴將軍)은 한왕의 배후에 주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한신의 본대가 먼저 초군과 회전에 들어갔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뒤로 후퇴했다. 그 틈을 타서 공장군과 비장군의 좌익과 우익이 초군의 양 측면을 공격했다. 이에 초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틈을 타서 후퇴를 하던 한신의 본대가 반격을 가함으로 해서 초군은 대패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부르는 초가가 들려오자 항우는 초나라의 모든 땅은 이미 한나라가 점령한 것으로 알았다. 이윽고 항우가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 초나라의 전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한왕의 명을 받은 기병대장 관영은 항우의 뒤를 쫓아가 동성(東城)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한군은 이 싸움으로 항우의 군사 8만의 목을 베고 초나라의 땅을 모두 공략했다.

-출처 : 고조본기-



21. 장도 토


10월, 연왕 장도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 지역을 공략했다. 고조는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에 나서 연왕 장도를 잡고 바로 태위(太尉) 노관(盧綰)을 연왕으로 세웠다. 승상 번쾌(樊噲)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대를 공략하게 했다.

-출처 : 고조본기-



22. 이기 토벌


이해 가을, 이기(利幾)가 모반했다. 고조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치자 이기는 달아났다. 이기는 항우의 장수였다 항우가 패할 때 이기는 진현의 현령이었는데 항우를 따르지 않고 고조에게 도망쳐와 투항하여 고조가 영천후에 봉했다. 고조가 낙양에 이르러 명부의 제후들을 모두 부르자 이기가 겁을 먹고 반란을 일으켰다.

-출처 : 고조본기-



23. 백등산 전투


7년(B.C 200),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 신을 공격하자, 신은 이 틈에 태원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백토(白土)의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도 옛 조의 장수였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워 모반했다. 고조가 몸소 가서 그들을 쳤다. 때가 겨울이라 사졸들 열에 두 셋은 손가락이 얼어 떨어져 나갔다. 결국 평성(平城)으로 물러났는데 흉노는 고조를 평성에서 포위했다가 7일만에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번쾌에게 대 지역에 남아서 평정하게 하고 형님 유중(劉仲)을 대왕으로 세웠다.

-출처 : 고조본기-



24. 경포 토벌


가을 7월,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동쪽으로 형왕 유고의 봉지를 합병하고 북쪽으로 회하를 건너자 초왕 유교가 설현(薛縣)으로 도망쳐왔다. 고조가 직접 가서 공격하고 아들 유장(劉長)을 회남왕으로 세웠다.

12년(B.C 195) 10월, 고조는 경포의 군대를 회추(會甀)에서 격퇴시켰다. 경포가 달아나자 별장에게 그를 추격하게 했다.

-출처 : 고조본기-




총 전적) 24전 17승 2무 5 승률-약 70.8%
전략적 실패 의미가 없던 외항성 공략, 창읍성 공략 제외시 약 77.3%














항우.jpg [초한지] 유방, 항우, 한신의 전투전적과 승률 비교

서초패왕 항우




1. 양성 함


항량은 즉시 본대를 이끌고 설(薛)로 들어간 다음 패전 책임을 물어 주계석을 죽였다. 항량이 그 전에 항우(項羽)를 시켜 별동대를 이끌고 가서 양성(襄城)을 공격하게 했으나, 진나라 병사들이 굳게 지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윽고 양성이 함락되자 항우는 성안 사람들을 모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죽였다.
-출처 : 항우본기-



2. 성양 함


항량은 패공과 항우에게 따로 성양(城陽)을 공격하여 도륙하고, 서쪽으로 진의 군대를 복양(濮陽)의 동쪽에서 격파하니 진은 병사를 거두어 복양으로 들어갔다.
-출처 : 항우본기-



3. 옹구 함락


패공과 항우가 바로 정도(定陶)를 공격했으나 정도가 함락되지 않자 그곳을 떠나 서쪽을 공략하여 옹구(雍丘)에 이르러 진군을 대파하고 이유(李由)의 목을 베었다.
-출처 : 항우본기-



4. 외항 공격 실


패공과 항우는 외황을 떠나 진류를 공격했으나 외항이 단단히 지키는 통에 함락시킬 수 없었다.
-출처 : 항우본기-



5. 거록대전


항우가 경자관군 송의를 죽이자 그 위세는 초나라를 진동시키고 그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즉시 당양군(當陽郡)과 포장군(蒲將軍)에게 2만의 군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너 거록(鉅鹿)의 조군을 구원하도록 했다. 두 사람은 진군과 싸워 하수 북쪽 강안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진여가 다시 사자를 보내 원병을 청하자 휘하의 모든 군사를 이끌고 하수를 건넌 항우는 배를 강물 속에 가라앉히고, 솥을 깨고, 막사를 불태운 후에 3일 치의 양식만을 지참케 하여 사졸들에게 필사의 의지를 보임으로써 두 마음을 품을 수 없도록 했다.


이윽고 항우의 초군은 왕리의 진군(秦軍)과 회전에 들어가 아홉 번 싸워 모두 이기고 장한이 건설한 용도(甬道)를 끊어 대승을 거두었다. 진장 소각(蘇角)은 싸움 중에 살해당하고 왕리는 항우의 포로가 되었다. 또한 섭간(涉間)은 초군에게 항복하지 않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죽었다. 이로써 초군은 다른 제후군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때 조군을 구원하기 위해 거록으로 달려온 제후들이 세운 영채는 10여 개가 있었으나 아무도 군사를 이끌고 출격하여 진군과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초군이 진군을 공격하자 제후군의 장수들은 모두 영루의 높은 곳에 올라가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초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윽고 진군을 대파한 항우는 제후군을 이끌던 장수들을 불러 회견한 다음 원문(轅門)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은 그 앞을 지나갈 때 허리를 굽히고 아무도 감히 그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했다. 항우는 이로써 제후군의 상장군이 되었고, 제후들은 모두 항우에게 귀속되었다.
-출처 : 항우본기-



6. 오수 전투


장한은 주저하다가 몰래 항우에게 후시성(侯始成)을 보내어 협약하려고 했다. 협약이 성사되기 전에 항우는 포장군에게 밤낮으로 병사를 이끌고 삼호(三戶)를 건너서 장하 남쪽에 주둔하게 하고는 진과 싸워 다시 격파했다. 항우는 모든 병사를 이끌고 오수(汙水)에서 진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출처 : 항우본기-



7. 전영 격퇴


한(漢) 2년(B.C 205) 겨울, 항왕이 거느린 초군이 성양(城陽)에 이르자, 제왕 전영 역시 제군을 이끌고 나와 초군과 조우했다. 양군이 회전에 들어갔으나 싸움에서 패한 전영은 평원(平原)으로 달아났다. 평원의 백성들이 전영을 죽였다.
-출처 : 항우본기-



8. 제나라 공략 실패


이에 초군의 만행에 분개한 제나라 사람들이 서로 모여들어 반기를 들었다. 이때 전영의 동생 전횡(田橫)이 제나라의 도망병 수만 명을 수습하여 성양에서 몸을 일으켰다. 항왕이 제 땅에 남아 성양을 여러 차례 공격했으나 결코 함락시킬 수 없었다.
-출처 : 항우본기-



9. 팽성대


한(漢) 2년(B.C 205) 봄, 한왕(漢王)이 다섯 제후들의 군사, 모두 합해 56만 명을 이끌고 초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항우가 그 소식을 듣고 휘하의 장수들로 하여금 제나라를 계속 공격하도록 하고 자기는 정예병 3만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노현(魯縣)을 지나 호릉(胡陵)으로 나왔다. 4월 한왕(漢王)이 이미 팽성(彭城)에 들어가 그곳의 보물들과 미인들을 모두 거두고, 이어서 매일 주연을 열어 빈객들과 즐겼다. 이에 항우는 새벽에 서쪽의 소현(蕭縣)에서 출발하여 한군을 공격하면서 계속해서 동진하여 팽성에 이르고 정오 무렵에는 한군과 싸워 크게 무찔렀다. 한군은 무너져 모두 앞서기니 뒤서거니 도망치다가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 빠졌다. 항우는 이 싸움에서 한군 10여 만을 죽였다. 모두 남쪽으로 달아난 한나라의 패잔병을 초군이 뒤를 추격하여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렀다. 한군은 퇴각하여 초군에게 쫓기게 되자 수많은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고 그 중에 10여 만의 군졸들은 수수로 뛰어 들었다. 이로써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출처 : 항우본기-



10. 형양 전투


팽성을 구원한 항왕이 한왕을 추격해 형양에 이르니, 전횡도 제를 수습하여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제왕으로 세웠다. 한왕이 팽성에서 패하자 제후들이 죄다 다시 한을 배반하고 초에게로 붙었다. 형양에 주둔한 한은 황하로 통하는 용도(甬道)를 축조하여 오창(敖倉)에서 양식을 조달했다. 한 3년, 항왕이 한의 용도를 계속 침공하여 식량을 빼앗았고, 식량 부족을 걱정한 한왕이 강화를 요청하여 형양 서쪽을 떼어 한의 땅으로 삼고자 했다.


항왕이 이를 받아들이려 하자 역양후(歷陽侯) 범증은 "한은 상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지금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틀림없이 후회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항왕은 바로 범증과 함께 서둘러 형양을 포위했다. 한왕은 이것이 걱정이 되어 곧 진평의 계책을 이용하여 항왕을 이간하기로 했다. 항왕의 사신이 오자 (최고의 대접인) 태뢰구(太牢具)를 준비시켜 내놓았다가 사신을 보고는 짐짓 놀란 척 하며 "나는 아부(범증)의 사신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항왕의 사신이었군."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상을 물리고 형편없는 음식으로 항왕의 사신을 대접했다. 사신은 돌아와서 항왕에게 보고했고, 항왕은 바로 범증과 한왕이 사사로이 내통하고 있는 것으로 의심하여 조금씩 (범증의) 권력을 빼앗았다. 범증은 크게 노하며 "천하의 일이 크게 정해졌으니 군왕 스스로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늙어 죽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항왕이 이를 허락했다. (그러나 범증은) 미처 팽성에 이르기도 전에 등에 등창이 도져 죽었다.


한의 장수 기신(紀信)은 한왕에게 "일이 이미 급해졌습니다. 제가 왕으로 꾸며 초를 속이면 왕께서는 그 사이에 빠져나가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한왕은 밤중에 여자들을 형양 동문으로 내보냈는데 갑옷을 입은 2천 명이었다. 초군이 사방에서 공격해왔고, 기신은 (왕이 타는) 황옥거(黃屋車)에 좌독(左纛)을 달고는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져서 한왕이 항복한다."라고 말했다. 초군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이 때 한왕도 기병 수십 명을 데니로 성 서쪽 문으로 빠져나가 성고(成皐)로 달아났다. 항왕이 기신을 보고 "한왕은 어디 있느냐?"라고 묻자 기신은 "한왕은 이미 빠져 나가셨소."라고 하고 답했다. 항왕은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출처 : 항우본기-



11. 성고 전투


한왕은 형양을 벗어나 남쪽 완(宛)과 섭(葉)으로 달아나 구강왕 경포를 만나 군을 수습하여 다시 성고로 들어와 지켰다. 한 4년(B.C 203), 항왕이 진군하여 성고를 포위하자 한왕은 (다시) 도망쳤다. 등공과 혼자 성고 북문을 나서 황하를 건너 수무(修武)로 달아나 장이와 한신의 군대를 따랐다. 여러 장수들도 조금씩 성고를 빠져나와 한왕을 따랐다. 초군은 마침내 성고를 함락시키고 서진하려 했다. 한군은 병사를 보내 공(鞏)에서 막아 초군이 서진하지 못하게 했다.
-출처 : 항우본기-



12. 유고와 팽월을 격파


이때 팽월이 황하를 건너서 동아에서 초를 공격하여 초의 장군 설공(薛公)을 죽였다. 이에 항왕이 직접 동쪽으로 팽월을 공격하자 한왕은 회음후(淮陰侯)의 군대를 얻어 황하를 건너 남하하려 했다. 정충(鄭忠)이 한왕에게 유세하여 이를 그만두고 하내(河內)에 방벽을 쌓고 유고(劉賈)에게 병사를 이끌고 팽월을 도와 초의 식량에 불을 지르게 했다. 항왕이 동진하여 이들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팽월을 패주시켰다. 이에 한왕은 병사들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서 다시 성고를 빼앗은 다음 광무에 주둔하며 오창의 양식을 먹었다. 항왕이 동해를 평정하고 서진하여 한군과 더불어 광무에 주둔하고는 서로 몇 달을 대치했다.
-출처 : 항우본기-



13. 외항 함락


항왕은 회음후가 이미 하북을 함락시키고 제와 초를 격파한 다음 초를 공격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는 용저(龍且)에게 가서 그를 공격하게 했다. 회음후가 더불어 싸우고 있는데 기장(騎將) 관영(灌嬰)이 공격하여 초군을 대파하고 용저를 죽였다. 이에 한신은 제왕(齊王)으로 자립했다. 항왕은 용저의 군대가 격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우이(盱台) 사람 무섭(武涉)에게 회음후를 설득하게 했으나 회음후는 듣지 않았다. 이때 팽월이 다시 반란을 일으켜 양 지역을 함락시키고 초의 양시로를 끊었다. 항왕은 바로 해춘후 대사마 조구 등에게 "성고를 잘 지키기만 해라. 한이 도전을 해와도 신중을 기하며 더불어 싸우지 말고 동쪽으로 못오게만 하면 된다. 내가 보름이면 팽월을 충분히 죽이고 양 지역을 평정한 다음 다시 장군과 합류할 것이다."라고 했다. 항우는 즉시 동쪽으로 나아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다. 그러나 외항은 쉽게 함락되지 않다가 며칠이 지나서야 항복했다. 항왕이 노하여 외항의 15세 이상 되는 성인 남자 모두를 성의 동쪽 끝으로 끌고 가서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라고 명했다.


당시 외황(外黃) 현령(縣令)의 문객들 중에 13살 난 아들을 둔 사람이 있었다. 그 아이가 항우를 찾아가 말했다.


"강포(强暴)한 팽월이 범하려고 해서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 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항왕이 그 아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외황의 백성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는 생각을 거두고 용서했다. 이윽고 항우의 군대가 동쪽으로 진격하자 외항과 수양(睢陽)에 이르기까지 그 소문을 들은 양나라의 성들은 모두 다투어 항복해 왔다.
-출처 : 항우본기-



14. 고릉 전


한 5년(B.C 202), 한왕이 항왕을 양하 남쪽까지 추격하여 군을 멈춘 다음, 회음후 한신, 건성후 팽월과 시간을 정해 함께 초군을 치기로 했다. 고릉(固陵)에 이르도록 한신과 팽월의 군대가 오지 않자 초가 한군을 공격하여 대파했다. 한왕은 다시 진지로 들어가 참호를 깊이 파고 수비에 돌입했다.
-출처 : 항우본기-



15. 해하전투


제왕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대진했고, 그의 부장 공장군(孔將軍)은 좌익을, 비장군(費將軍) 우익을 맡았다. 한왕은 한신의 후위를, 강후 주발(周勃), 시장군(柴將軍)은 한왕의 배후에 주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한신의 본대가 먼저 초군과 회전에 들어갔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뒤로 후퇴했다. 그 틈을 타서 공장군과 비장군의 좌익과 우익이 초군의 양 측면을 공격했다. 이에 초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틈을 타서 후퇴를 하던 한신의 본대가 반격을 가함으로 해서 초군은 대패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부르는 초가가 들려오자 항우는 초나라의 모든 땅은 이미 한나라가 점령한 것으로 알았다. 이윽고 항우가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 초나라의 전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한왕의 명을 받은 기병대장 관영은 항우의 뒤를 쫓아가 동성(東城)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한군은 이 싸움으로 항우의 군사 8만의 목을 베고 초나라의 땅을 모두 공략했다.
-출처 : 고조본기-


이윽고 항왕이 말에 올라타니 휘하의 부하 장사들 중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800여 명에 달했다. 그들은 그날 밤 곧바로 한군의 포위망을 남쪽에서 뚫고 달아났다. 날이 밝자 한군은 비로소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에 기병대장 관영(灌嬰)에게 명하여 5천의 기병을 이끌고 항우의 뒤를 추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말을 타고 뒤를 따를 수 있는 군사는 100여 명에 불과했다. 항우의 일행이 음릉(陰陵)에 이르러 길을 잃어버리고 밭을 가는 늙은 농부에게 물었다. 농부가 항우를 속여 왼쪽이라고 가르쳐줬다. 항우의 일행은 결국은 커다란 늪지대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한군은 항우의 일행을 따라 잡을 수 있었다. 항우가 즉시 일행과 함께 동쪽으로 나아가 동성(東城)에 이르니 따르는 군사들은 겨우 28기로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수천의 한나라 기병은 항우의 뒤를 계속 추격했다. 한군의 추격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 항우가 말을 타고 그의 뒤를 따르던 군사들을 향해 말했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겪었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었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해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이 없어 이로써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희들로 하여금 알게 해주겠다."


항우는 그를 따르던 기병을 4대로 나누어 네 방향으로 향하게 했다. 그때 한군은 항우와 그 일행을 여러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항우가 그 기병들에게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저 한군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가 그 수하 기병들에게 사면으로 돌격하여 포위망을 뚫게 되면 산 너머 동쪽의 세 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항우가 드디어 큰 고함소리를 지르며 한군을 향해 돌격하자 한군은 모두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지리멸렬했다. 항우가 그 와중에 한군 장수 한 명의 목을 베었다. 그때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가 기병대장이 되어 항우의 뒤를 추격하고 있었다. 항우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적천후를 꾸짖자 사람과 말이 모두 놀라 몇 리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항우가 그 기병들과 함께 약속한 세 곳에서 만났다. 한군은 항우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 추격군을 3대로 나누어 초군이 달아난 곳을 멀리서 포위했다. 항왕이 다시 한군을 향해 돌격하여 도위(都尉) 한 명을 참살하고 백여 명의 군사들을 죽였다. 초군이 다시 모이니 그 중 죽은 군사는 단지 2명에 불과했다. 항우가 자신의 군사들을 향해 물었다.

"자 내가 한 말이 어떠냐?"


항우의 군사들이 모두 말했다.
"과연 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출처 : 항우본기-




총 전적) 15전 12승 2무 1패 승률-80%
전략적 실패 의미가 없던 반진항쟁 당시 외항 공격과 제나라 공략 제외시 약 92.3%





















한신.jpg [초한지] 유방, 항우, 한신의 전투전적과 승률 비교

대장군 한신




1. 유방과 함께 장한을 격파하여 삼진을 평정


8월, 한왕이 한신의 계책을 써서 옛길을 따라 돌아서 옹왕 장한을 습격했다. 장한은 진창(陳倉)에서 한을 맞이하여 공격했으나 옹(장한)의 군대가 패하여 도주했다.호치(好畤)에서 다시 싸웠지만 또 패하여 폐구로 도망쳤다.한왕이 마침내 옹 지역을 평정하고 동으로 함양에 이르러 병사를 이끌고 폐구에서 옹왕을 포위했다. 또 여러 장수들을 보내 농서, 북지, 상군을 공략하여 평정했다. 장군 설구(薛歐), 왕흡(王吸)에게는 무관을 나가 남양의 왕릉의 군대와 함께 태공과 여후를 패현에서 모셔오게 했다. 초가 이를 알고는 군대를 내어 양하에서 막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과거 오현 현령이었던 정창을 한왕으로 삼아 한의 군대를 막게 했다.

-출처 : 고조본기-


한왕이 한신의 말에 대단히 기뻐하며 자기가 한신을 너무 늦게 만났다고 생각했다. 한왕은 즉시 한신의 계책을 받아들여 제장들을 각 부서에 정하고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진격했다. 8월, 한왕이 군사를 일으켜 진창(陳倉)으로 나아가 삼진(三秦)을 평정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2. 위와 하남을 평정하다


한 2년(B.C 205), 한군이 함곡관(函谷關)을 나가 위(魏)와 하남(河南)을 점령했다. 이에 한왕(韓王)과 은왕(殷王)이 모두 항복했다. 제(齊)와 조(趙) 두 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로 진격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3. 경색의 땅에서 초의 추격군을 격퇴


4월에 팽성에 들어갔으나 초군의 반격을 받고 싸움에 패하여 제후군들은 흩어지고 한왕은 서쪽으로 귀환했다.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한왕과 형양(滎陽)에서 만나 초군을 경색(京索)의 땅에서 물리쳤다. 이로써 초나라 군사들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할 수 없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4. 안읍의 전투로 위를 평정하다


6월 위왕(魏王) 표(豹)가 부모의 병문안을 위해 하동으로 들어가자 즉시 하수를 건너는 관문을 끊더니 한나라에 반기를 들고 초나라에 붙었다. 한왕이 역생(酈生)을 보내 위표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8월 한왕이 한신을 좌승상으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위왕 표(豹)가 포판(蒲坂)에 수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임진(臨晉)에서 도하(渡河)하려는 한군을 막으려고 했다. 이에 한신은 의병을 더욱 많이 세우고 수많은 배를 도열시켜 임진에서 도하하려는 것처럼 보이고, 복병을 빼서 북쪽의 하양(夏陽)으로 돌려 나무구유[목앵(木罌)]를 이용하여 하수를 도하한 다음 안읍을 기습했다. 대경실색한 위왕 표가 군사를 움직여 한신의 군대를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앞뒤에서 협공을 받은 위군은 일거에 무너지고 위왕 표는 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한신은 위나라를 평정하고 그 땅에 하동군을 설치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5. 정형전투


한왕이 장이와 한신에게 군사를 주어 둘이 함께 동쪽으로 진격하여 조(趙)와 대(代)를 공격하도록 했다.
9월 한신의 한군이 대군을 격파하고 연여(閼與)에서 그 재상 하열(夏說)을 사로잡았다. 한신이 위나라를 항복시키고 대나라를 파하자 한왕은 즉시 사자를 보내 한신의 군사들 중 정예병들 차출하여 형양으로 데려가 초군을 막도록 했다.
한신과 장이는 수만의 병력으로 동쪽으로 계속 진격하여 정형(井陘)으로 나아가 조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한신이 한군을 이끌고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조왕(趙王)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호칭 20만에 달하는 조나라의 전군을 동원하여 정형구로 나아갔다.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성안군에게 말했다.


"제가 들으니 한나라 장수 한신이 서하(西河)를 건너 위왕(魏王) 표(豹)를 사로잡은 다음 계속 진격하여 대(代)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그 재상 하열을 포로로 잡아 연여의 땅을 피로 물들였다고 합니다. 오늘 다시 장이의 보좌를 받은 한신은 조나라를 함락시키려는 계책을 정하고 그 승세를 타고 본국을 떠나 원정길에 나섰으니, 우리 조군은 한나라 군사들의 예봉을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는, 천 리 밖에서 군량을 운송하여 먹는 군사들은 그 얼굴에 주린 기색을 띄우고, 또한 장작을 패고 풀을 베어 불을 지펴야만 밥을 해 먹을 수 있는 군사들은 항상 굶주려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정형의 길목에 이르러 수레는 움직이지 못하고, 전마는 열을 이루지 못한 채 그 행렬이 수백 리에 뻗치고 있는 한군의 양식은 필시 후방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저에게 기병 3만만 맡겨주시면 지름길로 나아가 한군의 치중을 끊어놓겠습니다. 장군께서는 그저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여 진영을 굳게 지켜 한군의 도전에 응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한군은 전면의 우리 조군과 싸우지도 못하고, 또한 퇴각하려고 해도 우리의 기병이 그 뒤를 끊게 되어 한군은 결국 진퇴양난에 빠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더욱이 이 정형의 들판은 황무지라 아무 것도 취할 수 없어 10여 일도 못되어 한군은 무너지고 한신과 장이 두 장수의 목을 장군의 막사에 가져다 놓을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저의 계책을 유의하여 결정하시기 바라며, 만약 제 계책을 버리신다면 우리는 오히려 한신에게 사로잡히는 몸이 될 것입니다."


원래 유자(儒者) 출신의 진여는 군자는 적군을 속이는 계략이나 기묘한 계책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진여가 말했다.
"나는 병법에 아군의 수효가 적군의 10배가 되면 포위하고, 2배가 되면 싸우라고 한 구절을 알고 있소. 오늘 한신의 군사는 수만 명에 달한다고 하나, 사실은 기 천 명에 불과하오. 천리 길을 달려와 우리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들은 피로에 지쳐있소. 오늘 우리가 피로한 그들을 피해 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후에 진짜로 대군이 조나라를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어떻게 싸우겠소. 우리들을 비겁하다고 생각한 제후들은 가볍게 보고 침략해 올 것이오."
진여는 결국은 광무군의 계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신이 사람을 보내 조나라의 사정을 정탐하게 한 바, 광무군의 계책이 채용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며, 곧바로 군사들을 인솔하고 정형관(井陘關)을 향해 진격했다. 한군은 정형구(井陘口) 30리 밖에서 행군을 멈추고 숙영했다. 이윽고 밤이 되자 한신은 전령을 내보내 경기병 2천 명을 선발하여, 매 군사마다 붉은 색 깃발을 한 개씩을 지참하고 사잇길을 이용하여 산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기고 조군의 동태를 살피도록 명령하고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을 했다.

"조군이 우리 한군이 도망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들은 모두 자기들 진영을 비워놓고 우리들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비호같이 조나라 진영으로 들어가 그들의 깃발을 뽑아 버리고 우리 한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워라."


그리고 그의 비장(裨將)들에게 명령을 전달하여 식사를 준비하여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자기의 명을 전달했다.

"오늘 조군을 무찌른 다음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나 한신의 부하 장수들은 모두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단지 겉으로만 명령을 받들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다시 한신이 휘하의 군관들에게 말했다.

"조군은 우리보다 먼저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는 보루를 지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부대에 대장기와 북이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선봉대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험악한 지형을 만나면 돌아가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한신은 군사들 중 만 명을 선발하여 선봉대로 삼아 정형구로 진격하게 하고 자기는 본대와 함께 물을 등지고 전투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정형구의 높은 지대의 보루에서 한군의 진영을 멀리서 조망하고 있던 조나라 군사들은 한군이 병법에 무지하다고 하면서 큰 소리로 비웃었다. 이윽고 새벽이 되어 날이 밝아오자 한신은 선발대에게 명하여 대장기와 의장을 꽂고, 북소리를 힘차게 두드리며 정형구를 향해 진군시켰다. 보루의 문을 열고 나온 조군이 한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자 한조 양군은 회전에 들어가 오랫동안 격전을 벌렸다. 그러다가 한신과 장이는 군사들에게 대장기와 의장을 버리고 달아나도록 명하여 배수의 진을 치고 있던 본대로 향해 후퇴하도록 했다. 강가에 주둔하고 있던 본대가 영문을 열고 한신과 장이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조군이 과연 그들의 보루를 비워놓고 한나라의 대장기와 의장들을 서로 다투어 차지하기 위해 한군의 뒤를 추격했다.

그러나 한군의 선발대를 맞아들인 강안의 한군 본대는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 결사적으로 조군의 공격에 대항했음으로 결코 격파할 수 없었다. 그때 한신이 미리 조군 진지 부근에 매복시켜 놓은 2천 명의 경기병들은 조군이 그들의 진지를 비워놓고 모두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진지 밖으로 출동하자, 그 틈을 타서 신속하게 조군의 보루로 들어가 그들의 기치를 모두 뽑아 버리고 2천 개의 붉은 한나라 깃발을 세웠다. 그때 이미 조군은 한군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도 없고, 또한 한신 등의 한나라 장수들을 사로잡을 수도 없게 되어 일단은 자기들 보루로 돌아가려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본영에 한나라의 붉은 기가 꽂혀 있는 모습을 본 조군은 조왕과 장수들이 모두 한군의 포로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곧이어 조군은 혼란에 빠지더니 모두 제각기 대열에서 이탈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나라 장수들이 달아나는 병사들 중 몇 명의 목을 베었지만 결코 막을 수 없었다. 마침내 한군은 앞뒤에서 협공하여 조군을 크게 무찔렀다. 계속해서 달아나던 조군의 뒤를 추격하여 저수(泜水)의 강안에서 성안군 진여의 목을 베고, 조왕 헐(歇)은 사로잡았다.


전투가 끝나자 한신은 군중에 광무군을 죽이지 말라는 영을 내렸다. 그리고 그를 사로잡아 오는 자가 있다면 천금의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이윽고 일단의 군사들이 광무군을 묶어 대장군 막사로 끌고 왔다. 광무군의 포박을 풀어 상석을 권한 한신이 서로 마주 앉아 가르침을 청했다.


여러 장수들이 전투 중에 얻은 적군의 수급과 노획물을 바치며 승리를 축하하고는 한신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병법에 '오른쪽으로는 산이나 구릉을 뒤로 등지고 왼쪽으로는 강이나 호수를 앞으로 임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병법의 가르침과는 달리 배수진을 치라 명하시면서 말씀하기를 조나라 군사들을 무찌르고 배불리 먹자고 하셨습니다. 저희들은 마음속으로 수긍하지 않다가 결국은 싸움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전술입니까?"


한신이 대답했다.
"배수진의 병법도 병서에 나와 있소. 단지 장군들이 깨닫지 못해서일 뿐이오.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않소? '사지(死地)에 빠뜨려야만 살게 할 수 있고, 망지(亡地)에 두어야만 일어서게 할 수 있다.'라고. 우리 한군의 군사들은 평소에 훈련을 받은 사대부 출신이 아니라 시장바닥의 사람들을 끌어 모은 오합지중이니, 그들 각각을 스스로를 위해 힘껏 싸우게 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을 준다면, 그들은 모두 도망치기 바빴을 것이오. 그런 군사들은 사지가 아니면 결코 싸움에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오."


여러 장수들은 탄복하며 말했다.
"정말로 훌륭하십니다. 저희들은 도저히 장군의 생각에 미치지 못하겠습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6. 초의 기습을 격퇴하고 조를 평정시키다


한신이 광무군의 계책이 매우 훌륭하다고 말하고 그의 말을 쫓아 연나라에 사자를 보내자, 연나라는 바람에 쓰러지는 풀잎처럼 모두 한나라에 항복했다. 곧바로 한왕에게 사자를 보내 조와 연 두 나라를 점령한 일을 고하고, 장이를 조왕으로 세워 조나라를 안정시키라고 상주했다. 한왕이 허락하자 한신은 장이를 조왕으로 세웠다.


초나라가 빈번히 하수를 건너 조나라를 기습하자 조왕 장이와 한신은 그때마다 달려가 조나라를 구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여 조나라의 성읍을 평정한 후에 그곳의 군사들을 징발하여 한왕에게 구원군으로 보냈다. 초나라가 바야흐로 한왕을 형양에게 포위하여 맹공을 가하자 한왕은 남쪽의 완(宛)과 엽(葉)으로 달아났다.

-출처 : 회후 열전-



7. 제의 군세를 역하에서 기습하여 역이기를 죽게하다


한신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아가 제나라의 평원(平原)으로 진격하기 위해 하수를 미처 건너기 전에 한왕이 역이기(酈食其)를 사자로 보내 유세로써 제나라를 항복시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신이 제나라로의 진격을 멈추려고 했다. 그때 범양(范陽)의 변사 괴통(蒯通)이 한신에게 말했다.


"장군이 한왕의 조칙을 받아 제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진격하고 있는데, 한왕은 장군에게 통고도 하지 않고 밀사를 보내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장군에게 공격을 중지하라는 조칙이 어디에 있습니까? 무슨 이유로 진격을 멈추려고 하십니까? 다른 한편 일개 서생에 불과한 역이기 한 사람이 편안히 수레를 타고 가서 제나라의 70여 개 성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장군께서는 수만의 군졸을 거느리고 일 년여의 긴 시간 동안 고작 조나라 50여 개의 성의 항복을 받았을 뿐입니다. 장군이 되신 지 벌써 몇 해가 지났는데 그 세운 공이 한낱 일개 서생에 불과하단 말입니까?"


괴통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한신은 그 계책을 쫓아 하수를 건넜다. 그때 제나라는 이미 역이기의 유세에 설복되어 한나라에 항복하기로 하고 제군의 진영에 머무르게 한 역이기를 위해 주연을 마련하여 서로 마시며 한군에 대한 방어태세를 풀고 있었다. 이에 한신은 역하(歷下)에 주둔하고 있던 제군을 기습하고 패주하는 적의 뒤를 추격하여 임치에 이르렀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가 자기를 속였다고 생각하고 그를 삶아 죽이고 고밀(高密)로 달아나면서 사자를 초나라에 보내 구원을 청했다. 임치에 입성하여 백성들을 위무한 한신은 계속해서 전광의 뒤를 추격하여 고밀에 이르렀다. 초나라 역시 용저(龍且)를 대장으로 삼아 호칭 20만의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출처 : 회후 열전-



8. 유수의 전투로 용저를 죽이고 제를 멸망시키다


제나라의 전광과 초장 용저가 휘하의 군사들을 합하여 한신의 한군과 교전에 들어가기 전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먼 길을 원정해 온 한군은 전투에 임하면 있는 힘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그 예봉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반면에 자기들의 땅에서 싸우는 제와 초 두 나라 군사들은 쉽게 패하고 흩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보루를 높이 세워 굳게 지키며 한편으로는 제왕을 시켜 한군에게 항복한 제나라 성읍에 믿을만한 신하들을 사자로 보내 그들을 돌아오게 하십시오. 항복한 성들이 그들의 왕이 살아있고, 게다가 초나라의 구원병이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필시 한나라에 반하여 우리에게 투항해 올 것입니다. 2천 리 밖에 근거지가 있는 한나라 군사들은 그 후방의 제나라 성들이 모두 반기를 들게 된다면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은 아무 데에서도 구할 수 없게 되어 자연히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용저가 듣고 말했다.

"나는 평소에 한신이라는 위인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그와의 싸움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 용저가 제나라를 구원하려고 왔으면서 싸우지도 않고 그들을 항복시킨다면 어찌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오늘 싸움은 우리가 이기게 될 것이고 그때는 제나라 땅의 반은 수복하게 된다. 어찌 싸우기를 멈춘단 말인가?"


용저는 즉시 교전에 들어가기로 하고, 유수(濰水)를 사이에 두고 한군과 대치했다. 한신은 곧 야음을 틈타 군사들에게 명하여 만 개의 부대를 만들어 그 안에 모래를 가득 채우게 한 후에 강의 상류 쪽으로 가서 물길을 막게 했다. 그리고는 군사를 이끌고 용저의 초군을 공격하기 위해 강을 반쯤 건너다 일부러 싸움에 패하여 자기 진지로 달아는 척 했다. 용저가 과연 희희낙락하며 말했다.

"나는 원래 한신이라는 위인이 겁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용저는 한신의 한군 뒤를 추격하기 위해 유수의 강심으로 그 군사들을 들여보냈다. 이에 한신이 사람을 보내 상류 쪽에 모래부대로 막아 놨던 제방을 터뜨리게 하자 큰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용저의 군사들 중 절반 이상은 미처 강을 건너지 못하고 물살에 떠내려갔다. 한신이 그 틈을 이용하여 남은 용저의 군대에 맹공을 가해 용저를 잡아 살해했다. 용저가 죽자 유수의 동쪽에 남아 있던 초군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제왕 전광도 도망치는 방법 외는 다른 수가 없었다. 한군이 남쪽으로 도망가는 제초(齊楚) 연합군 뒤를 추격하여 성양(城陽)에 이르렀을 때는 초나라 군사들은 모두 한군의 포로가 되었다.


한왕 4년(B.C 203), 한신은 제나라의 모든 성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그 땅을 평정했다.

-출처 : 회음후 열전-



9. 해하전투


한왕 5년(B.C 202년), 한왕과 제후들은 일제히 초군을 향해 진격하여 해하에서 항우와 결전을 벌렸다. 제왕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초군과 정면으로 대진했고, 그의 부장 공장군(孔將軍)은 좌익을, 비장군(費將軍) 우익을 맡았다. 한왕은 한신의 후위를, 강후 주발(周勃), 시장군(柴將軍)은 한왕의 배후에 주둔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케 했다. 한신의 본대가 먼저 초군과 회전에 들어갔으나 전세가 불리하자 뒤로 후퇴했다. 그 틈을 타서 공장군과 비장군의 좌익과 우익이 초군의 양 측면을 공격했다. 이에 초군의 전세가 불리해졌다. 그틈을 타서 후퇴를 하던 한신의 본대가 반격을 가함으로 해서 초군은 대패했다. 한나라 군사들이 사방에서 부르는 초가가 들려오자 항우는 초나라의 모든 땅은 이미 한나라가 점령한 것으로 알았다. 이윽고 항우가 싸움에서 지고 달아나 초나라의 전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한왕의 명을 받은 기병대장 관영은 항우의 뒤를 쫓아가 동성(東城)에서 그의 목을 베었다. 한군은 이 싸움으로 항우의 군사 8만의 목을 베고 초나라의 땅을 모두 공략했다.

-출처 : 고조본기-




총 전적) 9전 9 승률-100%







첫 패배가 마지막 패배가 된 항우... 역사의 승자가 되지 못한 불패의 명장 한신.... 이런 요소들을 보면 초한지가 참 재미나죠. ㅋㅋ

그나저나 유방은 항우만 아니면 죄다 털어버리네요.ㄷㄷㄷ

1 Comments
발라모굴라스 2020.01.17 17:58  
삼국지 읽고 초한지를 읽으면서 느낀점은
유방이 너무 찌질해서 아쉬웠던거
삼국지 유비의 모습을 바랬는데 보면 너무 한량에다가 찌질한 모습이 많이 나와서 아쉬웠음
그에 반에 항우는 개간지 상남자 느낌
읽으면서 항우를 계속 응원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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